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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 이야기

월암 스님의 ‘선(禪)과 수행’ 강의 참석 소회② ― 본래부처의 문제 - 心, 생겨나는 것(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20805…

월암 스님의 ()과 수행강의 참석 소회② ― 본래부처의 문제 - , 생겨나는 것(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20805)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zANpCrlu6qM

 

[1] 종지(宗支)의 측면

 

선종(禪宗)의 종지(宗旨)직지인심(直指人心)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성불(見性成佛)인데, ()은 즉심시불(卽心是佛)로 연결됩니다.

 

1. 이때, 본자청정(本自淸淨) 또는 본자구족(本自具足) 즉 본래 부처(本覺)[고장이 나서] 중생(不覺)이 되었지만 [수리를 해서] 본래 부처를 드러내는 것(本覺으로의 되돌림)으로 선수행(禪修行)은 설명됩니다. 심성부정(心性不淨)과 심성본정(心性本淨) 또는 불성본유(佛性本有)와 불성시유(佛性始有) 등에 의해 없는 것을 만드는 것보다는 있는 것을 찾는 게 쉽다는 논리적 접근에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성취로 연결됩니다.

 

이런 이론은 매우 활발발한 삶을 이끌 수 있지만, 불교 안에서는 사실의 측면에서 검토되어야 합니다. ()은 빛나는 것이고, 오염된 상태로의 중생과 오염에서 벗어나 해탈한 아라한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초기불교와 연결되는 측면도 발견할 수 있지만, 아라한은 중생의 삶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의 관점에서는 부처가 중생이 되는 현상은 사실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혜능 스님으로부터 비롯된 선수행은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삼매수행과 출발을 달리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2. 본자청정(本自淸淨) 또는 본자구족(本自具足) 즉 스스로 완전한 상태는 무아(無我)에 어긋납니다. 즉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성질을 가지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고, 어떤 이론을 제시하더라도 이것이 무아에 들어맞는 존재 상태를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에 대해 본질인 것으로 설명하지만 부처님은 심()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심행(心行)=()-()]. ()조차도 무상(無常)-무아(無我)인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본자청정(本自淸淨) 또는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는 설명을 심()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2]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삼매수행은 상세하고 구체적이며 친절함

 

선수행이 화두와 관련한 수행과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데 비해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 팔정도-삼매수행은 친절하게 상세하고 구체적 설명을 포함합니다. 삶의 메커니즘과 수행지도(修行地圖)

 

삶의 메커니즘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4&wr_id=1

 

takka(딱까)를 중심에 둔 수행지도(修行地圖)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4&wr_id=27

 

[3] 기타

 

1. [삼매=일념(一念)] 일념(一念)은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일념생사(一念生死)의 경우는 일념 즉 한 생각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이 그대로 생()과 사()라는 측면과 집중-몰입에 의한 삼매의 측면입니다.

 

일념생사(一念生死)(SN 12.2-분석 경)의 정의하는 생사(生死)에 들어맞지 않다는 점은 주목해야 합니다. 선수행의 목적이 일념생사로부터의 해탈이라는 점에서 선수행의 완성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재현하지 못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wr_id=2

 

2. [사띠=반조(反照)] 일반적으로 초기 경전의 번역에서 염()sati의 번역어인데[정념(正念)=sammāsati], 선수행에서 일념(一念)이 삼매라면 사띠는 어떻게 번역하는지도 중요합니다. 이때, 반조(反照)[되돌려 비춤]에 대해 외입처에 끌려가지 않고 내입처를 보면서 단속하는 것으로의 사띠라는 설명은 중요합니다.

 

3. 십팔계(十八界)를 근()-()-()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함(阿含)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니까야는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의 십팔계를 말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십팔계는 삶을 설명하는 중요한 관점이어서 여기에서의 오해는 불교 공부의 전반에 걸친 오해를 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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