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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처 상윳따(S47)

(S47-36)[무위(無爲)의 앎 - 중생의 영역을 벗어난 다른 앎]

▣ (S47-36)[무위(無爲)의 앎 - 중생의 영역을 벗어난 다른 앎](부산 수행 170314)

   [동영상]  https://youtu.be/rTjeuX_UgEw


(S47:36)[무위(無爲)의 앎 경] ☞ http://cafe.naver.com/happybupdang/13246

비구들이여, 이 사념처를 닦고 많이 행할 때 두 가지 결실 중 어떤 결실이 기대된다. 지금여기에서의 무위(無爲)의 앎이거나 연료[집착]이 남아 있으면 불환자(不還者)이다.

● 무위(無爲)의 앎[aññā]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의 중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ñāṇa[앎-지(知)]의 ñā와 añña[다른 것 - other; another; else]입니다. 


이때, 다르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였습니다.


존재하는 것 즉 법(法)은 열반과 열반 아닌 것 즉 조건적인 것[행(行)]입니다. 깨달음에 의해 실현되는 유일한 것인 열반을 제외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중생들의 영역에 속하는 조건적인 것[행(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조건적인 것[행(行)]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번뇌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탐진치(貪嗔癡)와 함께하는 유위(有爲)[saṅkhata]의 삶입니다.


중생인 우리의 삶에 속하는 모든 것들에 속하지 않는 유일한 다른 것이 있는데, 열반입니다.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이고, 그래서 무탐(無貪)-무진(無嗔)-무치(無癡)인 무위(無爲)[asaṅkhata]의 삶입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러한 삶이 완성된 삶입니다. 해탈을 통해 열반이 실현된 삶입니다. 그래서 '구경(究竟)의 앎'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단어를 '무위(無爲)의 앎'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다만, 불교의 무위는 노자의 무위와 구분되어야 합니다. asaṅkhata가 삶의 완성을 지칭하여 무위(無爲)로 번역된 것은 적절하다고 하겠지만, 노자가 제시하는 삶의 완성[무위자연(無爲自然)(?)]과 부처가 제시하는 삶의 완성[무탐(無貪)-무진(無嗔)-무치(無癡)]이 다르다는 점은 놓쳐서는 안됩니다. 번역이 가지는 한계일 것인데, 공부하는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서 원전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무위의_앎.png

Comments

대원행 2022.09.28 22:10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10_02_04&wr_id=8 참조 (법구경 강의 4. 꽃 품, 게송(57)[마라가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 - 계-정-혜 & 계-심-혜 & 무위의 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