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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승(佛法僧)

불교는 무엇인가?

0 1,354 2017.10.01 10:47

불교는 무엇인가?


1. 사성제(四聖諦)로의 접근


불교는 고(苦)와 고멸(苦滅)이라는 두 가지 명제(命題)로부터 시작됩니다. 삶의 불만족[고(苦)]을 자각함으로써 불만족의 해소[고멸(苦滅)]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고와 고멸을 각각의 조건 관계[고집(苦集)-고멸도(苦滅道)]로 확장하면 고(苦)-고집(苦集)-고멸(苦滅)-고멸도(苦滅道)가 되는데, 보통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라고 하여 불교를 대표하는 가르침[진리-제(諦)]입니다.


불만족은 사실에 대한 무지와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집착에서 생깁니다. 불만족은 여러 가지로 제시되는데, 일반적으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취온고(五取蘊苦)를 더한 팔고(八苦), 그리고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와 고온(苦蘊) 등으로 알려집니다.


그런데 <괴로움 덩어리 큰 경(M13)>은 욕(慾)-색(色)-수(受)[느낌]의 위험함을 통해 불만족에 대한 다른 분류를 제시합니다. 욕(慾)[소유적 사유]는 달콤함은 적고 위험함은 아주 많아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삶의 과정에서 물질적인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갖가지 위험함을 현세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으로 구분해 알려주는데, 욕계(慾界) 중생의 삶에 수반되는 불만족입니다.


비록 몸 밖의 물질에 대한 소유적 사유인 욕(慾)에서는 벗어났다고 해도 몸이라는 물질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하는 색(色)은 젊음의 달콤함은 잠깐이어서 오래 가지 못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위험함을 알려주는데, 색계 중생의 삶에 수반되는 불만족입니다.


또한, 수행을 통해 몸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 커다란 행복의 느낌[수(受)] 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 느낌 또한 무상(無常)하고 불만족스럽고 변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알려주는데, 무색계 중생의 삶에 수반되는 불만족입니다.


그렇다면 욕계에서 색계로, 색계에서 무색계로, 달리 말하면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으로 삶을 향상한다고 해도 질과 양의 측면에서 그 크기는 줄어들지만 불만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자기존재 즉 중생의 삶이라는 것을 이 경은 알려준다고 하겠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불만족에 대한 대처 방법을 제시합니다. 고(苦)의 자각에 이어 고멸(苦滅)의 실현으로 나아감입니다. 욕(慾)의 위험에 대해서는 욕(慾) 가운데에서의 대처 방법과 욕(慾)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색(色)의 위험에 대해서는 색(色) 가운데에서의 대처 방법과 색(色)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수(受) 즉 무색(無色)의 위험에 대해서는 무색(無色) 가운데서의 대처 방법과 무색(無色)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괴로움 덩어리 큰 경(M13)>의 이해


느낌 : [육내입처-육외입처-욕탐]에 의한 1차 인식의 결과

욕탐(欲貪)을 구성하는 탐()

욕탐(慾貪)

색탐(色貪)

무색탐(無色貪)

물질의 영역

물질을 벗어난 영역

()이 몸 밖의 물질에까지 미침

()이 몸에까지 미침

()이 마음에만 미침

()의 만족

()의 불만족

몸의 만족

몸의 불만족

마음의 만족

마음의 불만족

()의 달콤함

()의 위험함

()의 달콤함

()의 위험함

()의 달콤함

()의 위험함

()의 벗어남

- ()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거

()의 벗어남

- ()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거

()의 벗어남

- ()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거



이때, 욕(慾) 가운데에서의 대처 방법은 오계(五戒)와 보시(布施)입니다. 오계를 통해 살아서의 인간다운 삶과 죽어서는 인간으로의 태어남을 확보합니다. 보시를 통해 살아서의 욕계하늘다운 삶과 죽어서는 욕계하늘에의 태어남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통해 삼매를 성취함으로써 욕계(慾界)에서 벗어나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하늘로 나아갑니다. 소유의 삶을 청산하고 존재의 삶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색(色)-무색(無色) 즉 존재의 삶 가운데에서의 대처 방법은 사념처 수행입니다. 사념처 수행을 통해 바른 삼매를 심화하여 존재의 삶에 수반되는 불만족을 줄여 나가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살아서는 삼매에 수반되는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을 점진적으로 더 높이 경험하게 되고, 죽어서는 수행의 경지에 대응하는 높은 하늘에 태어남을 확보합니다. 그리고 바른 삼매만이 제공하는 바른 앎과 봄[여실지견(如實知見)]에 토대해 사마타-위빳사나의 수행을 통해 존재에서 벗어나 해탈된 삶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욕(慾)-색(色)-무색(無色)에 대한 이러한 대처 방법을 팔정도(八正道)라고 부르는데, 고(苦)와 고멸(苦滅) 그리고 그 조건 관계들[고집(苦集)-고멸도(苦滅道)]로 구성되는 사성제(四聖諦)[고집멸도(苦集滅道)] 중 고멸(苦滅)의 조건 즉 불만족의 해소를 위한 특별한 방법[고멸도(苦滅道)]입니다.


