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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appamāda[불방일(不放逸)]의 의미

0 1,946 2018.02.24 22:50

appamāda[불방일(不放逸)]의 의미


1. 방일(放逸)-불방일(不放逸)의 중역(重譯)에 따른 오해


 [영역(英譯)]

• Pamāda [cp. Vedic pramāda, pa+mad] carelessness, negligence, indolence, remissness

  ⇔ Appamāda [a + pamāda] thoughtfulness, carefulness, conscientiousness, 

                              watchfulness, vigilance, earnestness, zeal


• Vāyāma [fr. vi+ā+yam] striving, effort, exertion, endeavour

  ㅡ Viriya (nt.) [fr. vīra; cp. Vedic vīrya & vīria] lit. "state of a strong man," 

                              i. e. vigour, energy, effort, exertion

  ⇔ Kusīta (adj.) [Sk. kusīda; cp. kosajja] indolent, inert, inactive. 


 [한역(漢譯)]

• 정진 (精進) [명사] 1. 힘써 나아감.

• 노력 (努力) [명사]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씀.


• 방일 (放逸) [명사] 제멋대로 거리낌 없이 방탕하게 놂.


 ⇒ appamāda는 영역(英譯)으로는 주의 깊음-방심하지 않음 등의 의미인데 한역(漢譯)으로는 불방일(不放逸)입니다. 반대말인 pamāda는 방일(放逸)인데, 노력하지 않음 정도의 의미로 해석됩니다. 


pamāda는 어쩌면 한자(漢字)의 의미로는 영역(英譯)과 같은데 중역(重譯)에 의한 오해로 ‘노력하지 않음’의 의미로 한역(韓譯)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한역(韓譯)에서 방일(放逸)은 노력하지 않음의 의미로 일반적으로 해석되는데, 빠알리로서는 viriya의 반대말인 kusīta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kusīta는 게으름 즉 활동력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pamāda는 활동력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활동하는 가운데 주의력이 작용하지 않음-방심하여 활동 상태가 제어되지 않음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말인 appamāda는 주의 깊음-방심하지 않음의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의 가닥 경(S35:117)[kāmaguṇasuttaṃ]>은


 「“pubbeva me, bhikkhave, sambodhā anabhisambuddhassa bodhisattasseva sato etadahosi — 


"비구들이여, 내가 깨닫기 전, 아직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ㅡ 


‘yeme pañca kāmaguṇā cetaso samphuṭṭhapubb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atra me cittaṃ bahulaṃ gacchamānaṃ gaccheyya paccuppannesu vā appaṃ vā anāgatesu’.


‘전에 나의 심(心)에 와 닿았던 다섯 가닥의 소유의 대상들은 지나가 버렸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그러나 나의 심(心)은 그것들에게로 많이 간다. 현재의 것들에게도 가고 미래의 것들에게로는 적게 간다.'라고.


tassa mayhaṃ, bhikkhave, etadahosi — ‘yeme pañca kāmaguṇā cetaso samphuṭṭhapubb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atra me attarūpena appamādo sati cetaso ārakkho karaṇīyo’.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전에 나의 심(心)에 와 닿았던 다섯 가닥의 소유의 대상들은 지나가 버렸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그러니 나는 스스로의 몸에서 불방일과 사띠와 심(心)의 보호를 행해야 한다.’라고.”


tasmātiha, bhikkhave, tumhākampi ye te pañca kāmaguṇā cetaso samphuṭṭhapubb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atra vo cittaṃ bahulaṃ gacchamānaṃ gaccheyya paccuppannesu vā appaṃ vā anāgatesu. tasmātiha, bhikkhave, tumhākampi ye te pañca kāmaguṇā cetaso samphuṭṭhapubbā atītā niruddhā vipariṇatā, tatra vo attarūpehi appamādo sati cetaso ārakkho karaṇīyo.


그러므로 그대들에게도 전에 그대들의 심(心)에 와 닿은 다섯 가닥의 소유의 대상들은 지나가 버렸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그러나 그대들의 심(心)은 그것들에게로 많이 갈 것이다. 현재의 것들에게도 가고 미래의 것들에게로는 적게 갈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의 경우에도 전에 그대들의 심(心)에 와 닿은 다섯 가닥의 소유의 대상들은 지나가 버렸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그러니 그대들은 스스로의 몸에서 불방일과 사띠로써 심(心)의 보호를 행해야 한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행해야 하는 것으로의 「①불방일과 ②sati와 ③citta의 보호」는 동의어 반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불방일(不放逸)을 행한다는 것은 사띠를 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심(心)의 보호를 행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2. appamādaphala - 불방일(不放逸)의 과(果)


