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추구하는 자[sambhavesī]
sambhavesī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one who is seeking birth. (m.) 즉 태어남을 추구하는 자의 의미를 가지는 남성명사인데, sambhava[origin; birth; production; semen virile. (m.)]과 esī[ seeker. (m.)]의 복합어입니다.
[Ⅰ] 이 단어는 주로 사식(四食)[네 가지 자량(資糧)]을 정의하는 용도로 나타납니다.
비구들이여, 누적된 것인 중생을 유지하거나 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기 위한 네 가지 자량(資糧)[사식(四食)]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자량(資糧)[단식(段食)], 촉(觸)이 두 번째이고[촉식(觸食)], 의사(意思)가 세 번째이고[의사식(意思食)], 식(識)이 네 번째이다[식식(識食)].
이 용례는
sammādiṭṭhisuttaṃ (MN 9-정견 경)
mahātaṇhāsaṅkhayasuttaṃ (MN 38-갈애 멸진의 큰 경)
āhārasuttaṃ (SN 12.11-자량(資糧) 경)
moḷiyaphaggunasuttaṃ (SN 12.12-몰리야팍구나 경)
puttamaṃsūpamasuttaṃ (SN 12.63-아들의 고기 경)
atthirāgasuttaṃ (SN 12.64-탐(貪) 있음 경)
에 나타납니다.
[참고] “ime, bhikkhave, cattāro āhārā kiṃnidānā kiṃsamudayā kiṃjātikā kiṃpabhavā? ime cattāro āhārā taṇhānidānā taṇhāsamudayā taṇhājātikā taṇhāpabhavā. āhārasuttaṃ (SN 12.11-자량(資糧) 경)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자량(資糧)은 무엇을 인연으로 하고,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며,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을 기원으로 하는가? 이러한 네 가지 자량(資糧)은 갈애[애(愛)]를 인연으로 하고, 갈애로부터 일어나며, 갈애에서 생기고, 갈애를 기원으로 한다.
그런데 이 문장은 교리적 비중이 매우 큽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여러 번역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비구들이여,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유지하게 하고 생겨나려는 중생들을 도와주는 네 가지 음식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 [첫 번째요], 감각접촉[觸]이 두 번째요, 마음의 의도가 세 번째요, 알음알이가 네 번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의 자양, 둘째, 접촉의 자양, 셋째, 의도의 자양, 넷째, 의식의 자양이다.
[P.T.S.]
[Thanissaro Bhikkhu]
[Bhikkhu Bodhi]
[Ⅱ] sambhavesī의 또 하나의 용례는 자애 경입니다. 이 경은 khuddakapāṭhapāḷi, 9. mettasuttaṃ (KN 1.9)[소송경(小誦經)]과 suttanipātapāḷi, 1. uragavaggo, 8. mettasuttaṃ (KN 5.8)[숫따니빠따]에 두 번 나타나는데, 테라와다 불교신자들의 신행에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경은 열 개의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섯 번째 게송에서 이 단어가 나타납니다.
diṭṭhā vā ye va adiṭṭhā, ye va dūre vasanti avidūre.
bhūtā va sambhavesī va, sabbasattā bhavantu sukhitattā.
보이는 것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 먼 곳에 사는 것이거나 가까이에 사는 것이거나,
‘누적되거나 존재를 추구하는 자’인(200716)'단지 누적된 것이고 단지 존재를 추구하는 자인' 모든 중생들이 행복한 상태가 되기를!
이 게송의 여러 번역을 비교해 보았습니다.
[한국테라와다불교 테라와다 불교의범]
볼 수 있건, 볼 수 없건, 멀리 살건, 근처 살건,
태어났건, 태어나게 될 것이건,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안락하기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이미 생겨난 것이나 생겨날 것이나, 모든 님들은 행복하여지이다.
[Alternate translations: Ñanamoli | Buddharakkhita | Piyadassi | Thanissaro]
The seen and the unseen, Those living near and far away,
Those born and to-be-born — May all beings be at ease!
[BBS 불교방송 동영상 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태어난 것이나 태어날 것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BBS 불교방송 동영상 ②]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멀리 사는 것이나 가까이 사는 것이나,
태어난 것이나 태어날 것이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행복하라.
