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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확장

주제의 확장(AN-6) ‒ 「kiṃvādī kimakkhāyī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인가?)」

▣ 주제의 확장(AN-6) ‒ 「kiṃvādī kimakkhāyī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인가?)」


부처님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치는가? kiṃvādī kimakkhāyī는 7개의 경에 나타나는데, (MN 18-꿀 과자 경)/(MN 126-부미자 경)/(SN 12.24-외도 경)/(SN 12.25-부미자 경)/(SN 12.26-우빠와나 경)/(SN 22.2-데와다하 경)/(AN 2.33-42-평정한 심(心) 품)입니다. 부처님이 질문을 받고 직접 설한 경들과 사리뿟따 존자가 부처님을 소개하는 경들 그리고 부미자 존자의 설명에 대해 부처님이 인정하는 경으로 구성됩니다.


1.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경 ― (MN 18-꿀 과자 경)/(SN 12.26-우빠와나 경)/(AN 2.33-42-평정한 심(心) 품)


• (MN 18-꿀 과자 경) ― 세상에 있는 무엇과도 다투면서 머물지 않음 →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 머무는, 불확실함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난 바라문에게는 상(想)들이 잠재하지 않음


• (SN 12.26-우빠와나 경) ― 괴로움은 연기(緣起)된 것 → 촉(觸)을 연(緣)하여 생김


• (AN 2.33-42-평정한 심(心) 품) ― 결실 있음과 결실 없음을 말하는 사람 → 몸과 말과 의(意)의 나쁜 행위,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은 결실 없음 & 몸과 말과 의(意)의 좋은 행위, 다양한 선법들은 결실 있음


; (SN 22.94-꽃 경)은 「비구들이여, 나는 세상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단지 세상이 나를 상대로 다툴 뿐이다. 비구들이여, 법을 말하는 자는 세상에 있는 무엇과도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세상에서 현자들에게 없다고 동의 된 것을 나도 역시 ‘없다’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현자들에게 있다고 동의 된 것을 나도 역시 ‘있다’라고 말한다.」라고 하면서 없다고 동의 된 것은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인 오온(五蘊)이고, 있다고 동의 된 것은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인 오온이라고 알려줍니다. 또한, 세상에 있는 세상의 법이 바로 오온이라는 것을 깨닫고 실현하였다고 밝힙니다. 그래서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는 것은 오온(五蘊)에 대해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기를 주장하지 않고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변하는 성질 즉 사실에 부합 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MN 18-꿀 과자 경)은 세상과 다투지 않는 이런 삶에 대해,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 머물고 불확실함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난 바라문 즉 아라한에게 상(想)들이 잠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역으로 세상과 더불어 다투는 삶 즉 중생들에게는 오온(五蘊)에 대해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기를 주장하여 무상(無常)하고 괴롭고 변하는 성질 즉 사실에 괴리된 삶을 통해 상(想)들이 잠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중생들은 잠재된 상(想)들 즉 번뇌[루(漏)]의 영역에 있습니다. 번뇌의 영역 즉 유위(有爲)의 삶은 연기(緣起)의 조건 관계[제행무상(諸行無常)]에 따르는 괴로움[제행개고(諸行皆苦)]을 생겨나게 하는데, 연기(緣起)된 괴로움입니다. 특히, 무명(無明)~유(有)의 열 지분은 몸이 유지되는 한평생 동안의 괴로움을 순환 구조로써 설명합니다. 번뇌로부터 출발하는 유위의 삶의 과정 즉 큰 순환 고리 구조로 인식에 참여하는 활성존재(bhūta)와 작은 순환 고리의 구조로 인식에 참여하는 욕탐(欲貪)의 공동주관에 의한 인식 과정에서 촉(觸)을 연(緣)하여 수(受)가 생긴다는 설명입니다. 