팔정도는 삶에 대한 이해 위에서 설명됩니다. 소유의 삶에서의 대처 방법과 존재의 삶으로의 나아감, 그리고 존재의 삶에서의 대처 방법과 해탈된 삶으로의 나아감 입니다


팔정도는 바른 삼매[정정(正定)]을 중심으로 설명됩니다. 바른 삼매는 필수품을 가진 삼매인데,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의 일곱 가지가 필수품으로 제시됩니다. 그리고 이 일곱 가지는 ①업(業)의 제어, ②삼매의 성취라는 두 가지의 역할을 의미하는데, 제어된 업으로의 정견~정명과 실천 과정으로의 정정진~정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삼매는 업의 제어 위에서 성취된 삼매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 모두가 필수품이므로 바른 삼매는 필수품과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팔정도(八正道) 즉 여덟 가지 바른 길입니다. 


또한, 바른 삼매는 다른 삼매와 차별되는 삼매입니다. 추가적인 삶의 향상 즉 해탈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다른 삼매와 차별하여 바른 삼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해탈된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요건을 갖추는 과정이 필수품의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닦아서 바른 삼매를 성취했다는 것은 이렇게 ①필수품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필수품을 갖춘 삼매이고, ②추가적인 삶의 향상을 위한 요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바른 삼매인 존재의 삶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삼매는 초선(初禪)-제이선(第二禪)-제삼선(第三禪)-제사선(第四禪)의 사선(四禪)이라고 정의됩니다. 


이때 추가적인 삶의 향상을 위한 요건은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이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실다운 지혜[abhiññā]로서 존재의 실상[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알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팔정도는 바른 삼매의 성취로서 완성되는 길이 아닙니다. 바른 삼매의 이후 과정이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경전은 팔정도 즉 필수품을 갖춘 바른 삼매를 닦고 많이 행하면[ariyaṃ aṭṭhaṅgikaṃ maggaṃ bhāveti ariyaṃ aṭṭhaṅgikaṃ maggaṃ bahulīkaroti] 실다운 지혜[abhiññā]로써 사마타-위빳사나[고멸도(苦滅道)]를 닦아 오취온[고(苦)]를 완전히 알게 되고 무명(無明)과 유애(有愛)[고집(苦集)]을 버리고 명(明)과 해탈(解脫)[고멸(苦滅)]을 실현하게 된다고 합니다<객사(客舍) 경(S45:159)>. 


첫 번째 필수품인 바른 견해[정견(正見)]로 시작하는 팔정도[고멸도(苦滅道)]를 닦아 삶의 불만족[고(苦)]를 자각하고 그 원인인 애(愛)[고집(苦集)]을 버리고 불만족을 해소[고멸(苦滅)]하는 사성제(四聖諦)가 필수품을 갖춘 바른 삼매를 조건으로 하는 실다운 지혜 위에서 다시 반복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닦아 바른 삼매를 성취하여 여실지견으로 연결하는 1단계과정의 고멸도와 사성제가 팔정도 즉 바른 삼매를 닦고 많이 행할 때 사마타-위빳사나에 의해 명(明)과 해탈(解脫)을 실현하는 2단계 과정의 고멸도와 사성제로 연결되어 삶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2단계의 수행과정을 통해 2단계의 깨달음으로써 삶을 완성하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때 1단계의 완성점인 여실지견의 상태를 법안(法眼)을 얻었다(*)고 하는데 예류자(預流者)라는 성자의 단계로 설명하고, 2단계 완성점인 명(明)과 해탈(解脫)의 상태를 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을 성취했다고 하는데 아라한(阿羅漢)이라는 성자의 단계로 설명하는 삶의 완성자리입니다. 


※ 법안이 열림과 법안을 얻음을 구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무상(無常)의 이해를 의미하는 ‘법안의 열림’은 예류도(預流道)에 드는 것이고,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관통을 의미하는 ‘법안을 얻음’은 예류자(預流者)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2. 배워 알고 아는 대로 실천하여 실현하는 불교


이제 불교의 역할이 정의됩니다. 집착[취(取)]를 줄이는 공부[교학+수행]을 통해 삶을 욕계인간에서 욕계하늘로, 다시 존재의 삶으로 향상시키고, 더 나아가 오취온 즉 자기존재를 소멸하고 해탈하는 것입니다. 모든 불만족의 소멸이고, 열반의 실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라고 찾아 나서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을 하다보면 정작 해야 하는 이 일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인지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것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부처님보다 더 정확히 나는 누구인지 설명할 수 있는 스승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워 아는 그대로에 의지해 나를 소멸함으로써 열반을 실현하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소유의 삶과 존재의 삶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소유와 존재의 영역을 모두 넘어선 해탈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길 즉 수행의 목적 때문입니다. 