(*) 임산부와 태아의 영상
[거해스님 편역 근본불교 예불문]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거나, 가까이 살거나, 멀리 살거나,
이미 태어났거나, 태어날 것에도, 일체 중생들 행복한 마음 갖기를 기원하라.
[일아 역편 빠알리 경전에서 선별한 예경 독송집]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깝거나 멀거나, 태어났거나 태어날 것이거나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행복하기를!
그렇다면 태어나 살아가는 존재들과 태어날 존재들로 구분되는 모든 존재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으로 이 게송은 해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태어날 존재를 어머니의 태속에 있는 태아(胎兒)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교리적으로 태아(胎兒)는 이미 태어난 존재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자칫 이 게송은 중유(中有)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를 포함한 태어난 것이 아니면서도 태어날 또는 태어남을 추구하는 것[esī: seeker. (m.)]이 있다면 그것이 중유(中有)가 아니냐고 따질 때 답변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 viggaha: dispute; quarrel; the body; resolution of words into their
elements. (m.)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죽음의 시간까지 그 사이의 것에 대해 어머니의 자궁에서 첫 번째 심(心)이 생겨나고 첫 번째 식(識)이 나타난 이것을 사람의 몸이라고 한다.
[Ⅲ] 그런데 sambhavesī의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다른 경이 있습니다. yavakalāpisuttaṃ (SN 35.201-보릿단 경)은
• hanati : 1. to strike, to thresh, 2. to kill, 3. to destroy to remove
• haññati: Passive present - is killed or destroyed
• hanati의 원망형 : [3인칭 복수 - haneyyuṃ, [3인칭 단수 - haneyya]
• suhatā - (f.) [sukha+tā] happiness 또는 su-hata
hata: killed; injured; destroyed. (pp. of hanati)
• haññamāna: killing. (pr.p. of haññati)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사거리에 보릿단이 놓여 있다 하자. 그때 여섯 사람이 도리깨를 손에 들고 와서 그 보릿단을 여섯 개의 도리깨로 때린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면 그 보릿단은 여섯 개의 도리깨로 잘 타작이 될 것이다. 그때 다시 일곱 번째 사람이 도리깨를 손에 들고 온다 하자. 그는 일곱 번째 도리깨로 보릿단을 때릴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하여 그 보릿단은 그 일곱 번째 도리깨로 때려져서 더욱 잘 타작이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색(色)들 때문에 눈에서 타격 당한다. …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미(味)들 때문에 설(舌)에서 타격 당한다. 감촉들로 …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법들 때문에 의(意)에서 타격 당한다. 비구들이여, 만일 그 배우지 못한 범부가 미래에 다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의도한다면 그 쓸모없는 인간은 더욱 타격 당하나니 마치 저 보릿단이 그 일곱 번째 도리깨로 때려져서 더욱 잘 타작이 되는 것과 같다.“
여섯 명의 도리깨 꾼이라는 육내입처(六內入處)는 육외입처(六外入處)와 함께 식(識)과 명색(名色)인 누적된 것[bhūta]의 배분입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도리깨 꾼은 무명(無明)의 요소로 1차 인식에 참여하는 욕탐(欲貪)이고, 이것은 심(心)의 행위를 싣고 와서 인식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차 인식에는 육외입처(六外入處)를 대상으로 하는 주관이 둘입니다.
메커니즘은 이 두 가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는 지난 삶의 누적으로의 ‘나’인 누적된 것[bhūta = 식(識)+명색(名色)]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삶에서의 행위자인 심(心)입니다. 그래서 ‘나’란 존재는 누적된 것으로의 중생이면서 동시에 지금을 사는 행위자인 심(心)이라고 중첩적으로 설명됩니다. 사식(四食)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아 ①누적된 것인 중생을 유지하고 ②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는 네 가지 자량(資糧)이라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애 경의 이 게송도 ‘누적된 것으로의 중생이면서 동시에 지금을 사는 행위자인 심(心)’이라는 하나의 삶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럴 때 신행(信行)의 비중이 큰 이 경이 엉뚱하게 중유(中有) 있음의 근거가 되는 오류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삶은 누적된 것으로의 중생이면서 동시에 지금을 사는 행위자인 심(心)이라는 두 주관의 동시 참여에 의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수행(修行)의 본질을 설명하는 중심 주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