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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메커니즘14[상(想)의 잠재 - (MN18) 꿀 과자의 경 - 상이 잠재하지 않는 삶](깨달음 법회 180704)

0 975 2018.07.06 16:07

▣ 삶의 메커니즘14[상(想)의 잠재 - (MN18) 꿀 과자의 경 - 상이 잠재하지 않는 삶](깨달음 법회 180704)

   [동영상] https://youtu.be/VgQ62mTA924

 

잠재순환고리와 관련한 용례 경전 중에서 madhupiṇḍikasuttaṃ (MN 18-꿀 과자의 경)을 공부하였습니다.


삭까 사람 단다빠니의 “사문께서는 무엇을 말하는 분이며 무엇을 가르치는 분입니까?”라는 질문에 부처님은 “도반이여,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세상에서 그 누구와도 다투면서 머물지 않음을 말하는 자입니다. 소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머무는, 의심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난 바라문에게 상(想)들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ㅡ 도반이여, 나는 이렇게 말하는 자이고  이렇게 가르치는 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부처님에게서 이런 대화를 전해들은 어떤 비구는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엇을 말하는 분이셔서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세상에서 그 누구와도 다투면서 머물지 않습니까? 대덕이시여, 어떻게 세존에게 소유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머묾이 있고, 의심이 없고 후회를 잘랐고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난 그 바라문에게 상(想)들이 잠재하지 않습니까?”라고 질문하고, 부처님은 다시 “비구여, 원인에 의해서 사람에게 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들이 일어난다. 만약 여기에 즐겨져야 함과 환영해져야 함과 묶여져야 함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탐(貪)의 잠재성향들의 끝이고, 이것이 바로 저항의 잠재성향들의 끝이고, 이것이 바로 견해의 잠재성향들의 끝이고, 이것이 바로 의심의 잠재성향들의 끝이고, 이것이 바로 자기화의 잠재성향들의 끝이고, 이것이 바로 유탐(有貪)의 잠재성향들의 끝이고,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의 잠재성향들의 끝이고, 이것이 바로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논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것들의 끝이다. 여기서 이런 악한 불선법(不善法)들이 남김없이 소멸한다.”라고 간략하게 대강을 설명합니다.


비구들은 “세존께서 이처럼 간략하게 대강을 설하시고 상세하게 의미를 분석해 주지 않은 이것의 의미를 참으로 누가 상세하게 분석해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의논하여 마하깟짜나 존자를 찾아갑니다.


마하깟짜나 존자는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 → 식(識) → 촉(觸) → 수(受) → 상(想) → 위딱까 → 희론(戱論)[papañca] → 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의 발생과정을 설명합니다. 즉 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의 원인으로 희론(戱論)[papañca]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업에서는 삶의 메커니즘에 의해서 이 과정을 설명하였습니다. 먼저 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를 설명하였는데, papañca는 사유에서의 확산이라고 이해하였고, papañcasaññā는 papañca라는 행위에 의해 잠재한 경향 그리고 papañcasaññāsaṅkhā는 papañcasaññā의 참여에 의한 2차 인식으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때, saṅkhā는 헤아림입니다. 그리고 saññā-saṅkhā는 ‘상(想)-헤아림’이어서 2차 인식에서의 분별이라는 이해는 타당합니다. 또한, saṅkhata는 과거분사를 만드는 어미 ta가 함께한 형태를 보여주는데, 유위(有爲)입니다. 그렇다면 ‘saṅkhā된 것’ 즉 ‘헤아려진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2차 인식에서 병든 상(想) 즉 번뇌의 참여에 의해 결과 되는 무명(無明)과 탐(貪)-진(嗔)의 결과 상태입니다. 그리고 번뇌의 부숨에 의해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남에 의해 탐(貪)과 진(嗔)을 떠난 무탐(無貪)-무진(無嗔)의 상태는 무위(無爲)인데 asaṅkhata입니다. saṅkhata와 asaṅkhata의 이런 이해에 의하면, saṅkhā를 2차 인식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papañca는 의도-기대-지향의 과정에 이어지는 사유의 확산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의업(意業)의 일부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업(意業)의 오염에 의해 잠재한 상(想)은 papañcasaññā[희론(戱論)의 상(想)]입니다.


그런데 경은 이 papañca가 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의 원인이라고 하는데, 순환 구조의 메커니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SN 22.47-관찰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3_01&wr_id=14)은 아(我)와 연결된 오온(五蘊)의 관찰 즉 자기화된 삶에는 '나는 있다!'가 사라지지 않는데, 그때 눈의 감각기능, 귀의 감각기능, 코의 감각기능, 혀의 감각기능, 몸의 감각기능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능들의 참여가 있고, 의(意)가 있고, 법(法)들이 있고, 무명(無明)의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인식작용에 내입처와 외입처 외에 무명의 요소가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명의 요소는 자기화된 삶의 영역에서 행위를 싣고 인식에 전달하는 찬다 즉 욕탐(欲貪)입니다. 한순간 이전의 행위 상태를 싣고 순환적으로 인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작은 순환 고리]. 그래서 2차 인식을 지칭하는 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의 원인을 사유의 확산을 지칭하는 papañca라고 경은 설명하는 것입니다.


한편, 이런 설명은 (SN 14.13-벽돌집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3&wr_id=1)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무명(無明)의 요소에 의해 상(想)도 견해도 위딱까도 일어난다고 직접 설명하는 것입니다. 작은 순환 고리에 대한 이해 위에서 무명(無明)의 요소에 의해 상(想)도 견해도 위딱까도 일어난다는 설명은 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의 원인으로 희론(戱論)[papañca]을 제시하는 마하깟짜나 존자의 설명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6_01&wr_id=142&sca=%EC%9C%A4%ED%9A%8C%EC%9D%98+%EC%A7%84%EC%8B%A4&page=2 [takkainput-output]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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