▣ 해피스님과의 대화(서울 240928) ― 문답[번뇌(漏)=āsava & 깨달음의 자리 & 선정에서의 사유](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5rJHuecEz94&t=2s
1. takka 안에서 진행되어 소망(nandi)을 생겨나게 하는 심(心)의 내적인 행위인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물다’는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입니다.
• abhinandati: rejoices at; finds pleasure in; approves of. (abhi + nand + a)
• abhivadati[abhi + vadati] 1. to speak out, declare, promise. 2. to speak (kindly to, to welcome, salute, greet. In this sense always combd. with abhinandati
원어의 의미에 따라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물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여기서 드러낸다는 것은 기쁜 상태를 밖으로 알려지게 하고 뽐낸다는 의미를 담아 번역한 것입니다.
2. 번뇌
번뇌의 부서짐을 의미하는 누진(漏盡)은 āsavakkhaya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완성이 지시하는 번뇌는 āsava이고 욕루(慾漏-kāmāsava)-유루(有漏-bhavāsava)-무명루(無明漏-avijjāsava)로 제시됩니다.
그런데 나무위키에서 번뇌는 범어 klesa의 의역이어서 ‘인간의 몸이나 마음을 괴롭히고 어지럽히며 미혹하게 하는 모든 정신작용’이라고 나타납니다. klesa 또는 kilesa는 passion; lust; depravity; impurity. (m.)여서 마음의 오염원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고 해야 하는데, āsava보다 포괄적 의미를 가지는 부정적 요소라고 해야 합니다.
한역(漢譯)의 과정에서 일반적 의미의 오염원인 klesa가 번뇌로 번역되고, 또한, 니까야의 의미로 수행에서 최종적으로 해소해야 하는 부정적 요소인 āsava를 다시 번뇌로 번역하는 데서 오는 번역의 문제가 번뇌에 대한 분명함을 상실케 하는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까야 공부에서 번뇌 또는 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은 오직 āsava의 번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3. 깨달음의 자리 ― (질문) 깨달음의 자리가 사선(四禪)-삼명(三明)으로의 제사선(第四禪)인지 아니면 구차제주(九次第住)로의 상수멸(想受滅)인지?
(대답) 사선-삼명의 깨달음도 제4선에서 직접 깨닫는 것이 아니고, 제4선의 토대 위에서 삼명(숙주명-천안명-누진명)의 과정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특히, (DN 2-사문과경)은 제4선 이후 8가지 앎의 방향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색계를 넘어 무색계로 나아가는(또는 마음이 몸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는 = 단견의 극복) ①지(知)와 견(見), 색계 신들의 몸을 만들어내는 ②의성신(意成身) 그리고 ③~⑧은 육신통(六神通)입니다. 이때, 깨달음의 과정은 육신통에 속한 누진통(漏盡通)입니다.
; 「사문과경의 수행체계도」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1_02&wr_id=90&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1_02
그래서 제4선에서 깨닫는 것이 아니고 제4선을 토대로 더 나아가는 과정 즉 무색계로 올라가고 최후에 누진통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누진 즉 지혜로써 보아 번뇌 다하여 성취한 아라한을 혜해탈자라고 하는데, (AN 9.44-혜해탈자 경)은 초선~비상비비상처의 단계지어진 혜해탈자에 이어 상수멸에서의 단계지어지지 않은 혜해탈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번뇌 다한 아라한 즉 혜해탈자로의 깨달음은 제4선의 토대 위에서 상수멸까지 나아가서 완성됩니다.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9_07_05&wr_id=2
결국 사선(四禪)-삼명(三明)으로의 깨달음 자체가 구차제주(九次第住)의 끝인 상수멸(想受滅)에서 단계지어지지 않은 혜해탈자(慧解脫者)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4. 선정에서의 사유 ― (질문) 선정(禪定)에서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
(대답) 선정 禪定 <불교> 한마음으로 사물을 생각하여 마음이 하나의 경지에 정지하여 흐트러짐이 없음. <표준국어대사전>
중국불교에서 선정(禪定)은 선(禪)과 정(定)을 합한 용어인데, 선과 정의 의미에 차별을 두지 않고 삼매를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정의입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선(善)은 jhāna이고, 정(定)은 samādhi입니다.
이때, 정(定-samādhi)는 심일경성(心一境性) 즉 심(心)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됨을 의미하고, 선(善-jhāna)은 ‘악한 불선법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삼매 위에서 선을 통해 부정적 요소를 버리고 삶을 향상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선(禪)인 것입니다. → (DN 27.12-처음에 대한 앎 경, 바라문 계급)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3_04&wr_id=15
특히, 선(禪)은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초선의 삼매를 성취하여 머물면서 악한 불선법을 버리는 일을 하는 과정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른 삼매 →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법의 위빳사나 → 여실지견 → 사마타-위빳사나 → 해탈지견」으로 구성되어 깨달음에 이르는데, 집중-관찰-느낌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이렇게 정(定-samādhi)과 선(善-jhāna)을 구분하여 의미를 드러내면 선정에서의 사유, 정확히는 삼매 위에서의 사유에 의한 깨달음은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