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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왜 저세상은 있다고 말하지 않을까? 2)

0 1,616 2017.12.02 17:46

[ … ] 들으셨습니다. 일요일 밤, 삶에 대한 깊은 사색이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지금은 왜 우리나라의 많은 스님들이 '저 세상은 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이러저러한 한국불교의 현실에 우리 사회의 유물론적 경향이 더해져서 생겨난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인터넷에서 본 어떤 스님의 설법 동영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어떤 법회 동영상에서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 ‘스님, 저 세상이 있습니까?’ 스님의 답변 -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지금 살기도 여유롭지 못한데 왜 죽은 다음 이야기까지 보태서 고민을 합니까? 그저 지금 잘 살면 됩니다. 그러면 저 세상이 없으면 지금 잘 사는 거로 족하고, 저 세상이 있으면 지금 잘 산 힘으로 좋은 데 가겠지!’


우레 같은 박수가 뒤따르는 멋진 답변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앞에 공부한 <확실한 가르침 경>에서 부처님은 「저 세상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저 세상은 있다.'라는 견해를 가지면, 그는 바른 견해를 가진 것이다.」라거나, 「저 세상이 실제로 있기 때문에 '저 세상은 있다.'라고 하면 그는 저 세상을 바르게 아는 아라한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적으로 말하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다고 가정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 잘 살면!’이라고 그 스님은 답변하셨지만, 이 답변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의 질문을 다시 요구합니다. 우리가 그간 공부하였지만, 저 세상이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의 잘 사는 법을 다르게 보아야 하기 때문에, 경우를 고려하지 않은 채 ‘잘 살면 돼!’라는 것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답변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저 세상이 없다면,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처벌 때문에 한 번 뿐인 삶을 망쳐버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다른 생명을 해치든 도둑질을 하든 어떠한 행위를 통해서라도 나에게 유리한 것을 얻는 것이 잘 사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저 세상이 있다면, 잘 산다는 것의 정의가 달라져야 합니다. 이 몸으로의 삶 즉 살아서도 이롭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행위가 잘 사는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저 세상이 있고 없고에 따라 ‘지금 잘 살면!’이라는 말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 불교적으로는 이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요? 당연합니다. 저 세상은 있습니다. 이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겠지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그대가 죽어서 저 세상이 있다고 확인하였습니까?’ 글쎄요. 만약 저 세상 없음을 주장하는 사람의 질문이라면, 이 질문에는 역으로 공격적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대는 죽어보셨습니까? 그래서 저 세상이 없다고 확인했기 때문에 저 세상이 없다고 아는 것입니까?’ 저 세상이 있는지 없는지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있다고 확인되지도 않지만 없다고 확인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심오한 영역에 속하는 질문이고, 종교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공부하였지만 <시하 경>은 이렇게 답합니다. ㅡ 「세존이시여, 그러나 세존께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善處]에 태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는 세존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왜 이렇게 답하셨을까요? 그 스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부처님보다는 스님의 말씀을 요구하고 부처님의 신자이기 보다는 우리 스님 신자이기를 선호하는 한국불교의 현실에 우리 사회의 유물론적 경향이 더해진 까닭이라고 말하면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 안에서 드러내놓고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용기가 없고, 그렇지만 유물론적 경향에 의해 윤회한다고 말하기도 싫은 이중적 내용을 담아서, 부처님 가르침 아닌 스님의 견해를 드러낸 답변인 거지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합니다. ㅡ ‘네, 저 세상은 있습니다. 그러니 불교신자라면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이 이어질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부처님은 보시와 오계와 수행의 세 가지 공덕행을 알려주셨습니다.’


왜 이런 답변을 해야 맞는 걸까요? 그 대화의 자리가 법회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불교신자들을 위한 공부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불교신자에게는 부처님이 가르쳐준 그대로를 알려주면 됩니다. 그러면 배워 알고 실천하는 것이 불교신자의 삶이고, 그때 그런 삶이 실현되는 것이 가르침의 위력인 것이지요. 굳이 부처님 가르침을 뒤로 하고 스님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오해의 소지를 남기는 것은 불교 안에서 출가한 비구가 하기에 적절한 설법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법회자리가 아닌, 그래서 불교신자가 주가 아닌 보통의 강연회였다면 다른 방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론은 동일해야 합니다. 비구가 초청되어 강연할 때에는 비구를 통해 부처님을 만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제에는 한 가지 더 하고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언젠가 어떤 스님을 만났을 때, 이 스님의 말씀입니다. ㅡ ‘법회에서 보시하라고 말하지를 못합니다. 보시하라고 말하면 마치 돈 가져오라는 소리로 들릴 것 같아서요.’


저는 ‘스님, 그것은 비구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출가자는 재가자를 하늘로 이끌어 주어야 하는데, 하늘로 이끄는 방법이 바로 보시와 오계입니다. 돈 가져오라는 소리로 들릴까 싶어 보시를 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재가자를 하늘로 이끌어야 하는 출가자의 역할에 대한 직무유기입니다. 스님, 사심을 담지 않으면 됩니다. 돈 좀 주기를 바라는 사심을 내가 담지 않으면, 보시의 힘으로 하늘에 태어날 것을 설법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재가자를 하늘로 이끌어 주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계싱갈라 경(D31)>은 재가제자와 출가제자의 역할 분담을 말해줍니다. ㅡ 「장자의 아들이여, 선남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 경우로 위 방향인 사문․바라문을 섬겨야 한다. 자애로운 몸의 업으로 대하고, 자애로운 말의 업으로 대하고, 자애로운 마음의 업으로 대하고, 대문을 항상 열어두고, 일용품을 공급한다. 그러면 사문․바라문은 다시 다음의 여섯 가지 경우로 선남자를 사랑으로 돌본다. 사악함으로부터 멀리하게 하고, 선(善)에 들어가게 하고, 선한 마음으로 자애롭게 돌보며,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고, 배운 것을 깨끗하게 해 주고, 천상으로 가는 길을 드러내어 준다.」


가르침을 가르침 그대로 전달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커다란 의미로는 이것이 불교가 바르게 유지되는 힘이기도 합니다. 스님들이 돈 가져오라는 소리로 들릴까 싶어 보시의 공덕행을 설법하지 않으면 재가자들은 보시하지 않게 되고, 스님들은 절을 운영하기 위해 보시의 공덕행 외에 다른 방법으로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에 어긋나는 방법이 사찰 운영을 위해 절에서 행해지게 된 대표적인 원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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