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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메카니즘

삶의 메커니즘3[난디-몸의 위치-위딱까(etadahosi)-업] & 해피설법회 서울법회 마감(깨달음 법회 180323)

0 903 2018.03.31 10:37

▣ 삶의 메커니즘3[난디-몸의 위치-위딱까-업] & 해피설법회 서울법회 마감(깨달음 법회 180323)

   [동영상] https://youtu.be/svcImi9grVY


 

20115월에 시작된 해피설법회 서울법회를 마감하는 수업입니다.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의 출발이고 그 몸통이 되어온 소중한 법회였지만 무상(無常)의 원리를 거스르지 못하고 7년 만에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간의 공부 성과의 정점에 해당하는 내용을 마무리 법문으로 소개할 수 있게 되어서 고마운 법우님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을 덜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함께 공부한 힘을 토대로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가 부처님에게까지 닿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삶의 메커니즘 3번째 시간은 갈애의 형성 및 자기화 과정[takka]을 지나 업(業)[kamma]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되었습니다.


1. 몸의 위치 수정


그간 심(心)이 몸과 만나 의(意)[mano]가 되어 의업(意業)을 시작하는 자리로 ‘[의도-기대-지향] → 사유[saṅkappa]’를 지시하였지만 이번 수업을 통해 ‘애(愛)-자기화 → vitakka’의 자리로 수정하였습니다.


(AN 10.47-마할리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9_08_05&wr_id=1)은 악업(惡業)의 원인-조건으로 탐(貪)-진(嗔)-치(癡)-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와 잘못 지향된 심(心)을 말합니다. 그간에는 잘못 지향된 심(心)을 심(心)이 지향에 미칠 때까지로 이해하여 심(心)과 의(意)의 경계로 삼았었는데, 한 순간 이전의 행위가 찬다에 의해 순환되어 지금 심(心)의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여 경계의 자리를 수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딱까의 과정에서 갈애의 형성으로 자기화 되면 그 자리에서 몸과 만나 심(心)은 의(意)로 상태 변화하는 것으로 메커니즘의 중요부위가 수정되었습니다.


• 딱까 외부의 과정의 대상 = 육외입처 → nimitta[상(相)]

• 딱까 내부의 과정의 대상 = 수(受) → cittassa nimitta[심상(心相)]


2. 이렇게 몸의 위치가 정해지면 딱까의 결과로 형성된 갈애-자기화는 뇌(腦)라고 이해하는 몸과 만나 행위의 영역에 들어섭니다. 행위는 견해와 위딱까의 두 갈래로 시작되는데, 견해는 세상을 보는 시각[안경 씀]이고, 위딱까는 구체적 행위의 시작입니다.


이때, vipallāsasuttaṃ(AN 4.49-전도(轉倒)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7_05&wr_id=1)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전도(轉倒)된 상태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전도되지 않은 상태를 상(想)과 심(心)과 견해에 적용하여 설명합니다. 존재성의 측면에서 상(想)-심(心)-견해의 전개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전도(轉倒)된 상(想)에 의해 중생이 되면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라는 구체적 삶의 구분이 뒤따르는데, 상(想)과 탐(貪)과 난디에 적용되는 것을 용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위의 두 갈래는 존재성의 측면에서 세상을 보는 견해와 구체적 행위의 측면으로의 위딱까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이 두 가지는 사유에서 합쳐집니다. 견해는 직접 사유로 연결되고, 위딱까는 [의도-기대-지향]의 과정을 거친 뒤에 사유로 연결됩니다. 사유는 이렇게 견해로써 세상을 보면서 구체적으로 행위 하는 과정입니다. 


※ bījasuttaṃ (AN 10.104-씨앗 경)은 견해를 씨앗에 비유합니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보는지에 따라 삶의 질은 결정됩니다. 그래서 불교는 바른 견해, 완성된 견해를 만드는 공부[교학+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http://cafe.naver.com/happybupdang/11858

 

4. 그런데 구체적 행위 과정은 의도(意圖)[cetanā]의 전후로 구분됩니다. 의도 이후가 업(業)[kamma](*)이라고 정의되기 때문에 의도 이전인 위딱까는 업(業)에 속하지 않습니다. 몸 즉 뇌(腦)와 함께하는 행위의 과정이기는 하지만 의도 즉 주체적인 행위과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도 이전의 것인 위딱까는 무엇입니까?


