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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확장

주제의 확장 – 몸

▣ 주제의 확장 – 몸


불교(佛敎)는 마음에 큰 비중을 둔 가르침입니다. 중생이라는 삶의 영역에서 번뇌, 무명, 갈애 등 마음과 연결된 문제들 때문에 생기는 불만족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가지는 제약이 있습니다. 몸이 함께 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몸에 조건 지어진 어떤 것1)입니다. 번뇌, 무명, 갈애 등 마음과 연결된 문제들이 완전하게 해소되지 않는 한, 마음은 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몸에 조건 지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마음과 연결된 문제들이 완전하게 해소된다 해도 몸과 함께하는 삶의 잔여기간 동안에는 몸 때문에 생기는 불만족은 겪어야 할 만큼 몸은 마음을 끈질기게 제약하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2).


특히, 몸은 생존 기간이 마음보다 짧습니다. 그래서 야기되는 몸과 마음의 생존 기간의 불균형은 삶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데, 죽음[사(死)]이라는 사건/현상입니다. 몸이 함께 하지 않으면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마음의 제약은 죽음 이후에 다른 몸과 함께하도록 강제하는데, 태어남[생(生)]입니다. 번뇌, 무명, 갈애 등 마음과 연결된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여 중생으로의 삶의 영역 안에서 죽으면 문제의 정도에 따라 욕계(慾界)든 색계(色界)든 무색계(無色界)든 어딘가에 속한 다른 몸을 만나 그 자리에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3). 이런 과정으로 몸은 생겨나기 때문에 업(業)에서 생긴 몸4)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중생들은 죽으면 태어나야 하고, 태어나면 다시 생존 기간의 불균형 때문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물질로 된 몸의 특성상 늙어야 하고 병들어야 하고, 다양한 불만족을 경험해야 합니다. 불만족, 원하는 만큼 얻어지지 않는 것! 이것을 불교에서는 괴로움[고(苦)]이라고 하는데, 느낌이고, 느껴진 것의 경험입니다[수(受)]. 그렇다면 중생들이 경험하는 모든 느낌[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은 몸과 함께하는 존재 상황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몸으로부터의 벗어남 즉 몸에 조건 지어짐의 해소가 불교 공부의 끝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재생의 조건의 해소이고5),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이 정점입니다6). 그리고 이런 불만족의 정체를 밝히고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모든 것이라고 부처님은 선언합니다. —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한다.」라고7).


그런데 몸과 마음의 관계를 밝히는 것은 인류에게 오랜 숙제입니다. 몸은 태어나고 죽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만 마음은 몸의 영역 밖의 기간에 대해서는 쉽게 확인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과 생명이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는 삶에 대한 완전한 앎이 확보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8). 완전한 깨달음을 실현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이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 연기(緣起) = 십이연기(十二緣起) :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닌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9) & 중생의 윤회10)」


몸은 중요합니다. 마음을 조건 짓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음과 함께 나를 구성하는 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11). 또한, 삶의 과정 동안 누적되는 것들이 마음에 묶이지 않고 몸에 묶여서 삶의 과정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12).


그래서 부처님은 좋은 몸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좋은 몸으로 태어날 때 좋은 몸에 묶인 삶의 과정이 더 좋은 상태로 이끌리도록 삶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13). 


그렇다면 몸도 마음처럼 자세히 알려져야 합니다. 몸 자체에 대한 측면과 마음과의 관계 그리고 몸 밖의 존재들과의 관계[역할]에 대한 측면입니다. 


1) (DN 15.1-대인연경(大因緣經), 연기(緣起))는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을 설명합니다. — 「‘식(識)의 조건으로부터 명색(名色)이 있다.’ & ‘명색(名色)의 조건으로부터 식(識)이 있다.’」 


그런데 명색(名色)은 몸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몸에 조건 지어진 어떤 것입니다.


2) (MN 121-공(空)에 대한 작은 경)은 번뇌로부터 해탈한 아라한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 「그는 이렇게 분명히 안다. — ‘욕루를 연한 불안은 여기에 없다. 유루를 연한 불안은 여기에 없다. 무명루를 연한 불안은 여기에 없다. 그러나 생명을 조건으로 이 몸을 연한 육처(六處)에 속한 불안만은 있다.’라고.」


