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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팔정도(八正道)[중도(中道) → 고멸(苦滅)]

0 1,267 2018.02.24 22:36

팔정도(八正道)[중도(中道) → 고멸(苦滅)]


불교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사는 이야기 위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사는 이야기 위에서 해소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삶은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발생하는 불만족[고(苦)]와 불만족의 해소[고멸(苦滅)]을 명제(命題)로 삼고, 고(苦)의 발생의 원인-과정[고집(苦集)]을 밝혀 제거함으로써[고멸도(苦滅道)] 고멸(苦滅)을 실현하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불교(佛敎)의 유일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이때, 고집(苦集)은 원인인 애(愛) 또는 과정인 십이연기(十二緣起)이고, 고멸도(苦滅道)는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입니다. 중(中)인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과정을 중도(中道)인 팔정도로 끊어내어 고멸(苦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팔정도의 실천 과정을 수행(修行)이라고 합니다.


십이연기는 애(愛)의 형성과정인 takka를 전후하여 고(苦)의 발생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때 takka는 2차 인식에 의한 심(心)의 형성과정[심행(心行)]과 심(心)의 내적 활동에 의한 애(愛)의 형성과정으로 나뉩니다. 그래서 수행은 ①takka의 영역 밖에서 출발하여 삼매를 성취하는 과정[사념처(四念處)→삼매], ②takka의 영역에 들어서는 과정[삼매→여실지견(如實知見)], ③애(愛)의 형성과정을 제어하여 심(心)의 형성과정에 닿는 과정[염오(厭惡) → 실다운 지혜]에 이어 ④심(心)의 형성과정의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이탐(離貪) → 소멸(消滅)]로 구성됩니다. 이 과정에서 사념처(四念處)는 수행의 시작으로부터 ③[염오(厭惡) → 실다운 지혜]에까지 미칩니다. 사띠의 완성은 장애가 완전히 버려진 것을 의미하는데, 그 단계까지 힘 있어진 지혜가 실다운 지혜입니다. 그래서 실다운 지혜가 생기면 사띠토대[satiāyatana]가 갖추어졌다고 하는데, 육신통(六神通)의 조건이 됩니다. 


이때, 사성제(四聖諦)는 장애 없음 즉 사띠토대 위에서 심(心)의 형성과정을 대상으로 다시 설명됩니다. 실다운 지혜로 알아야 하는 법[고(苦)=오취온(五取蘊)], 실다운 지혜로 버려야 하는 법[고집(苦集)=무명(無明)-유애(有愛)], 실다운 지혜로 실현해야 하는 법[고멸(苦滅)=명(明)-해탈], 실다운 지혜로 닦아야 하는 법[고멸도(苦滅道)=사마타-위빳사나]입니다.


사마타-위빳사나의 수행[고멸도(苦滅道)]로 심(心)의 형성과정의 문제 즉 심(心)에 내재한 문제인 유애(有愛)와 무명(無明)[고집(苦集)]을 제거하여 오취온(五取蘊)의 삶[고(苦)]을 벗어나 명(明)과 해탈(解脫)의 해탈된 삶[고멸(苦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참고] 명(明)과 연결됨 경(A2:3:10)[Vijjābhāgiya-sutta]


• 사마타 : 심(心)을 닦음 ㅡ 유애(有愛)[유탐(有貪)]의 제거 – 이탐(離貪) → 해탈(解脫)

• 위빳사나 : 혜(慧)를 닦음 ㅡ 무명(無明)의 제거 – 소멸(消滅) → 명(明)


“dve me, bhikkhave, dhammā vijjābhāgiyā. katame dve?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은 명(明)과 연결된다. 무엇이 둘인가? 


samatho ca vipassanā ca. 사마타와 위빳사나이다.


samatho, bhikkhave, bhāvito kamattha manubhoti? cittaṃ bhāvīyati. cittaṃ bhāvitaṃ kamatthamanubhoti? yo rāgo so pahīyati.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익을 경험하는가? 심(心)이 닦아진다. 심(心)을 닦으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탐(貪)이 버려진다. 


vipassanā, bhikkhave, bhāvitā kamatthamanubhoti? paññā bhāvīyati. paññā bhāvitā kamatthamanubhoti? yā avijjā sā pahīyati.


비구들이여, 위빳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익을 경험하는가? 혜(慧)가 닦아진다. 혜를 닦으면 어떤 이익을 경험하는가? 무명(無明)이 버려진다.


rāgupakkiliṭṭhaṃ vā, bhikkhave, cittaṃ na vimuccati, avijjupakkiliṭṭhā vā paññā bhāvīyati. iti kho, bhikkhave, rāgavirāgā cetovimutti, avijjāvirāgā paññāvimuttī”ti.


탐(貪)에 오염된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고 무명(無明)에 오염된 지혜는 닦아지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탐(貪)의 빛바램[이탐(離貪)]으로부터 심해탈(心解脫)하고, 무명(無明)의 빛바램으로부터 혜해탈(慧解脫)한다.


이렇게 수행은 실다운 지혜 위에서의 사마타-위빳사나로 완성됩니다. 


그런데 실다운 지혜는 심(心)의 내적 활동의 안정[upasama-가라앉음]을 조건으로 합니다.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음은 들뜸의 장애입니다. 그래서 들뜸의 장애가 제거되면 upasama[가라앉음]의 상태가 됩니다. 이때,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음으로 upasama의 상태를 만드는 것이 염오(厭惡)입니다. 


그리고 염오하기 위해서는 사실[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 그대로의 알고 봄이 필요한데, 여실지견(如實知見)입니다.