수(受)에 대한 이런 이해 위에서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SN 12.26-우빠와나 경)은 괴로움은 ‘누가 만들었는지’의 관점이 아니라 ‘촉(觸)을 연(緣)하여 생기는 연기(緣起)된 괴로움’을 정체성으로 하는 것이어서 촉(觸)과 다른 곳에서 경험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상(想)의 잠재에 의한 ①잠재 순환 고리, 식(識)이 머물고 늘어남에 의한 ②큰 순환 고리, 욕탐(欲貪)의 양방향성에 의한 ③작은 순환 고리는 모두 행위를 시발점으로 하는데, 행(行) 즉 유위에서 형성하는 작용이고 연기(緣起)의 취(取)입니다. 그래서 괴로울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는 모두 행위의 결과입니다. 이때, 괴로움을 초래하는 행위는 나쁜 행위로서 불선법(不善法)/무익(無益)에 속하고, 행복을 초래하는 행위는 좋은 행위로서 선법(善法)/유익(有益)에 속한다는 것이 부처님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AN 2.33-42-평정한 심(心) 품)에서 부처님은 결실 있음과 결실 없음을 말한다고 하는데, 몸과 말과 의(意)의 나쁜 행위, 다양한 악한 불선법들은 결실이 없고, 몸과 말과 의(意)의 좋은 행위, 다양한 선법들은 결실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여기의 결실은 고멸(苦滅)의 방향성을 가지는 결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MN 18-꿀 과자 경)/(SN 12.26-우빠와나 경)/(AN 2.33-42-평정한 심(心) 품)은 부처님이 말하고 가르친 것을 ①사실[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에 부합 한 삶으로의 깨달음과 ②사실에 괴리된 삶이 초래하는 괴로움 그리고 ③불선법(不善法)/무익(無益)과 선법(善法)/유익(有益)의 선언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사리뿟따 존자가 설한 경 ― (SN 12.24-외도 경)/(SN 12.25-부미자 경)/(SN 22.2-데와다하 경)


• (SN 12.24-외도 경) ― 괴로움은 연기(緣起)된 것 → 촉(觸)을 연(緣)하여 생김


• (SN 12.25-부미자 경) ― 즐거움과 괴로움은 연기(緣起)된 것 → 촉(觸)을 연(緣)하여 생김


• (SN 22.2-데와다하 경) ― 욕탐(欲貪)의 제어 → 오온(五蘊)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어 → 욕탐(欲貪)이 제어되지 않으면 오온(五蘊)이 변하고 다른 것이 될 때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겨남 : 금생(今生) - 괴로움, 내생(來生) - 악처(惡處)에 태어남 → 욕탐(欲貪)이 제어되면 오온(五蘊)이 변하고 다른 것이 될 때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가 생겨나지 않음 : 금생(今生) - 행복, 내생(來生) - 선처(善處)에 태어남


; ‘괴로움은 누가 만든 것인가?’의 질문에 대해 (SN 12.24-외도 경)에서 사리뿟따 존자는 (SN 12.26-우빠와나 경)과 같은 답변을 합니다. 이 문답은 부처님과 아난다 존자의 대화로 이어지는데, 연기(緣起) 곧 십이연기(十二緣起)로 확장되어 상세히 설명됩니다. (SN 12.25-부미자 경)은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확장하여 같은 주제를 설명하는데, 몸과 말과 의(意)가 있을 때 몸과 말과 의(意)의 의도 즉 행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고, 무명(無明)이 따라갈 때 생기는 몸과 말과 의(意)는 무명이 남김없이 바래어 소멸할 때 없게 되어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의 조건이 해소된다고 말합니다. 몸과 말과 의(意)가 무명 때문에 생긴다는 의미인데 연기(緣起)의 행(行)들[신행(身行)-구행(口行)-심행(心行)]이 몸-말-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형성작용이라는 해석의 타당성을 확인해 줍니다.


