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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승(佛法僧)

가르침/법(法)/DHAMMA

0 1,318 2017.09.30 20:27

가르침/법(法)/DHAMMA


가르침[법(法)-dhamma]은 살아있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반열반을 앞두고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法)과 율(律)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의 말을 경(經)과 견주어 보고 율(律)에 비추어보아서 만약 경과 견주어지고 율과 맞는다면 여기서 '이것은 세존의 말씀입니다. 이 비구가 잘 호지한 것입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대반열반경(D16)>」라고 합니다. 경(經)으로 대표되는 법(法) 그리고 율(律)이 부처님 가신 뒤에는 부처님의 권위를 이어 스승의 역할을 가지는 것입니다. 물론 공부의 기준에 의하면 4부 니까야와 일부 쿳다까 니까야가 바로 그 경입니다. 

그런데 법(法)[dhamma]은 가르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법(法)은 존재이고 인식의 대상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있는 것이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지칭합니다.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있는 것이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법입니다. 그런 가운데 법에 속하는 내가 법에 속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관계를 맺는 과정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일체인가? 눈과 형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mano[意]와 법 ㅡ 이를 일러 일체라 한다." [육내입처(六內入處)-육외입처(六外入處) → 십이처(十二處)]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이런 일체를 버리고 다른 일체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로만 떠벌리는 것일 뿐이다. 만일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더 큰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그들의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일체 경(S35:23)>
 
“kiñca, bhikkhave, sabbaṃ? cakkhuñceva rūpā ca, sotañca VAR saddā ca, ghānañ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bā ca, mano ca dhammā ca — 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yo, bhikkhave, evaṃ vadeyya — ‘ahametaṃ sabbaṃ paccakkhāya aññaṃ sabbaṃ paññāpessāmī’ti, tassa vācāvatthukamevassa VAR; puṭṭho ca na sampāyeyya, uttariñca vighātaṃ āpajjeyya. taṃ kissa hetu? yathā taṃ, bhikkhave, avisayasmin”ti. 

이때 나는 오취온(五取蘊)입니다. 오온(五蘊)이라는 법과 집착[취(取)]이라는 법의 결합 즉 오온과 집착을 조건으로 생겨난 또 하나의 법입니다. 그리고 집착[취(取)]라는 법은 나 스스로에게서나 대상과의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불만족을 만들어내는데[고집(苦集)], 고(苦)[괴로움]라고 부릅니다.

집착이 있는 한 괴로움은 있습니다. 오취온인 나를 구성하는 집착은 욕탐(欲貪)[chandarāga]인데, 욕(欲)[chanda]와 탐(貪)[rāga]가 결합되어 있는 것 즉 탐에 붙잡힌 욕입니다. 이때, 탐(貪)[rāga]는 욕탐(慾貪)[kāmarāga]-색탐(色貪)[rūp -arāga]-무색탐(無色貪)[arūparāga]을 총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탐(慾貪)에 붙잡힌 욕(欲)과 색탐(色貪)에 붙잡힌 욕(欲) 그리고 무색탐(無色貪)에 붙잡힌 욕(欲)을 포괄하여 욕탐(欲貪)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취온(五取蘊)인 나는 소유의 삶[욕계(慾界)]과 존재의 삶[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포괄하는 중생으로의 전체 영역을 의미합니다.

욕탐(欲貪) 즉 집착을 구성요소로 하는 나는 욕탐이 야기하는 불만족을 겪어야 합니다. 구성요소에 포함된 탐(貪)에 조건 지어진 존재이기에 겪어야 하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존재하는 것[법(法)-dhamma]들이 있고, 존재의 하나로서 존재의 문제 때문에 불만족을 겪어야 하는 것이 나의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문제는 쉽게 풀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부처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 문제를 완전히 풀어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런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았습니다. 그 길을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가서 그 끝에 닿았습니다. 불만족[고(苦)-dukkha]로부터 벗어나고 만족[고멸(苦滅)=락(樂)-sukha]이 실현된 자리입니다. 열반(涅槃)[nibbāna]이 실현된 것입니다.

