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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승(佛法僧)

관점 3] ‘보면서 보지 못한다.’의 의미

1 1,257 2017.10.01 11:17

관점 3] ‘보면서 보지 못한다.’의 의미


웃다까 라마뿟따는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날을 보면서 그 경계를 보지 못한다. 이것이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고 불린다.’라고 지시(指示)하여 말합니다. 하나의 상황을 지시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에 의한 완전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으로의 그 가르침은 ‘보는 것’이고, 더할 바 없고 뺄 바 없는 가르침에서 더할 바거나 뺄 바를 찾으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가르침을 총괄하여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웃다까 라마뿟따가 지시하여 말하는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날을 보면서 그 경계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2013년 봄 EBS 인문학 특강 「현대 철학자 노자(老子)」에서 최진석 교수는 


도덕경(道德經) 제1장의 


무명천지지시(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有名萬物之母)


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무(無)는 천지의 비롯됨[시(始)]을 이름함이며,

유(有)는 만물의 키움[모(母)]을 이름함 ←[부(父) - 낳음]


입니다. 무(無)는 자기의 구체적 모습은 없지만 이 세계를 가능-기능케 해주는 영역입니다. 자기 존재성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것들이 가능해지는 그런 영역입니다.


유(有)는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키는데,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영역 다시 말해 물질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有)-무(無)는 도덕경 모든 내용의 뿌리이고, 노자가 세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창입니다. 같이 나오되 이름을 달리하는 두 가지입니다[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

 

또한, 도덕경(道德經) 제2장은 유무상생(有無相生)[유(有)와 무(無)가 서로를 살게 해줌]을 말하는데,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지만 억지로 이름을 붙이자면, 이것이 바로 도(道)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무(無)의 의미를 주목해야 합니다. 


• 자기의 구체적 모습은 없지만 이 세계를 가능-기능케 해주는 영역


• 자기 존재성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것들이 가능해지는 그런 영역


최진석 교수는 이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비유를 합니다.


• 비유 1] 가위로 천을 자를 때, 잘라짐의 시작점은 어디입니까? 얼마만큼이 잘라지면 시작이라고 합니까? 그러나 그 시작의 자리는 특정지어지지 않습니다. 특정 하는 순간 이미 잘라져 있는 것이고, 그 이전은 아직 잘라짐이 시작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작점은 특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이라는 사건이 없으면 천을 자르는 행위 즉 존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 특정지어지지는 않지만 존재의 형성을 위해 없으면 안 되는 것을 무(無)라고 합니다. 


• 비유 2] 위(胃)는 비어 있는데, 만약 위가 비어있지 않다면 위가 아니라 고깃덩어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 내부의 비어있는 자리는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그저 비어있는 공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비어있음이 없으면 위라는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위(胃)가 되어 소화 작용을 하고 삶을 유지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비어있음이 물질의 안과 밖을 어떻게 차지하느냐에 따라 물질은 어떤 것으로 결정됩니다. 공간의 형태에 따라 위도 되고 창자도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의 존재성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다른 것들이 가능해지는 그런 영역을 무(無)라고 합니다.


여기서 웃다까 라마뿟따가 지시하여 말하는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날을 보면서 그 경계를 보지 못한다.’는 말의 의미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잘 벼려진 칼날의 끝은 어디입니까? 어디까지가 칼날이어서 물건을 베는 역할을 하고 어디부터는 칼날이 아니어서 베이지 않게 됩니까? 손을 대어서 베면 이미 끝을 넘어 칼날이 피부 안에 들어온 것이고, 베지 않으면 아직 칼날이 피부에 닿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노자(老子)가 말하는 무(無)의 개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설명입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웃다까 라마뿟따 또한 노자와 같이 유(有)와 무(無)로써 존재를 설명하고 유무상생(有無相生)의 도리로써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자와 웃다까 라마뿟따에게는 차이가 있습니다. 노자에게 「유(有)-무(無)는 도덕경(道德經) 모든 내용의 뿌리이고, 노자(老子)가 세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창」입니다. 그런데 유(有)-무(無)는 인도적 관점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와 공(空)입니다. 비유 2]의 경우에서 무(無)가 곧 공(空)인 것을 알 수 있고, 물질[색(色)]은 사대(四大)와 사대소조(四大所造)이니 물질세상을 구성하는 만물로서의 유(有)는 사대(四大)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자(老子)는 물질로써 도덕경을 세우고, 물질로써 세상을 설명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즉 유물론(唯物論)이고 유물론자(唯物論者)인 것입니다. 몰론 유물론에도 마음은 있습니다. 다만, 몸에 의해서 생겨나는 2차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유물론(唯物論)[materialism] - [요약] 물질을 제1차적·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네이버 지식백과] 유물론 [materialism, 唯物論] (두산백과)