한편, (SN 22.2-데와다하 경)은 부처님이 말하고 가르친 것으로 욕탐(欲貪)의 제어를 제시하는데, 욕탐이 집착이고 족쇄이고 자기화를 이끄는 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SN 22.89-케마까 경)에 의하면, 아(我-attan)를 전제한 관찰은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나는 있다(asmi)’라는 자기화(māna), ‘나는 있다’라는 관심(chanda),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anusaya)을 함께 이끄는데, 이 세 가지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버려진다 해도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다가 오취온(五取蘊)의 생겨남-무너짐의 관찰을 통해 제거됩니다. 아(我-attan)를 전제한 관찰은 「딱까의 영역에서의 잠재성향(anusaya) → 관심(chanda)에 의한 인식으로의 전달 → 육내-외입처에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māna)」의 과정으로 ‘나는 있다’라는 관찰로 전개되는 점을 고려하면, 욕탐(欲貪)의 제어는 자기화의 제어이면서 잠재성향 즉 번뇌의 부서짐을 통해 완성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욕탐의 제어는 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과 함께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의 수행 체계를 말하는 것이어서 그대로 부처님이 말하고 가르친 것의 고멸(苦滅)의 측면을 대표합니다.


이렇게 (SN 12.24-외도 경)/(SN 12.25-부미자 경)/(SN 22.2-데와다하 경)은 괴로움의 정체성 위에서 연기(緣起)와 그 조건 관계의 해소 그리고 해소 과정으로의 욕탐의 제어를 설명한다고 하겠습니다.


3. 부미자 존자의 설명에 대해 부처님이 인정하는 경 ― (MN 126-부미자 경)


• (MN 126-부미자 경) ― 소원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치에 맞지 않게 범행(梵行)을 실천하면 과(果)의 얻음은 불가능하고, 이치에 맞게 범행(梵行)을 실천하면 과(果)의 얻음은 가능함


; 이렇게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연기(緣起)된 것이기 때문에 결실을 얻고자 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 즉 범행을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형태로 접근하든 간에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결실을 가져오는 바른 방법을 선택해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고멸(苦滅) 즉 락(樂)의 결실을 얻기 위한 바른 방법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4. 한편, 이 7개의 경은 


1) 세상과 다투지 않는 삶을 말하는 (MN 18-꿀 과자 경) ― 고멸(苦滅)


2) 연기된 즐거움과 괴로움을 말하는 (SN 12.24-외도 경)/(SN 12.25-부미자 경)/(SN 12.26-우빠와나 경) ― 고(苦)와 고집(苦集)


3) 욕탐(欲貪)의 제어라는 요점 위에서 불선법(不善法)/무익(無益)의 결실 없음과 선법(善法)/유익(有益)의 결실 있음 그래서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길 즉 범행의 실천을 통한 소원 성취를 말하는 (SN 22.2-데와다하 경)/(AN 2.33-42-평정한 심(心) 품)/(MN 126-부미자 경) ― 고멸도(苦滅道)


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경들은 어떤 주제에서든 고(苦)와 고멸(苦滅) 그리고 그 확장된 개념으로의 사성제(四聖諦)의 틀 안에서 해석됩니다. 그리고 이런 틀 안에서 부처님의 깨달음도 정의되는데, (MN 91-브라흐마유 경)/(MN 92/KN 5.33-셀라 경)입니다. ― 「abhiññyyaṃabhiññāaṃ bhāetabbaña bhāitaṃ pahāabbaṃpahīaṃme, tasmābuddhosmi brāhmaṇa. 나는 실답게 알아야 하는 것을 실답게 알았고, 닦아야 하는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하는 것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라문이여, 나는 불(佛-buddha-부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깨달음이고, 사성제(四聖諦)이며, 고(苦)의 해석에 이어지는 고멸(苦滅)의 실현이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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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대원행 2022.06.11 21:12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2&wr_id=28&page=2 참조 (1)말하고 가르친 것, 2)보시 & 소유-존재-해탈된 삶 & 성자(유학-무학)의 의미)
대원행 02.10 20:50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3_06&wr_id=3 참조 (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26,부미자 경[결실을 얻음 - 소원 유무가 아니라 사실에의 부합 여부(팔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