이제 그간 없던 새로운 존재가 생겨났습니다. 일체의 불만족이 소멸한 열반이라는 것[존재-법(法)-dhamma]입니다. 그리고 그 열반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열반과 함께 완성된 또 하나의 새로운 존재 즉 열반으로 이끄는 길은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부처님은 이것도 법(法)[dhamma]이라고 불렀습니다.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의 새로운 존재라는 2차적 의미를 담아 다시 존재라고 이름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法)에는 2차 의미가 생겨납니다.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좁게는 열반으로 이끄는 방법이고, 넓게는 불만족의 해소를 위한 총괄적인 과정이며, 다르게는 진리(眞理)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열반의 실현[고멸(苦滅)]이라는 깨달음에 더해 그 방법[고멸도(苦滅道)]를 제자들을 위해 공개합니다. 가르침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도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법(法)[dhamma]이라고 부릅니다. 열반으로 이끄는 방법을 포함하는, 불만족의 해소를 위한 총괄적인 과정 즉 진리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法)[dhamma]이라고 이름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法)[dhamma]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法)[dhamma]은 여러 가지로 설명됩니다.

1. 법의 정형구 -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①sandiṭṭhiko ②akāliko ③ehipassiko ④opaneyyiko ⑤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 산딧티꼬- 아깔-리꼬- 에-히빳시꼬- 오-빠네이이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①스스로 보여지는 것이고, ②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③와서 보라는 것이며, ④열반으로 이끌고, ⑤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2. ‘이것은 법(法)이고 이것은 율(律)이고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이다[‘eso dhammo eso vinayo etaṃ satthusāsanan’ti].‘라고 말하는 경전

1) 교법 경(A7:79)[Satthusāsanasutta - “Ye kho tvaṃ, upāli, dhamme jāneyyāsi—  ‘ime dhammā na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ntī’ti; ekaṃsena, upāli, dhāreyyāsi—  ‘neso dhammo neso vinayo netaṃ satthusāsanan’ti. 

우빨리여, 그대가 '이 법들은 완전한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고요해짐으로, 실다운 지혜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라고 알고 있는 그러한 법들은 '이것은 법이 아니고, 이것은 율이 아니고, 이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다.'라고 전적으로 호지해야 한다.

Ye ca kho tvaṃ, upāli, dhamme jāneyyāsi—  ‘ime dhammā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ntī’ti; ekaṃsena, upāli, dhāreyyāsi—  ‘eso dhammo eso vinayo etaṃ satthusāsanan’”ti. 

우빨리여, 그러나 그대가 '이 법들은 완전한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고요해짐으로, 실다운 지혜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한다.'라고 알고 있는 그러한 법들은 '이것이 법이고, 이것이 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법이다.'라고 전적으로 호지해야 한다."

2) 율장 소품 고따미의 청문[gotamissavana] = <간략하게 경(A8:53)> -  “ye kho tvaṃ, gotami, dhamme jāneyyāsi — ime dhammā sarāgāya saṃvattanti no virāgāya, saññogāya saṃvattanti no visaññogāya, ācayāya saṃvattanti no apacayāya, mahicchatāya saṃvattanti no appicchatāya, asantuṭṭhiyā saṃvattanti no santuṭṭhiyā, saṅgaṇikāya saṃvattanti no pavivekāya, kosajjāya saṃvattanti no vīriyārambhāya, dubbharatāya saṃvattanti no subharatāya; ekaṃsena, gotami, dhāreyyāsi — neso dhammo, neso vinayo, netaṃ satthusāsananti. 

고따미여, 그대가 알고자 하는 법(法)이 ①탐(貪)과 함께함으로 이끌지 이탐(離貪)으로 이끌지 않고, ②결박과 함께함으로 이끌지 결박에서 벗어남으로 이끌지 않고, ③쌓음으로 이끌지 포기로 이끌지 않고, ④탐욕으로 이끌지 만족으로 이끌지 않고, ⑤불만족으로 이끌지 행복으로 이끌지 않고, ⑥교제함으로 이끌지 멀리 여읨으로 이끌지 않고, ⑦게으름으로 이끌지 노력으로 이끌지 않고, ⑧유지하기 어려움으로 이끌지 유지하기 쉬움으로 이끌지 않는 것을 안다면, 고따미여,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법(法)이 아니고 그것은 율(律)이 아니고 그것은 스승의 교설이 아니라고 알아야 한다."

ye ca kho tvaṃ, gotami, dhamme jāneyyāsi — ime dhammā virāgāya saṃvattanti no sarāgāya, visaññogāya saṃvattanti no saññogāya, apacayāya saṃvattanti no ācayāya, appicchatāya saṃvattanti no mahicchatāya, santuṭṭhiyā saṃvattanti no asantuṭṭhiyā, pavivekāya saṃvattanti no saṅgaṇikāya, vīriyārambhāya saṃvattanti no kosajjāya, subharatāya saṃvattanti no dubbharatāya; ekaṃsena, gotami, dhāreyyāsi — eso dhammo, eso vinayo, etaṃ satthusāsanan”ti.