그런데 웃다까 라마뿟따는 무색계(無色界)의 끝인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성취하였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고 더 이상 몸[물질]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색계를 성취한 것입니다.


경(經)은 존재를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여섯 가지 요소[육계(六界)]로 설명합니다. 이때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은 노자적으로는 유무(有無)의 물질이고, 식(識)은 마음입니다.


유물론자인 노자에게 유무(有無) 즉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은 1차적 존재이고 식(識)은 물질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2차적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유(有)-무(無)는 도덕경(道德經) 모든 내용의 뿌리이고, 노자(老子)가 세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창」인 것입니다. 반면에 부처는 물질인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과 대등한 자격으로 식(識)을 제시합니다. 물질에 의한 2차적 존재가 아닌 물질과 함께 1차적 존재의 지위를 가지는 식(識) 즉 마음입니다. <사문과경(D2)> 등은 제4선을 성취해 머물 때 이 마음이 이런 몸에 의지하고 묶여 있다는 자각을 통해 무색계로 나아가는 것을 설명합니다. 욕계(慾界)와 색계(色界) 중생 수준의 집착 때문에 이 마음이 몸에 의지하고 묶여있을 뿐이지, 마음 자체는 몸과 대등한 독립적 존재로서 불교를 구성하는 모든 경전들의 뿌리입니다. 삶을 설명하는 두 가지 창의 하나이고, 오히려 몸보다 더 주도적으로 삶을 이끄는 요소입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웃다까 라마뿟따가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하였다는 것은 물질[몸]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요소로서의 마음이 몸에 묶여 있지 않은 세상을 성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웃다까 라마뿟따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어떠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해도, 무색계의 성취는 더 이상 물질[몸]에 의지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은 1차적 요소인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노자처럼 유물론자가 아니라 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마음의 더 높은 삶을 실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웃다까 라마뿟따와 노자의 차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스승은 모두 물질 영역에서의 관계성을 설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마음을 2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가운데 물질의 관계성을 설한 노자에 비해 웃다까 라마뿟따는 1차적인 마음으로의 삶 위에서 물질의 관계성을 설했다는 차이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웃다까 라마뿟따가 지시(指示)하여 말하는 ‘보면서 보지 못한다.’에 대해 참으로 저열하고 세간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합니다. 


결국은 물질의 영역[색계(色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무색계(無色界)라고 해도 존재의 삶[유(有)]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에 대한 오해[상락아정(常樂我淨)] 위에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불만족[고(苦)]의 문제를 해결하는 영역[아산(我山)]에 있을 뿐이지 존재의 실상[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바르게 알아 존재에 내재한 불만족을 해소[무아산(無我山)]하고 해탈된 삶[명(明)]으로 나아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판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 서양철학의 이원론(二元論)과도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유물론에 의해 2차적인 것으로 이해되거나, 이원론에 의해 상락아정(常樂我淨)인 것으로 이해되는 그것은 삶의 현실이 아니어서 고멸(苦滅)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몸과 대등한 1차적 요소인 마음과 그 마음마저도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인 줄 알 때 존재의 삶을 넘어선 해탈된 삶의 실현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Comments

대원행 2023.11.15 14:25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6&wr_id=117 참조 (나는 불교를 믿는다(231114) ― 제3장 가르침[부처님이 설한 법-보면서 보지 못한다-하나의 무더기에 속한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