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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식(四食)

사식3)몰리야팍구나 경(S12:12)]

0 757 2017.08.18 22:47

▣ 합송경 - 4-20)[사식3)몰리야팍구나 경(S12:12)](부산 합송경 법회 170530) ㅡ 식(識)의 윤회 & 두 가지 존재

   [동영상] https://youtu.be/L-lOB-P4KLI


갈애를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①누적된 것인 중생의 상태를 유지시켜주거나 ②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는 에너지로  작용하는 삶의 메커니즘 상의 네 군데를 말하는 네 가지 자량[사식(四食)]을 설하는 부처님에게 몰리야팍구나 존자는 '누구?'를 전제하여 질문합니다. ㅡ 누가 먹습니까?, 누가 촉(觸)합니까?, 누가 수(受)합니까?, 누가 애(愛)합니까?, 누가 취(取)합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누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의 조건지어짐[십이연기(十二緣起)]로써 답을 합니다. 자아가 있어서 삶의 주체가 되어 먹고~취(取)하는 것[아(我)]이 아니라 조건들의 연결 관계에 의해 삶이 진행된다는 것[무아(無我)]입니다.


또한, 첫 번째 질문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교리적 설명을 들려줍니다.

evaṃ vutte, āyasmā moḷiyaphagguno bhagavantaṃ etadavoca “ko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aṃ āhāretī”ti? “no kallo pañho”ti bhagavā avoca “‘āhāretī’ti ahaṃ na vadāmi. ‘āhāretī’ti cāhaṃ vadeyyaṃ, tatrassa kallo pañho ‘ko nu kho, bhante, āhāretī’ti? evaṃ cāhaṃ na vadāmi. evaṃ maṃ avadantaṃ yo evaṃ puccheyya ‘kissa nu kho, bhante, viññāṇāhāro’ti, esa kallo pañho. tatra kallaṃ veyyākaraṇaṃ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ti.

 

이렇게 말씀하시자 몰리야팍구나 존자가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식식(識食)을 먹습니까?"

 

"그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먹는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내가 '먹는다.'라고 한다면, 거기서 '대덕이시여, 그러면 누가 먹습니까?'라는 질문은 적절하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에 '대덕이시여, 그러면 무엇이 식식(識食)입니까?'라는 묻는 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거기서 식식(識食)은 미래에 다시 존재[bhava - ()]가 되어 태어남의 조건이다. 그 존재[bhūta 누적된 것 ()+명색(名色)]이 있을 때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이 있다.’라는 설명이 타당하다. 

먼저, 식식(識食)이 '유(有)→생(生)→노사(老死)' 즉 윤회의 조건이 된다는 점입니다. 행위의 오염에서 비롯되는 식(識)의 머묾과 쌓임에 의해 식(識)의 누적 상태가 달라지면 이에 상응하여 참여하는 명색(名色)의 달라진 상태와 함께하여 달라진 상태의 식(識)과 명색(名色)이 되는데, 이것이 유(有)[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조건으로 생(生)과 노사(老死)가 있어서 윤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有)는 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순환적으로 식(識)+명색(名色)으로의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때, 식(識)+명색(名色)의 상태를 bhūta[누적된 것]이라고 하는데, 갈애가 전제된 삶의 과정 즉 십지연기(十支緣起)의 출발이 되는 존재입니다. 또한, 갈애의 형성과정을 포함한 삶의 과정 즉 십이연기(十二緣起)의 3~4번 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은

1) ‘식식(識食)은 미래에 다시 존재[bhava - ()]가 되어 태어남의 조건이다.

2) 그 존재[bhūta 누적된 것 ()+명색(名色)]이 있을 때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을 조건으로 촉()이 있다.’

라고 하여 bhava와 bhūta를 연장선상에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 식(識)의 윤회 & 두 가지 존재.


bhūta에 대한 이런 이해는 중요합니다. 경이 말하는육입(六入)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의 bhūta는 누적된 삶 즉 [식(識)+명색(名色)]이라는 이런 이해가 아니고는 설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법회에서는 누적된 삶인 [식(識)+명색(名色)]의 지금 삶에서의 배분으로의 육입(六入)을 설명하였는데, 이 경이 그런 설명에 타당성을 부여한다고 하겠습니다. ☞ http://cafe.naver.com/happydhamma/782 참조.


한편, 몰리야팍구나 경(S12:12)은 고집(苦集)의 측면에서는 bhūta[식(識)+명색(名色)]로부터 시작하여 노사(老死)에 이르는 십지연기적 설명을 제시합니다. 반면에 고멸(苦滅)의 측면에서는 육촉처(六觸處)의 완전히 빛바랜 소멸 위에서 진행되는 촉멸(觸滅)~노사멸(老死滅)의 7지적 연멸(緣滅)을 설하는데, 육촉처(六觸處)에 대한 공부는 다음 수업에서 하기로 하였습니다.

 

[참고] 이 내용을 질문2. 번뇌의 부숨 즉 상()의 치유에 의한 해탈이라면 윤회의 주체인 식()은 해탈의 원인이 아닙니까?’의 답변이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05&wr_i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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