• 여실지견(如實知見) → 염오(厭惡) → upasama[가라앉음] → 실다운 지혜 → 사마타-위빳사나 → 명(明)


한편, 여기까지는 내적인 takka의 영역입니다.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에 의해 takka의 영역에 닿은 이후 사마타-위빳사나로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의 수행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여실지견(如實知見)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도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단계적 연결을 통해 진행되는 수행의 입장에서 보면, 여실지견은 takka 외부의 과정의 안정을 필요로 합니다. takka로부터 벗어난 심(心) 또는 애(愛)의 외적 활동이 제어되어야 하는 것인데, vitakka로부터 시작되는 행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여실지견을 위한 조건은 takka 외부의 안정 즉  vitakka[심(尋)]과 vicāra[사(伺)]의 제어로 정의되는 삼매입니다.


• 유심유사(有尋有伺)의 삼매 → 무심유사(無尋有伺)의 삼매 → 무심무사(無尋無伺)의 삼매

  ⇒ vitakka & vitakka 없음[무심(無尋)]의 의미 참조 :    첨부 그림

     takka를 중심에 둔 수행지도(修行地圖) 참조 :          첨부 그림


그러나 삼매가 여실지견으로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실지견은 사실 그대로를 알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삼매의 흔들림 없음은 단지 사실의 확인을 위한 토대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삼매를 닦음 즉 삼매수행(三昧修行)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데, 삼매를 성취하는 수행과정과 삼매의 토대 위에서 깨달음을 위해 나아가는 수행과정을 포괄하는 용어입니다.


바른 삼매수행은 법들을 드러나게 합니다. 이때, 삼매 위에서 여실지견으로 연결되는 과정은 두 가지로 제시됩니다. 법을 더 분명히 드러나게 하기 위한 내적인 마음의 사마타[삼매의 심화-토대의 확고]와 드러나는 법을 대상으로 사실을 확인하는 능력[눈]을 확보하는 법의 위빳사나입니다.


특히, 법의 위빳사나는 주목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수(受)-상(想)-vitakka의 일어나고 유지되고 없어짐의 과정을 자각하는 것으로의 법의 위빳사나를 부처님의 아주 경이로운 점으로 기억하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여실지견으로 연결하여 염오-이탐-소멸 또는 upasama-실다운 지혜-바른 깨달음-열반으로 이끌어 연결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즉 삼매수행을 통해 여실지견으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법의 위빳사나가 중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경들은 염(念)-정지(正知)[sati-sampajāna]를 가르침의 근본이라고 말하는데, 염[sati]는 사념처(四念處)이고 정지(正知)[sampajāna]는 법의 위빳사나입니다.


  ※ sati-sampajāna : sati – 사념처, 

                         sampajāna – 법의 위빳사나[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그러면 법의 위빳사나를 위해서 법이 드러나는 과정은 어떻게 설명됩니까? 불방일(不放逸)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사띠를 확립하여 심(心)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매를 성취하고 삼매를 닦는 심(心)에 법이 드러나면 불방일한 머묾이라고 하고, 그러지 못하면 방일한 머묾이라고 합니다. 불방일(不放逸)한 머묾이 법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중심 개념에 의하면, 불방일 즉 사띠를 확립하여 심(心)을 장애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사념처(四念處)입니다. 그러므로 불방일한 머묾이 법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곧 사념처가 바로 법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념처(四念處)의 개념[보는 자와 염처(念處)의 관계]」에서 보았듯이, 식(識)이 수(受)의 앎을 이어 보는 것으로의 심념처가 진행되면 법이 드러나고, 그러면 심(心)이 드러나는 법들을 대상으로 이어 보는 것으로의 법념처가 의미하는 바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고멸(苦滅)의 실현을 위한 수행은 삼매(三昧) 위에서 진행됩니다. 삼매는 심일경성(心一境性) 즉 심(心)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삼매가 고멸(苦滅)의 실현으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고멸(苦滅)의 실현이라는 특별한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을 갖춘 특별한 삼매를 필요로 하는데, 바른 삼매[정정(正定)]이고 초선(初禪)-제이선(第二禪)-제삼선(第三禪)-제사선(第四禪)의 사선(四禪)으로 정의됩니다.


마찬가지로 특별한 삼매인 정정(正定)은 특별한 성취 과정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정정(正定)은 필수품을 갖춘 삼매라고 하는데, 필수품으로는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이 제시됩니다. 정정진(正精進)의 도움 위에서 사념처(四念處)인 정념(正念)이 정견(正見)~정명(正命)의 업(業)을 제어하고 삼매에 드는 것인데, 이런 필수품의 과정에 의해 성취되는 삼매가 정정(正定)입니다.


이 과정을 정리하면, 수행은


사념처(四念處)[필수품] → 바른 삼매 → 불방일한 머묾 → 법이 드러남 → [내적인 마음의 사마타-법의 위빳사나] → 여실지견(如實知見) → 염오(厭惡) → [upasama] → 실다운 지혜 → 사마타[이탐(離貪)] → 위빳사나[소멸(消滅)] → 바른 깨달음 → 열반


입니다. 그런데 사념처(四念處)는 사띠를 확립하여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심(心)을 보호하는 것인데 염오(厭惡)하여 upasama[가라앉음]에까지 미칩니다. 심(心)의 내적-외적 활동의 영역에 적용되는 수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실다운 지혜가 완성되어 사마타-위빳사나로 심(心)에 내재한 문제를 해결하고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


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고멸도(苦滅道)인 팔정도(八正道)는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입니다. 그러나 이런 서술에 의하면 수행(修行)은 정정(正定)입니다. 다만, 정정(正定)이 일곱 개의 필수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팔정도(八正道)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매수행(三昧修行)이라고 불립니다. 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필수품의 과정을 통해 삼매를 성취하고, 필수품과 함께 삼매 위에서 바른 깨달음을 위한 과정을 닦아 완성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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