그런데 고따미여, 그대가 알고자 하는 법(法)이 ①이탐(離貪)으로 이끌지 탐(貪)과 함께함으로 이끌지 않고, ②결박에서 벗어남으로 이끌지 결박과 함께함으로 이끌지 않고, ③포기로 이끌지 쌓음으로 이끌지 않고, ④만족으로 이끌지 탐욕으로 이끌지 않고, ⑤행복으로 이끌지 불만족으로 이끌지 않고, ⑥멀리 여읨으로 이끌지 교제함으로 이끌지 않고, ⑦노력으로 이끌지 게으름으로 이끌지 않고, ⑧유지하기 쉬움으로 이끌지 유지하기 어려움으로 이끌지 않는 것을 안다면, 고따미여, 어떤 경우에도 이것은 법(法)이고 이것은 율(律)이고 이것은 스승의 교설이라고 알아야 한다."

3. ‘yassa kho pana te atthāya dhammo desito, so na niyyāti takkarassa sammā dukkhakkhayāyā’ti 
                     <빠띠까의 경(D24)>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대로 실천하기만 하면 바르게 괴로움의 소멸로 나아가는 가르침입니다.

4. evaṃ svākkhāto, bhikkhave, mayā dhammo uttāno vivaṭo pakāsito chinnapilotiko.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내가 잘 설한 가르침은 분명하고, 열려 있고, 확실하고, 새로운 것이다.

5. 집착이 없는 법[anālaye dhamma]-자만을 제어하는 법[mānavinaye dhamma]-고요함으로 이끄는 법[opasamike dhamma]-무명을 제어하는 법[avijjāvinaye dhamma] <경이로움 경2(A4:128)[Dutiyatathāgataacchariyasutta]>

6. 깨달음을 위한 법 - 제어를 위한 법 - 고요함을 위한 법 - 구경열반을 위한 법

buddho so bhagavā bodhāya dhammaṃ deseti, danto so bhagavā damathāya dhammaṃ deseti, santo so bhagavā samathāya dhammaṃ deseti, tiṇṇo so bhagavā taraṇāya dhammaṃ deseti, parinibbuto so bhagavā parinibbānāya dhammaṃ desetī”ti   <삿짜까 짧은 경[cūḷasaccakasuttaṃ(MN 35)>

'깨달으신 세존께서는 깨달음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제어되신 세존께서는 제어를 위해 법을 설하신다. 고요하신 세존께서는 고요함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건너신 세존께서는 건너게 하기 위해 법을 설하신다. 구경열반을 성취하신 세존께서는 구경열반을 위해 법을 설하신다.'

그러면 이런 성격을 가지는 법은 구체적으로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까?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M28)>은 「벗들이여, 움직이는 생물의 발자취는 어떠한 것이든 모두 코끼리의 발자취에 포섭되고 그 크기에서 그들 가운데 최상이듯, 벗들이여, 이와 같이 유익한 법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모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포섭됩니다. 네 가지는 어떠한 것입니까?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거룩한 진리입니다.[“seyyathāpi, āvuso, yāni kānici jaṅgalānaṃ pāṇānaṃ padajātāni sabbāni tāni hatthipade samodhānaṃ gacchanti, hatthipadaṃ tesaṃ aggamakkhāyati yadidaṃ mahantattena; evameva kho, āvuso, ye keci kusalā dhammā sabbete catūsu ariyasaccesu saṅgahaṃ gacchanti. katamesu catūsu? dukkhe ariyasacce, dukkhasamudaye ariyasacce, dukkhanirodhe ariyasacce,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riyasacce”]」라고 합니다. 유익한 법 즉 도움 되는 가르침이라면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四聖諦)[고(苦)-고집(苦集)-고멸(苦滅)-고멸도(苦滅道)]에 포괄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은 여러 가지로 그 성격을 말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사성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사성제는 무엇입니까? 가르침이 살아 있는 부처님이듯이 구체적 가르침인 사성제의 이해는 부처님에 대한 이해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한다.’고 선언했는데, 불만족한 삶에 대한 자각과 만족한 삶의 실현이라는 불교의 두 가지 명제(命題)입니다. 그런데 고와 고멸은 모두 본질적인 것[아(我)]가 아니라 본질 아닌 것[무아(無我)]입니다. 무언가 조건에 의해서 불만족이 생겨나고, 그 조건의 해소를 통해서 불만족이 소멸한 만족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때, 불만족을 일으키는 조건 관계를 고집(苦集)이라고 하고, 그 조건의 해소에 의해 만족을 실현하는 특별한 길을 고멸도(苦滅道)라고 하는데, 고집(苦集)으로는 갈애[애(愛)-taṇhā] 또는 십이연기(十二緣起)가 제시되고, 고멸도(苦滅道)로는 중도(中道)인 팔정도(八正道)가 제시됩니다.