(*) 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 kāyena vācāya manasā.    - nibbedhikasuttaṃ (AN 6.63)


비구들이여, 의도(意圖)가 업(業)이라고 나는 말한다. 의도한 뒤에[또는 의도를 원인으로] 신(身)과 구(口)와 의(意)로 업(業)을 짓는다. [꿰뚫음 경]


; 동기론(動機論)과 결과론(結果論)의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불교는 동기론 쪽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결과론을 전혀 배제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불교는 동기론과 결과론의 양면이 현실에 맞게 접합된 경우로서의 입장을 가진다고 해야 합니다. 특히, 율장(律藏)은 의도적이지 않게 저지른 잘못된 행위에 대해 무죄(無罪)를 말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이지 않지만 생겨난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어 가벼운 죄를 적용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경전은 많은 곳에서 [사람의 여격 + etadahosi - “ ~ ”]라는 표현을 하는데, [누구에게 “ ~ ”라는 것이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주체적 행위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 의한 현상의 발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 ~ ”라는 것은 위딱까입니다.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의(意)의 행위일 뿐 의(意)가 의도를 발하여 주체적으로 행위 하는 상황을 지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5. 이렇게 위딱까를 이해하게 되면, 이제 남은 것은 “어떤 조건에 의해 “ ~ ”라는 위딱까가 그에게 생겨나는 것일까?”의 문제입니다.


물질적 또는 몸[뇌(腦)]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뇌(腦)에서의 전기적 반응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라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또는 우연발생론자들은 우연히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설명은 다릅니다.


부처님은 몸과 함께하는 행위의 출발이면서 갈애-자기화 된 존재의 의도가 작용하기 이전의 것인 위딱까가 생겨나는 과정 즉 그 조건 관계를 설명합니다. 몸과 함께하는 영역의 현상에 대해 그 이전 즉 몸과 함께하지 않는 영역의 설명을 통해 그 조건관계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6. saṃyojanasuttaṃ (SN 1.64)[족쇄 경]은


“kiṃsu saṃyojano loko, kiṃsu tassa vicāraṇaṃ.

kissassu vippahānena, nibbānaṃ iti vuccatī”ti.


무엇이 세상의 족쇄이고, 무엇이 그것을 위한 경영입니까?

무엇의 제거에 의해 열반(涅槃)이라고 불립니까?


“nandīsaṃyojano loko, vitakkassa vicāraṇaṃ.

taṇhāya vippahānena, nibbānaṃ iti vuccatī”ti. 


난디가 세상의 족쇄이고, 난디가 위딱까를 위해 경영합니다.

갈애의 제거에 의해 열반이라고 불립니다.


라고 합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위딱까를 위해 경영하는 자가 난디라고 정의하는 것인데, 어떤 위딱까를 생겨나게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난디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난디는 무엇입니까?


7. 딱까(Takka) 즉 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은 1차 인식에서 생겨난 식(識)이 2차 인식의 과정을 통해 탐(貪)으로 몸집을 부풀려 심(心)이 되는 과정[심행(心行)=상(想)-수(受)]와 생겨난 심(心)이 탐(貪)의 작용 때문에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음을 통해 난디를 만들어 다시 몸집을 부풀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식(識)이 이렇게 두 번 몸집을 부풀려 난디 그리고 탐(貪)과 함께한 상태는 갈애[애(愛)]라고 정의됩니다[지난 수업 그림 참조]. 그리고 갈애는 사성제(四聖諦)의 고집성제(苦集聖諦)여서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takka & 업 - 그림.png



8. 부처님은 이렇게 “어떤 조건에 의해 “ ~ ”라는 위딱까가 그에게 생겨나는 것일까?”의 문제에 대해 난디를 조건으로 위딱까가 생겨난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몸과 함께하는 행위의 원인을 몸과 함께하지 않은 내면의 영역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어서 물질적 또는 몸[뇌(腦)]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들 또는 우연발생론자들의 해석을 극복하는 불교의 답변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업(業)에 대한 세 가지 잘못된 견해인 「①무인무연(無因無緣)[원인도 조건도 없음], ②원인-조건 = 신(神)의 창조, ③원인-조건 = 전생(前生)의 업(業)」의 삼종외도(三種外道)를 극복하는 불교의 입장입니다. 업(業)의 원인-조건은 있고, 이렇게 업(業) 이전의 행위의 출발인 위딱까를 일어나게 하는 난디의 선언 그리고 난디의 과정입니다. 


이때, 유물론자(唯物論者) 또는 우연론자(偶然論者)들은 무인무연(無因無緣)을 주장하는 외도(外道)에 속하는 것이고, 불교는 이런 지견(知見)을 통해 이들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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