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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수행(修行)! 무엇인가요?

0 1,365 2017.12.02 17:51

편안한 주말 저녁 즐기시는 지금, 법우님들께서 함께하고 있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오늘 주제는 수행(修行)입니다.


수행(修行)! 무엇인가요? 수행도 역시 사는 이야기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는 이야기 위에서 생겨나는 괴로움을 사는 이야기 위에서 해소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는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해 봅니다. 경전은 여래의 출현 여부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삼법인(三法印) 즉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와 연기(緣起) 즉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삼법인은 존재 일반의 조건 관계를 설명하는 원리인데,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로 줄여서 말하는 것이고, 연기는 삶의 과정에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특정의 조건관계를 설명하는 원리인데, 무명(無明)으로부터 노사(老死)에 이르는 열두 지분으로 구성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견주면, 삼법인은 일반상대성이론과, 연기는 특수상대성이론과 견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존재일반의 조건관계 즉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는 존재의 실상이어서, 열반의 실현 이전에는 이것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적용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은 이 사실을 중심으로 압축되는데, 사실에 괴리(乖離)된 삶은 괴로움[고(苦)]를 만들고 사실에 부합(符合)한 삶은 고멸(苦滅) 즉 행복[락(樂)]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교리를 총괄하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의 구체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사실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사실을 모르고 사실에 괴리된 삶을 사는 것은 마치 장님과도 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행복을 향해 향상하는 삶은 배워 아는 일을 통해 사실을 이해하는 눈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부처님은 가르침을 두 단계로 설합니다. 다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다가 죽어서는 하늘에 태어나는 세간의 행복을 위한 가르침과 생사 문제의 해결 즉 윤회에서 벗어나는 불교 본연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고 삶을 향상하자는 이 주제도 단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요, 먼저 <장님 경>은 세간의 삶에서 눈을 떠야한다고 알려줍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장님과 한 개의 눈을 가진 자와 두 개의 눈을 가진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장님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얻지 못한 재산을 얻거나 이미 얻은 재산을 늘릴 그런 눈도 없고, 유익한 법과 해로운 법을 알고 비난받을 법과 비난받을 일이 없는 법을 알고 저열한 법과 수승한 법을 알고 어두운 법과 밝은 법들이 각각 상반된다는 것을 알 그런 눈도 없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장님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한 개의 눈을 가진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얻지 못한 재산을 얻거나 이미 얻은 재산을 늘릴 그런 눈은 있지만, 유익한 법과 해로운 법을 알고 내지 어두운 법과 밝은 법들이 각각 상반된다는 것을 알 그런 눈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한 개의 눈을 가진 자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누가 두 개의 눈을 가진 자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얻지 못한 재산을 얻거나 이미 얻은 재산을 늘릴 그런 눈도 있고, 유익한 법과 해로운 법을 알고 내지 어두운 법과 밝은 법들이 각각 상반된다는 것을 알 그런 눈도 있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두 개의 눈을 가진 자라 한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러한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경은 이어서 눈을 잃어버린 장님은 재물을 얻을 수도 없고, 덕을 쌓을 수도 없으며 두 곳 즉 금생과 내생 모두에서 불행하다고 합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함께 써서 재물을 쫒는 교활한 자는 한 개의 눈을 가진 자라고 하는데, 이번 삶이 다하면 지옥으로 가서 고통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두 개의 눈을 가진 수승한 사람은 바른 방법으로 재물을 얻고 열심히 얻은 재물을 보시함으로써 행운 가득한 곳에 태어나고, 거기에서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알려줍니다. 이렇게 눈을 뜨고 이렇게 행복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불교신자의 올바른 삶인 것입니다.


이제 생사 문제의 해결 즉 윤회에서 벗어나는 불교 본연의 가르침에서 수행을 이해해 보겠는데요, 수행은 기본적으로 사실에 눈 뜨고, 사실에 부합한 삶을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주도하여 삶의 향상을 이끄는 눈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눈 뜨고 무엇이 사실에 부합한 삶을 실현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마음입니다. 마음이 사실에 눈을 뜨고, 사실에 부합한 삶을 실현하는 그입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로의 삶에서 보는 자인 눈은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오랜 삶의 과정을 통해 누적된 무더기입니다. 누적된 마음이 지금 삶의 주체가 되어 지금을 사는 새로운 마음을 낳고, 새로운 마음은 삶의 과정을 통해 가공된 후 다시 누적된 마음에 더해져 누적의 상태를 바꿉니다. 그래서 마음도 무아(無我)인 것이지요.


이런 누적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즉 사람의 마음은 욕계(慾界) 중생의 마음입니다. 오랜 누적의 결과로 생겨난 현재 상태가 몸 밖의 물질적인 것들 즉 보이는 거-들리는 거-냄새 맡아지는 거-맛보아 지는 거-느껴지는 거에 대해 ‘내 거!’하려는 사유 즉 소유(所有)를 동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에게 사실에 눈뜸으로써 사실에 괴리된 삶을 버리고, 사실에 부합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하면 마음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마음의 이런 현실 때문에 눈을 뜨고, 사실에 부합한 삶을 실현하는 과정 즉 수행은 마음에게 직접 맡겨놓으면 진행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마음을 도와서 이런 일을 하도록 이끌어 줘야 한다는 것인데, 경전은 이런 역할을 하는 어떤 것들을 기능[근(根)]이라고 부릅니다.


한편, 생사 문제를 해결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가르침에서 부처님은 알고 보는 자에게 번뇌의 부숨을 설한다는 말씀 등으로 앎과 봄을 강조하는데, 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뜨면 보게 됩니다. 그러면 보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게 되는 앎과 봄의 이야기, 음악 듣고 와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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