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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業)과 업장소멸(業障消滅)

Ⅴ. 십악업(十惡業)을 십선업(十善業)으로 바꾸는 방법

0 1,712 2017.10.01 18:02

. 십악업(十惡業)을 십선업(十善業)으로 바꾸는 방법

 

<업의 근원 경(A10:174)[kammanidānasuttaṃ]>은 십악업이 탐진치를 원인으로 한다고 정의해 줍니다. 탐진치는 업의 생산의 근원이고, 탐진치의 파괴는 업의 파괴의 근원이라고 알려줍니다.

 

lobho kammanidānasambhavo,doso kammanidānasambhavo, moho kammanidānasambhavo. lobhakkhayā kammanidānasaṅkhayo, dosakkhayā kammanidānasaṅkhayo, mohakkhayā kammanidānasaṅkhayo.

 

그러므로 십악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탐진치의 파괴입니다. 그런데 원인인 탐진치의 파괴는 [공부 2.]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탐진치가 파괴되지 않은 상태에서 탐진치의 영역을 밖 즉 신구의 삼업의 영역에서 십악업을 십선업으로 바꾸는 방법을 주제로 해야 합니다.

 

경은 십업의 구조에 대응해서 십악업을 십선업으로 바꾸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몸과 말의 행위 즉 계행은 계를 지킴으로써 바꾸는데, 재가자에게는 오계(五戒)를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의업 중 간탐은 보시(布施)로써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에를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 중 분노하는 마음은 자(), 폭력적 의도는 비()로써 제어할 수 있으며, 사견은 부처님 가르침을 배움으로써 정견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신업

(身業)

계행

(戒行)

살생

()

[오계(五戒)]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불살생

인간 &

욕계

육천

투도

불투도

사음

불사음

구업

(口業)

망어

불망어

양설

불양설

악구

불악구

기어

불기어

의업

(意業)

사유

(思惟)

간탐

보시(布施)

불간탐

진에

분노

()

부진에

색계-

무색계

폭력

()

견해

(見解)

사견

배움

정견

해탈


여기서 오계와 계행을 대응하는 데에는 불망어가 망어-양설-악구-기어의 구업 네 가지를 대표한다는 이해입니다. <잘못된 행위의 보(報) 경(A8:40)[duccaritavipākasuttaṃ]>은 살생-투도-사음-망어-양설-악구-기어의 일곱 가지 신업(身業)-구업(口業)을 실천하고 닦고 많이 행하면[āsevito bhāvito bahulīkato] 지옥-축생-아귀에 태어나게 되고, 각각의 경우에 가장 빠른 보(報) 즉 살아서 겪어야 하는 것으로


• 살생(殺生) - 사람의 수명을 단축시킴

• 투도(偸盜) - 사람이 재물을 잃게 됨

• 사음(邪淫) - 적들로 하여금 원한을 맺게 함

• 망어(妄語) - 사실이 아닌 것으로 사람의 비방을 받게 됨

• 양설(兩舌) - 사람과의 우정에 금이 가게 됨

• 악구(惡口) - 사람으로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듣

               게 됨

• 기어(綺語) - 사람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됨


이라고 하는데, 여덟 번째로 


• 음주(飮酒)도 실천하고 닦고 많이 행하면[āsevito bhāvito bahulīkato] 지옥-축생-아귀에 태어나게 되고, 가장 빠른 보(報) 즉 살아서 겪어야 하는 것으로 그 사람이 미쳐버리게 됨


이라고 합니다. 음주(飮酒)를 신업(身業)-구업(口業)과 대등하게 설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계와 계행의 영역을 대등한 것으로 간주해 오계를 계행의 제어[악업 → 선업]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해 보입니다.


다시 여기서 보시(布施)와 간탐을 대응한 것은 간탐에 대한 구체적 이해 때문입니다. 간탐은 소유적 사유[kāma-욕(慾)] 중 나의 것에 대한 소유적 사유는 제외하고 남의 것에 대한 소유적 사유만을 제한적으로 말하는데, 나의 것까지 꺼내어 베푸는 보시를 실천하는 자가 남의 것에 대해 내 것이라는 소유적 사유를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의 측면에서는 사념처 수행에서 대상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머무는 가운데 mano가 잘 제어되면 간탐이 제거되고, 그 위에서 개발된 느낌[nirāmisaṃ vedanaṃ : pīti-희(喜), sukha-락(樂)]을 경험하면서 나의 것에 대한 소유적 사유마저 제거될 때 초선(初禪)에 들게 됩니다. 이때, 나의 것에 대한 소유적 사유마저 제거함으로써 모든 소유적 사유[kāma-욕(慾)]에서 벗어나는 것을 출리(出離) [nekkhamma ]라고 합니다. 소유의 삶[욕계(慾界)]에서 벗어나 존재의 삶[유(有) : 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괴로움 덩어리 작은 경(M14)>은 소유적 사유와도 함께하지 않고 불선법(不善法)과도 함께하지 않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거기서 더 고요한 다른 것을 얻지 못하면, 소유적 사유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하는데, 수행에 대한 이런 이해와 괘를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다시 자비와 진에를 대응한 것은 <라훌라를 가르친 큰 경(M62)>과 <자애 경(A6:13)>에 의해서입니다. 이 경들은 「metta[자(慈)] ↔  byāpāda, karuṇa[비(悲)] ↔ vihesā」의 대응관계를 설하는데, byāpāda는 독립적으로 쓰이면 진에이고 폭력적 의도[paduṭṭhamanasaṅkappa]을 나타내는 vihesā와 함께할 때는 분노하는 마음[Byāpannacitta]를 의미합니다. 자심(慈心) 즉 다른 생명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닦는 자가 분노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심(悲心) 즉 다른 생명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을 닦는 자가 폭력을 동원해 해치려는 의도를 일으킨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경들은 자비심(慈悲心)으로써 분노하는 마음과 폭력적 의도 즉 진에를 제어하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움과 사견을 대응한 것은 <교리문답의 큰 경(M43)>의 가르침입니다. 경은 정견(正見)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와 여리작의(如理作意)의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배워 닦아가는 가운데 수반되는 인식의 향상이 여리작의입니다. 


이렇게 십악업은 오계(五戒)-보시(布施)-자비(慈悲)-배움을 통해 십선업으로 바뀝니다. 즉 고멸을 향하는 삶으로 제어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의 제어는 mano를 도와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기능인 sati[염(念)]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sati는 mano가 몸과 함께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mano가 몸과 함께 오계(五戒)-보시(布施)-자비(慈悲)-배움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 발견하고 그런 삶의 실천을 독려할 때 십악업은 버려지고 십선업은 실천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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