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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업장소멸의 마무리 & 왜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은 '저 세상은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요? 1)

0 1,649 2017.12.02 17:44

[ … ] 들으셨습니다. 토요일 밤, 편안함과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함께하고 계십니다.


업장소멸(業障消滅)에 대한 주제는 두 가지 측면으로 마무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시와까 경>이 알려주듯이 괴로움은 갈수록 줄어들고 행복은 갈수록 늘어나는 삶을 위해서는 업장소멸(業障消滅)뿐만 아니라 건강에도 유의해야 하고, 환경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음관리를 위해 수행에도 삶을 할애해야 하고, 물적 또는 심적으로 불현듯 찾아오는 의외의 변수들에 대한 대비도 평상시에 갖춤으로써 불만족에 대한 대응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계-심(心)-지혜를 닦는 지금의 행위가 주도적으로 작용해 이런 조건들을 갖춤으로써 삶을 향상으로 이끕니다.


둘째, 업장소멸을 위한 실제적인 방법은 이 방법 밖에는 없다는 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명확한데도 불교신자들이 업장소멸을 위해 산과 들 그리고 도회로 아무개 도사 아무개 보살을 찾아 헤매면서 돈의 힘에 의지해 빌고 제사지내고 기도하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한국불교의 현재 상황은 참으로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전혀 실제적이지 않은 방법에 묶여서 삶과 돈을 낭비하는 것은 역시 공부하지 않아서 부처님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업장소멸을 위해서도 우선 필요한 것은 공부입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법우님!


공부해야 바르게 업장을 소멸하고 삶을 향상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업장소멸의 주제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이제는 청취자 게시판에 주신 의견에 답변드릴 순서인데요, 최민혁 님께서 ‘바른 견해 – 저 세상은 있다.’라는 제목으로 주신 의견 소개해 드립니다.


「부처님께서 저 세상이 있다고, 그렇게 윤회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군요. 잘 공부하였습니다. 왜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은 '저 세상은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요? 스님의 법문을 들으니 이 시대야말로 진정 올곧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간결하지만 구체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 주셨는데요, 왜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은 '저 세상은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번, 저희 법회에서 질문했습니다. ㅡ ‘혹시 해피스님 신자하러 오신 법우님 계시나요?’


아무도 그렇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에구~, 이렇게 인기가 없어서야!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ㅡ ‘훌륭합니다, 법우님. 해피스님 신자하러 법회에 오지 않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신자가 되기 위해서 절에 와야 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 말씀 부탁한다.’는 어떤 분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하니, ‘부처님 말씀 말고 스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ㅡ ‘불교 안에서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부처님을 기준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 배워 알고 실천함으로써 부처님 같은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에게는 부처님 말씀을 능가하는 어떤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드리는 것이 제가 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렇습니다. 재가자도 부처님보다는 스님의 생각을 원하고, 출가자도 부처님을 바르게 알기 보다는 자기 생각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현재 한국불교에 속한 많은 사람들의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부처님 가르침을 우선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보니 부처님께서 분명하게 말해주신 ‘저 세상은 있다.’라는 한 마디를 분명하게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출가자도 부처님 가르침에 기준한 삶의 본분을 분명히 해야 하고, 재가자도 출가자에게서 출가자의 말씀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듣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 스님 신자가 아니라 부처님의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잘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산업화는 과학이란 이름아래 물질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물질을 중심으로 하는 과학과 산업화는 자연스레 유물론(唯物論)적인 사고를 심게 되지요. 또한, 민주화는 민주화입니다. 그런데 짧은 기간 동안 산업화와 어우러진 우리의 민주화 과정은 민주화 세대의 보편적 사고에 유물론(唯物論)적 경향을 생겨나게 한 것 같습니다. 


마치 해방과 전쟁 이후 기독교는 신식이고 불교는 구식인 것으로 간주되던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한국불교에도 유물론 즉 윤회 없음을 말하면 신식이고, 경전 그대로 식(識)에 의한 연기적 윤회를 말하면 구식인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적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구식종교가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선도할 대안 종교인 것처럼, 이 사회에 안전과 평화를 가져다 줄 진정한 대안은 부처님이 깨달아 알려준 삶의 현실로서의 식(識)에 의한 연기적 윤회입니다. 식(識)이 행위를 동력으로 삶의 순간순간을 누적해 변화하면서 죽은 후에 몸 따라 소멸하지 않고 다음 생을 이어 살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통찰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앎, 보편적 기준이 된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안전하고 평화로울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불교신자가 ‘저 세상은 있다.’라는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바른 견해를 갖추고, 그럼으로써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십선업(十善業)을 짓는 노력을 할 때 이 사회는 비로소 안전하고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보통 말하는 불국정토(佛國淨土)는 바로 이런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저 세상은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인적 사회적 이유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부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을 배우는 공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다시 강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제에서는 불교의 식자(識者)층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회적 유명세와 그에 따른 지명도를 가진 분들이 가르침에 대한 바른 공부를 통해 바르게 부처님을 전달해야 한다는 이야깁니다. 이 분들이 바르게 공부하지 않아서 가르침과 다르게 대중들에게 말하면 대중들은 이 분들의 다른 이야기를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자기의 견해를 세우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어떤 학술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불교신자인 서울 모 대학의 유명 교수님 한분이 윤회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자 그 자리에 함께 계시던 불교전공 교수님들도 강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윤회하지 않는다는 그 교수님의 의견이 출가-재가를 막론한 불교신자들이 모인 학술회에서 바름으로 인정되어 가고 있던 것이지요. 청중석에 있던 제가 말했습니다. ㅡ ‘교수님, 저는 근본경전을 공부하는 해피스님입니다. 근본경전에서 부처님은 저 세상은 있다, 식(識)이 윤회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윤회하지 않는다는 교수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제가 경전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까 아니면 교수님의 말씀이 경전에 근거하지 않은 개인의 견해인 것입니까?’


정확한 답변을 회피하려 하였지만 저는 끝까지 그 교수님의 견해가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부처님과 무관한 개인의 견해인지 답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교수님으로부터 경전과 다른 개인의 견해일 뿐이라는 답변을 받아내었습니다. 윤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 그 교수님 개인의 견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지요. 수백의 청중들의 놀라움이 함께하였습니다.


부처님보다는 스님의 말씀을 요구하고 부처님의 신자이기 보다는 우리 스님 신자이기를 선호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에 우리 사회의 유물론적 경향이 더해지다 보니 이렇게 경전과 다른 개인의 견해가 불교학술회에서조차 비판되지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경전을 공부하는 한 사람의 비구가 수백의 청중을 삿된 견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음악 듣고 와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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