“nāhaṃ, bhikkhave, sabbesaṃyeva bhikkhūnaṃ ‘appamādena karaṇīyan’ti vadāmi; na panāhaṃ, bhikkhave, sabbesaṃyeva bhikkhūnaṃ ‘na appamādena karaṇīyan’ti vadāmi. ye te, bhikkhave, bhikkhū arahanto khīṇāsavā vusitavanto katakaraṇīyā ohitabhārā anuppattasadatthā parikkhīṇabhavasaṃyojanā sammadaññā vimuttā, tathārūpānāhaṃ, bhikkhave, bhikkhūnaṃ ‘na appamādena karaṇīyan’ti vadāmi. taṃ kissa hetu? kataṃ tesaṃ appamādena. abhabbā te pamajjituṃ. ye ca kho te, bhikkhave, bhikkhū sekkhā appattamānasā anuttaraṃ yogakkhemaṃ patthayamānā viharanti, tathārūpānāhaṃ, bhikkhave, bhikkhūnaṃ ‘appamādena karaṇīyan’ti vadāmi. taṃ kissa hetu? appeva nāmime āyasmanto anulomikāni senāsanāni paṭisevamānā kalyāṇamitte bhajamānā indriyāni samannānayamānā — yassatthāya kulaputtā sammadeva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anti tadanuttaraṃ — brahmacariyapariyosāna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eyyunti! imaṃ kho ahaṃ, bhikkhave, imesaṃ bhikkhūnaṃ appamādaphalaṃ sampassamāno ‘appamādena karaṇīyan’ti vadāmi.   <kīṭāgirisuttaṃ (MN 70)>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불방일(不放逸)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렇지만 나는 모든 비구들에게 불방일(不放逸)로써 해야 할 일이 더 이상 없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비구들이여,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고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고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존재의 족쇄를 부수었고 바른 구경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불방일(不放逸)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들은 불방일(不放逸)로써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지만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원하면서 머무는 유학(有學)인 비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불방일(不放逸)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존자들은 적당한 거처를 사용하고 선우(善友)들을 섬기면서 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할 때,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바르게 집을 나와 출가한 목적인 그 위없는 범행(梵行)의 완성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다운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비구들의 이런 불방일(不放逸)의 과(果)를 보기 때문에 불방일(不放逸)로써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한다." 


3. 불방일(不放逸) - 「닦고 많이 행하면 금생의 이익과 내생의 이익 둘 다를 고르게 얻어 그 위에 머물 수 있는 하나의 법」 → 불방일(不放逸) 경(A6:53)[appamādasuttaṃ]


4. 여래의 유훈 → 대반열반경(D16)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조건적인 것들[행(行)]은 사라짐의 법이다. 불방일(不放逸)로써 성취하라.」


5. 방일한 머묾 – 불방일한 머묾 

 

pamādavihārīsuttaṃ(SN 35.80-방일하여 머묾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1&wr_id=1

 

 

nandiyasakkasuttaṃ (SN 55.40-난디야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7_12_04&wr_id=11

 

kathañca, bhikkhave, pamādavihārī hoti? cakkhundriyaṃ asaṃvutassa, bhikkhave, viharato cittaṃ byāsiñcati. cakkhuviññeyyesu rūpesu tassa byāsittacittassa pāmojjaṃ na hoti. pāmojje asati pīti na hoti. pītiyā asati passaddhi na hoti. passaddhiyā asati dukkhaṃ hoti. dukkhino cittaṃ na samādhiyati. asamāhite citte dhammā na pātubhavanti. dhammānaṃ apātubhāvā pamādavihārī tveva saṅkhaṃ gaccha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방일한 머묾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안근(眼根)을 단속하지 않고 머물면 심(心)은 탐(貪)을 뿌린다. 안(眼)으로 알려져야 하는 색(色)들에게 탐(貪)을 뿌린 심(心)에게는 환희가 없다. 환희가 없으면 희열이 없고, 희열이 없으면 경안(輕安)이 없고, 경안하지 못하면 괴로움이 있다. 괴로운 자의 심(心)은 삼매에 들지 않는다. 삼매를 닦지 않는 심(心)에서 법(法)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면 법들이 드러나지 않을 때 방일한 머묾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 육근(六根)에 반복.


“kathañca, bhikkhave, appamādavihārī hoti? cakkhundriyaṃ saṃvutassa, bhikkhave, viharato cittaṃ na byāsiñcati cakkhuviññeyyesu rūpesu, tassa abyāsittacittassa pāmojjaṃ jāyati. pamuditassa pīti jāyati. pītimanassa kāyo passambhati. passaddhakāyo sukhaṃ viharati. sukhino cittaṃ samādhiyati. samāhite citte dhammā pātubhavanti. dhammānaṃ pātubhāvā appamādavihārī tveva saṅkhaṃ gacchat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불방일(不放逸)한 머묾이 있는가? 비구들이여, 안근(眼根)을 단속하여 머물면 심(心)은 탐(貪)을 뿌리지 않는다. 안(眼)으로 알려져야 하는 색(色)들에게 탐(貪)을 뿌리지 않은 심(心)에게는 환희가 생긴다. 환희하는 자에게 희열이 생기고, 희열하는 의(意)의 몸은 경안(輕安)하다. 경안한 몸은 행복하게 머문다. 행복한 자의 심(心)은 삼매에 든다. 삼매를 닦는 심(心)에서 법(法)들은 드러난다. 그러면 법들의 드러남으로부터 불방일한 머묾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 육근(六根)에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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