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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식(四食)

사식5)아들의 고기 경 - 네 가지 비유

0 1,013 2017.08.18 23:28

▣ 합송경 4-22[사식5)아들의 고기 경 - 네 가지 비유](부산 합송경 법회 170620)

   [동영상] ☞ https://youtu.be/lT4inzclYRg


아들의 고기 경은 네 가지 비유를 통해 자량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그래서 제어되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알려줍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중생을 유지시켜주는 에너지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자료로 정리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아들의 고기 경>은 사식(四食)의 의미를 개별적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단식(段食)[덩어리진 음식] - 부모가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아들의 고기를 먹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을 비유함으로써 수행자는 덩어리진 음식에 대해


① 거친 덩어리 진 음식 : 몸을 유지하여 해탈-열반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최소한의 음식만을 취해야 합니다.


② 미세한 덩어리진 음식 : 이 음식은 거친 덩어리진 음식보다 더 중요한 음식입니다. 육내입처(六內入處)가 “다섯 가닥의 소유적 사유의 대상” 즉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세상]을 감각하여 인식할 때 삶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만큼만 감각하여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마음이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냄새 맡아지는 대로 부딪혀 오는 대상을 제어 없이 쫓아다닌다면 삶의 향상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보릿단 경( http://cafe.naver.com/happybupdang/11702)>은 감각의 주관과 객관 즉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를 타작할 보릿단과 6명의 도리깨꾼에 비유합니다. 이때 내입처와 외입처 중 누가 보릿단이고 누가 도리깨꾼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6명의 도리깨꾼이 감각주관인 내입처이고 도리깨질을 당하는 보릿단이 감각객관인 외입처일 것 같지만 경은 보릿단이 내입처이고 도리깨꾼이 외입처라고 알려줍니다. 자율적이고 능동적으로 주도적인 삶을 전개하지 못하고 세상에 의해 타율적이고 수동적으로 지배당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향을 최소화하여 주도적 삶을 영위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단식(段食)을 아들의 고기에 비유하여 삶의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만큼만 섭취할 것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한편, <보릿단 경>에는 7번째의 도리깨꾼이 등장하는데 욕탐(欲貪)입니다. 삶의 반복-순환 구조에서 한 순간 이전의 이어지는 과거 또한 세상[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과 마찬가지로 내입처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삶을 방해한다는 것인데, 번뇌의 영향을 받아 생기는 무명(無明)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번뇌→무명(無明)→탐(貪)→욕탐(欲貪)]. 불교의 대의는 욕탐의 제어로 제시되기도 하는데, 번뇌와 무명과 탐의 제어의 연장선상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일곱 도리깨꾼의 매질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를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흡수행에서 욕탐의 제어와 활용을 통해 오직 호흡에만 집중하는 것은 다른 대상에 의한 타격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도적으로 선택한 대상 위에서 욕탐[번뇌-무명(無明)-탐(貪)]의 제어가 순차적으로 심화되는 것입니다.


; 단식(段食)을 완전히 알 때 → 다섯 가닥의 소유적 사유의 대상에 대한 탐(貪)이 완전히 알아짐 → 성스러운 제자가 그 족쇄에 묶여서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그런 족쇄가 없어짐.


; kamāgunā에 대한 탐(貪) - 1차 인식 때 간섭하는 욕탐(chandarāga)의 탐(貪)으로 욕탐(慾貪)-색탐(色貪)-무색탐(無色貪) 모두를 포괄함. 그러나 육외입처 모두에 대한 욕탐(欲貪)이 아니고 법(法)을 제외한 kamāgunā만에 대한 욕탐(欲貪)이기 때문에 이것이 완전히 알려진다 해도 아라한에 이르지는 못함. 오직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오는 족쇄가 없음’ 즉 불환자(不還者)의 성취에 해당하는 것임.


2) 촉식(觸食) –껍질 벗겨진 소가 맞닿는 고통의 상태로써 비유함.


껍질 벗겨진 소는 욕탐(欲貪)의 간섭을 받은 내입처를, 뜯어먹는 생물들은 외입처를 비유하였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1차 인식에 이어지는 육촉처(六觸處) 위에서는 무명촉(無明觸)이 진행되고, 무명촉에 의한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수(受)는 어느 것이든 중생의 영역에 속하므로 고(苦)[오취온고(五取蘊苦)]입니다.