소유의 삶은 존재의 삶 위에 ‘내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얹어진 삶입니다. 그리고 해탈된 삶은 존재의 소멸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해탈된 삶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소유의식이 얹어진 상태에서는 출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덧씌워진 소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소유의 문제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의 문제를 드러낼 때 그 해결의 길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중첩된 삶의 문제를 순차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존재의 문제를 벗어나 해탈된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유의 영역에서 먼저 벗어나야 하는데, 욕계중생이 소유의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삼매에 들어 머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삼매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욕계중생은 삼매의 토대가 없으면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해탈하여 열반을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팔정도[사념처 → 바른 삼매 → (여실지견) → 사마타-위빳사나]로 정의됩니다. 사념처에 의해 삼매를 성취하고, 삼매에 들어 머무는 가운데 사마타-위빳사나로써 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열반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불교신자는 바로 이것을 「배워 알고 아는 대로 실천하여 실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사실에 대한 무지와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집착에서 생기는 불만족」을 「사실에 대한 바른 앎의 구축을 통해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3. 존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


나는 오취온입니다. 오온(五蘊)과 집착[취(取)]인 욕탐(欲貪)이 결합하여 생겨난 조건적인 존재[행(行)]입니다. 이런 나에게서 존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은 조건이 달라지면 따라서 변하기 마련입니다[무상(無常)]. 그렇다면 오온과 집착을 조건으로 생겨난 나는 오온과 집착의 상태가 달라지면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존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오온과 집착의 상태를 불만족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로 바꿔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오온과 집착의 상태를 어떻게 바꿔야 합니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온과 집착의 결합 상태를 해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착은 오온 밖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오온으로 전개되는 삶의 과정에서 오온의 병듦을 조건으로 생겨나 인식과정에 참여하는 존재 내면의 것인 욕탐(欲貪)이 바로 집착이기 때문에 떼어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온과 집착의 결합을 해체하는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은 결합은 유지한 채 집착의 상태를 집착 아닌 상태로 바꾸는 것입니다.


욕(欲)[chanda]과 탐(貪)[rāga]이 결합한 욕탐(欲貪) [chandarāga]을 해체해서 탐(貪)[rāga]을 버리고 욕(欲) [chanda]만 남게 하면, 욕(欲)[chanda]는 더 이상 집착이 아닌 의욕(意欲)-열의(熱意)-지향성으로 작용하는 삶의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면 오온과 욕(欲)[chanda]의 결합에 의해 진행되는 삶의 과정은 더 이상 자기존재[sakkāya]인 내가 아닙니다. 살아가지만 더 이상 내가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인데, 이러한 상태를 해탈(解脫)[vimutti]이라고 하고, 이러한 삶이 일체의 불만족이 해소된 아라한입니다. 삶의 완성입니다.


욕(欲)[chanda] 또는 욕탐(欲貪)[chandarāga]은 오온과 결합하고, 오온의 현재인 육내입처-육외입처와 함께 1차 인식에 참여합니다. 그리고 1차 인식은 새로운 식(識)을 생겨나게 합니다.


1차 인식에 참여하는 욕탐(欲貪)[chandarāga]은 탐(貪) [rāga]의 상태에 따라 육외입처를 왜곡합니다(*). 동일한 대상-세상을 탐의 상태에 따라 욕계로 색계로 무색계로 왜곡하여 인식하게 하여 왜곡된 식(識)을 생겨나게 합니다. 욕계중생-색계중생-무색계중생으로의 식(識)을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욕탐(欲貪)[chandarāga]이 참여하는 이런 1차 인식을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ayonisomanasikāra]라고 합니다.


(*)이렇게 왜곡된 육외입처 즉 인식 대상을 nimitta[상(相)]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1차 인식에 참여하는 욕(欲)[chanda]은 육외입처를 왜곡하지 않습니다. 인식 대상을 대상 그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왜곡되지 않은 식(識)을 생겨나게 합니다. 더 이상 욕계중생에도 색계중생에도 무색계중생에도 속하지 않는 해탈된 삶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욕(欲)[chanda]이 참여하는 이런 1차 인식을 여리작의(如理作意)[yonisomanasikāra]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탐(貪)[rāga]을 제거하는 수행입니다. 「존재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의 구체적 내용이 탐(貪)[rāga]을 제거하고 욕(欲)[chanda]과 결합된 오온(五蘊)으로의 삶을 실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몸이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음 즉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삼매 위에서 진행되는 사마타 수행이 [염오(厭惡) → 이탐(離貪) → 심해탈(心解脫) → (여리작의)]하는 수행인 것이 그렇고, 삼매 아닌 일상의 삶에서도 탐(貪)[rāga]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여리작의에 의해 생겨나는 해탈된 식이 지혜[혜(慧)]와 함께 번뇌를 멸진하는 과정인 위빳사나 수행이 그런 수행입니다. 그래서 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 즉 「탐(貪)[rāga]의 소멸 상태가 흔들리지 않는 삶의 실현」이 수행의 완성이고 삶의 완성이고 존재를 소멸하고 아라한 되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 2차 인식에 참여하는 세 가지 요소의 제어 과정


①식(識)-②수(受) → 사마타에 의한 여리작의

③상(想) → 여리작의 상태에서의 위빳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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