즉 부처님은 「불만족을 일으키는 갈애를 중도인 팔정도로써 제거하여 더 이상 불만족이 일어나지 않는 갈애의 소멸인 만족을 실현하는 체계」인 사성제로써 가르침의 구체적 내용을 삼고, 유익한 법 즉 도움 되는 가르침이라면 모두 이 체계 안에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삶의 메커니즘을 열두 과정으로 설명하는 십이연기를 설하는데, 이 과정이 바르지 못하게 진행되면 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므로 갈애와 더불어 고집(苦集)으로 제시하고, 바르게 진행되면 괴로움을 생겨나지 않게 하므로 갈애의 소멸과 함께 고멸(苦滅)로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고멸도(苦滅道)는 이 과정이 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제어하는 방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 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는 문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상황의 해소를 위한 정확한 방법을 배워 알고 실천함으로써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게 하는 것이 사성제에 의한 고멸의 실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는 깨달은 자[불(佛)-부처]의 정의와도 연결됩니다. 「나는 실(實)답게 알아야 할 것을 실답게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Buddha-불(佛)-부처]입니다.」라고 할 때, 알아야 할 것[고(苦)]-닦아야 할 것[고멸도(苦滅道)]-버려야 할 것[고집(苦集)]의 완결 상태[고멸(苦滅)]로서의 깨달음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불만족한 삶에 대한 자각[알아야 할 것]과 대응과정을 통해 만족한 삶을 실현함 즉 고(苦)와 고멸(苦滅)을 그 조건관계로 확장한 설명이라고 하였는데,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 이해하는 고멸의 실현과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또한, 오취온(五取蘊) 즉 존재의 측면에서 깨달은 자[불(佛)-부처]가 정의되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알아야 하는 것의 궁극은 오취온(五取蘊)으로, 버려야 하는 것의 궁극은 무명(無明)과 유애(有愛), 실현해야 하는 것의 궁극은 명(明)과 해탈(解脫), 닦아야 하는 것의 궁극은 사마타-위빳사나로 제시되었습니다.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 쌍을 이뤄 대응하는 불만족의 내적 조건인 [무명(無明)-유애(有愛)]와 만족의 내적 조건인 [명(明)-해탈(解脫)]에 대해 [무명(無明)-유애(有愛)]를 버리고 [명(明)-해탈(解脫)]을 실현하기 위한 실천행으로 제시되는 [사마타-위빳사나]를 통해 오취온의 결합 상태를 해소[집착인 욕탐의 제거]함으로써 일체의 불만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사성제의 궁극이라고 할 것입니다. 경전들은 팔정도(八正道)를 닦고 많이 행하는 것으로 이러한 실천 과정을 나타내는데, 바로 사성제에 의해 제시되는 고멸(苦滅)의 실현입니다.

한편, <달과 같이 경(S16:3)[candūpamasuttaṃ]>은 제자들에게 이러한 법의 전달지침을 이렇게 내려줍니다. -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이든지 사람들에게 ‘오, 참으로 저들이 내가 설하는 법을 듣기를. 들으면서 법을 이해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나에게 이해한 대로 행위 하기를’이라는 이런 마음으로 남들에게 법을 설하면, 비구들이여, 그것은 비구가 청정하지 못하게 법을 설하는 것이니라.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이든지 사람들에게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스스로 보여지는 것이고, 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와서 보라는 것이며, 열반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다. 오, 참으로 저들이 내가 설하는 법을 듣기를. 들으면서 법을 이해하게 되기를. 이해하면서 실현하기 위해 실천하기를‘ 이라는 이런 마음으로 남들에게 법을 설하면 그는 법의 바른 성품에 의해 남들에게 법을 설하고 연민과 애민에 의해 남들에게 법을 설하는 것이니, 비구들이여, 그것은 비구가 청정하게 법을 설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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