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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의 근본

가르침의 근본 - 긴용례6. (MN 106-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적합함 경) & (MN 152-기능수행 경)(해피스님 2007…

0 725 2020.07.10 10:34

가르침의 근본 - 긴용례6. (MN 106-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적합함 경) & (MN 152-기능수행 경)(해피스님 200708)

[동영상] https://youtu.be/LAVPAB1PblU

 

1. (MN 106-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적합함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1_06&wr_id=1

 

āneñja: static; imperturbable. (adj.)를 ‘흔들리지 않는 경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은 이 경지 위에 무소유처(無所有處)와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경지는 식무변처(識無邊處)까지를 포함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āneñja는 사문과경(沙門果經)에서도 나타납니다. 제사선(第四禪) 이후의 여덟 가지 앎을 설명할 때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그가 이와 같이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라고 나타나는데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제4선부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āneñja(흔들리지 않는 경지)는 제사선(第四禪)-공무변처(空無邊處)-식무변처(識無邊處)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들리지 않음은 평정[사(思)-upekkhā]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MN 137-육처(六處) 분석 경)(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4_07&wr_id=1)에 의하면, 평정은 다양함의 평정[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에 연결된 평정]과 공무변처의 평정-식무변처의 평정-무소유처의 평정-비상비비상처의 평정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평정은 제삼선(第三禪)부터 나타나지만 락(樂)과 함께한 평정[사념락주(捨念樂住)]이어서 제사선부터를 순수한 평정의 상태로 간주합니다[사념청정(捨念淸淨)]. 


그렇다면 흔들리지 않는 경지는 평정인데, 제사선~식무변처는 평정인 흔들리지 않는 경지라고 나타내고,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는 흔들리지 않는 경지 위에서 어떤 다른 특성으로 차별하여 나타낸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은 무소유처를 ①흔들리지 않는 경지의 상(想)까지가 모두 남김 없이 소멸하는 곳이고, ②‘이것은 아(我)거나 아(我)에 속하는 것에 의해 공(空)하다.’라는 측면과 ③‘나는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누구에게도 나의 것은 없다.’라는 측면으로 설명하고, 비상비비상처는 무소유처의 상(想)까지가 모두 소멸하는 곳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은 다시 ‘있지 않고 나의 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없을 것이고 나의 것도 없을 것이다. 있는 것, 누적된 것을 나는 버린다.’라는 실천으로 평정을 얻은 비구에 대해 ①그 평정을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물면, 식(識)이 그것을 의지하고 집착하여, [탐(貪)-진(嗔)-치(癡)의 불이] 완전히 꺼지지 못하고, ②그 평정을 기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으면, 식(識)이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아서 완전히 꺼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 집착하는 비구는 비상비비상처에 집착하는데, 이것이 맨 앞에 있는 집착입니다.


경은 이어서 성스러운 해탈(ariya vimokkha)을 설명하는데, 비상비비상처의 상(想)이 남아있는 때까지가 중생으로의 유신(有身)이어서 집착하지 않음에 의한 심(心)의 해탈(解脫)(anupādā cittassa vimokkho)로의 불사(不死)의 실현입니다.


2. (MN 152-기능수행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5_10&wr_id=1

 

기능수행(indriyabhāvanā)은 인식 과정에서 괴로움은 줄어들고 행복은 늘어나게 하는 수행입니다. 빠라시위야 바라문은 안(眼)으로 색(色)을 보지 않고 이(耳)로 성(聲)을 듣지 않는 방법으로 기능수행을 가르치는데, 그렇다면 안(眼)으로 색(色)을 보지 않는 장님은 기능을 닦은 자이고, 이(耳)로 성(聲)을 듣지 않는 귀머거리는 기능을 닦은 자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성자의 율(律)에서의 기능수행을 설명하는데, 위없는 것입니다. ㅡ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ㅡ '나에게 이런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겼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겼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緣起)된 것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이것은 뛰어나니 즉 평정[사(捨)]이다.'라고. 그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여섯에 반복)」


이때, 유학(有學)은 이렇게 실천합니다. ㅡ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그는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생겨난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 때문에 걱정하고 부끄러워하고 싫어한다.(여섯에 반복)」


그리고 기능을 닦은 성자 즉 무학(無學)인 아라한은 이렇게 머뭅니다. ㅡ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기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생긴다. 만약 그가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에 대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지 않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하지 않음과 혐오함에 대해 혐오하는 상(想)으로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혐오하는 상(想)으로 거기에 머문다. 만약 ‘혐오함과 혐오하지 않음의 들 모두를 버린 뒤에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머물러야겠다.’라고 원하면, 평정과 사띠와 삼빠자나를 가지고 거기에 머문다.」


말하자면, 기능을 닦은 자 즉 인식 과정에서 괴로움은 완전히 소멸하고 행복이 완성된 무학인 아라한은 인식 과정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상(想)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2차 인식에서 공동 주관으로 참여하는 상(想)의 선택 능력


그런데 이 능력은 (DN 28.16-믿음을 고양하는 경, 신통(神通)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법문)(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3_05&wr_id=20)에서 그 비중이 설명됩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다양한 측면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데, 그 중 세 가지 즉 ①일곱 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 ② 처(處)의 개념에 대한 법[육내입처(六內入處)-육외입처(六外入處)], ③신통(神通)을 구성하는 것들에 대한 법을 설한 것입니다.


이때, 신통은 성스럽지 않은 신통[번뇌들과 함께하고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들과 함께한 신통]과 성스러운 신통[번뇌들과 함께하지 않고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들과 함께하지 않는 신통]으로 구분되는데, 성스럽지 않은 것은 신족통(神足通)이고, 성스러운 것은 바로 이 경이 제시하는 상(想)의 선택 능력을 확보한 기능을 닦은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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