껍질이 있는 소는 벽 등에 맞닿아도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면 껍질을 환원하여 껍질이 벗겨지기 이전의 상태[명촉(明觸)]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욕탐(欲貪)[번뇌-무명(無明)-탐(貪)]에 의한 무명촉을 버리고 명촉이 생겨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사마타의 수행을 통해 갈애 즉 오염된 심(心)을 염오(厭惡)-이탐(離貪)하여 청정한 심(心)으로 환원하고[심해탈(心解脫)], 위빳사나의 수행을 통해 소멸(消滅)하여 청정한 심(心)의 상태를 유지하듯이[혜해탈(慧解脫)] 촉식(觸食)을 완전히 알 때 무명과 함께하는 느낌이 소멸되고 명(明)과 함께하는 느낌 즉 열반락(涅槃樂)-해탈락(解脫樂)을 경험한다는 것인데, 아라한입니다[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 


; 촉식(觸食)을 완전히 알 때 → 세 가지 느낌을 완전히 알게 됨 → 성스러운 제자가 더 이상 해야 할 바가 없게 됨[아라한]


3) 의사식(意思識) – 자기의 의도-기대-지향과는 관계없이 숯불구덩이에 강제로 빠짐을 당하는 비유.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바라지 않으며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혐오하는 사람이 힘센 두 남자에 의해 각각 양 손이 붙잡힌 채로 숯불 구덩이 가까이로 끌려온다면 그 사람은 자기의 의도-기대-지향과는 거리가 먼 다른 조건[힘센 두 남자] 때문에 숯불 구덩이에 빠질 것이고 그 때문에 죽게 되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때, 다른 조건인 힘센 두 남자는 갈애입니다. 갈애 때문에 스스로의 의도-기대-지향과는 무관하게 의사식(意思食) 즉 갈애를 원인으로 하는 의사(意思)[의(意)의 행위-숯불구덩이 가까이로 끌려옴]으로 연결되어 행위 하게 되는 것입니다[숯불구덩이에 빠짐].


※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마는 경우는 삶의 과정에서 많이 경험됩니다. 나는 그런 의도-기대-지향을 하지 않는데, 갈애의 힘에 강제되어 그런 행위를 함으로써 괴로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심(心)-의(意)-식(識)]은 그러고자 하지 않는데 오염된 상(想) 즉 번뇌의 힘에 제압되어 탐진치(貪嗔癡)를 내재한 심(心)을 만들고, 심(心)은 다시 nandi를 만들어 갈애가 되어서는 번뇌의 힘이 더욱 거세진 갈애의 힘으로 나를 이끄는 것입니다[집착]. 갈애에 강제당해서 나는 괴로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적인 상담과 치유의 기본이 될 내용입니다. 


; 의사식(意思食)을 완전히 알 때 → 세 가지 갈애를 완전히 알게 됨 → 성스러운 제자가 더 이상 해야 할 바가 없게 됨[아라한]


4) 식식(識食) - 삼백 자루의 창에 반복적으로 찔려서 그 때문에 괴로움[고(苦)]와 고뇌[우(憂)]를 겪는 비유


죄지은 도둑은 집착[취(取)-오염된 행위]이고 창에 찔리는 것은 식(識)의 머묾과 명색(名色)의 참여입니다. 그러면 오취온(五取蘊)인 존재가 되어 괴로움을 겪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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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bhūta]

; () - 명색(名色)

오취온고(五取蘊苦)

 

단 한 개의 창에라도 찔리면 그것은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런데 삼백 자루의 창에 반복적으로 찔린다면 그 고통은 참으로 클 것입니다. 그런데 삶은 매 순간 갈애 때문에 식(識)을 머물게 합니다. 머문 식은 식온(識蘊)에 더해서 쌓임으로써 식온(識蘊)을 바꿉니다. 그러면 상응하는 명색(名色)의 참여로 오온(五蘊)은 매 순간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행되는 식(識)의 변화는 괴로움입니다. 매 순간 오취온고(五取蘊苦)를 겪는 새로운 오온(五蘊)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탐(貪) 있음 경(S12:64)>은 「식(識)이 머물지 않고 증대하지 않는 곳에 명색(名色)이 참여하지 않는다. 명색(名色)이 참여하지 않는 곳에 행(行)이 증장하지 않는다. 행(行)이 증장하지 않는 곳에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다.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어 태어남이 없는 곳에 미래의 생(生)과 노사(老死)가 없다. 미래의 생(生)과 노사(老死)가 없는 곳에 슬픔과 고뇌와 절망이 없다.」라고 합니다. 


식(識)의 머묾이 멈추고 유위(有爲)에서 형성하는 것으로의 행(行)[행위(行爲)]의 증장이 없으면 중생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해탈이고 열반의 실현입니다. 이전 삶의 결과의 누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지금 멈추기만 하면 해탈하여 열반을 실현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제시하는 삶의 모습이고, 삶의 완성에 대한 구체적 입장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쌓여져 있는 것을 부수는 수행이 아니라 커져가는 진행을 멈추는 수행입니다. 번뇌를 부숨이라고 표현되는 병든 상(想)의 치유를 통해서 실현되는 경지입니다.


; 식식(識食)을 완전히 알 때 → 명색(名色)을 완전히 알게 됨 → 성스러운 제자가 더 이상 해야 할 바가 없게 됨[아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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