3) (SN 12.19-우현(愚賢) 경)은 무명이 버려지지 않고 갈애가 부수어지지 않은 어리석은 자는 몸으로 가고, 무명이 버려지고 갈애가 부수어진 현명한 자는 몸으로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DN 33.6-합송경, 셋으로 구성된 것)에 의하면, 갈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 「다른 세 가지 갈애 — 욕애(慾愛), 색애(色愛), 무색애(無色愛).」 즉 갈애는 욕계(慾界)에서도, 색계(色界)에서도, 무색계(無色界)에서도 중생들에게 적용되는 마음과 연결된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욕애(慾愛)에 제약된 채 죽으면 욕계(慾界)의 몸으로 가고, 색애(色愛)에 제약된 채 죽으면 색계(色界)의 몸으로 가고, 무색애(無色愛)에 제약된 채 죽으면 무색계(無色界)의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4) (AN 10.219-업(業)에서 생긴 몸 경)은 「비구들이여,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경험하지 않음에 의한 소멸을 나는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여기[금생(今生)]이거나 걸어서 닿는 곳[내생(來生)]이거나 그 후에 오는 생(生)에서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나는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경험하지 않음에 의한 괴로움의 끝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의도에 속한 업(業)들을 짓고 쌓을 때’ 즉 중생으로의 삶을 살고 있을 때 업(業)에 따르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에 의해 지은 업(業)이 이끄는 대로 몸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경은, 또한, 「itthiyā vā, bhikkhave, purisassa vā nāyaṃ kāyo ādāya gamanīyo. cittantaro ayaṃ, bhikkhave, macco. 비구들이여, 여자든 남자든 이 몸을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죽음은] 심(心)이 연결되는[넘어가는] 것이다.」라고 알려줍니다.


5) 재생의 조건(upadhi) ― (MN 26-덫 경)은 태어나는 것 ~ 오염되는 것으로 가족-가축-재물 등 중생의 삶을 구성하는 것들을 말하면서, 이것들이 upadhi라고 정의합니다(ete upadhayo). 이런 것들로 구성된 중생의 삶의 바탕이 있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upadhi를 이런 측면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을 anuttare upadhisaṅkhaye vimutto(더 이상이 없이 upadhi를 부수고 해탈한 자)라고 말하는 (SN 4.25-마라의 딸들 경)과 sabbakammakkhayaṃ patto, vimutto upadhisaṅkhaye(업의 완전한 부서짐을 성취한 자, upadhi를 부수고 해탈한 자)를 말하는 (SN 5.8-시수빠짤라 경) 등 upadhi의 부서짐에 의한 해탈을 말하는 경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부순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중생의 특성 즉 붙잡는 성질을 해소하고 해탈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upadhi는 중생의 삶을 유지하게 또는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안팎의 것들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 「upadhi = 재생의 조건」


6)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 ― (AN 6.83-으뜸의 법 경)은 믿음이 있고, 히리가 있고, 옷땁빠가 있고, 열심히 정진하고, 지혜가 있고,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이 없는 여섯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으뜸의 법인 아라한 됨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재생의 조건을 해소하고 아라한 되는 과정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재생의 조건은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paṭinissagga 놓음 →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을 놓음

; vossagga 쉼 → 몸과 생명에 대한 갈망을 놓음으로써 완전한 휴식을 얻음


7) (SN 44.2-아누라다 경)/(SN 22.86-아누라다 경)에서 아누라다 존자는 십사무기(十事無記) 중 뒤의 네 가지 즉 깨달은 자의 사후의 존재 상태에 관한 질문에서 그 네 가지와는 다른 경우로 선언되었다고 답한 뒤 잘못 답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부처님께 보고합니다.


부처님은 오온(五蘊)의 여실지견(如實知見)에 이어 염오(厭惡)-이탐(離貪)-해탈(解脫)-해탈지견(解脫知見)의 법문을 설한 뒤 오온(五蘊) 각각을 여래라고 또는 오온(五蘊) 각각에 여래가 있다고 또는 오온 각각과는 다른 곳에 여래가 있다고 관찰할 수 없는 존재의 현실에 대해 동의를 구합니다. 또한, 색(色)-수(受)-상(想)-행(行)들-식(識)을 여래라고 관찰하거나 색(色)을 가지지 않은 것-수(受)를 가지지 않은 것-상(想)을 가지지 않은 것-행(行)들을 가지지 않은 것-식(識)을 가지지 않은 것을 여래라고 관찰할 수 없다는 데에도 동의를 구합니다. 이런 공감 위에서 부처님은 깨달은 자의 사후의 존재 상태가 그 네 가지와는 다른 경우로도 선언될 수 없음을 확인합니다. 


무엇보다도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이런 방식으로 존재를 구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존재 즉 아(我)를 선언하는 외도의 주장들의 허구를 무아(無我)로써 설파하고, 무아(無我)인 존재[유신(有身)]에 대한 이해[십이연기(十二緣起)] 위에서 고멸(苦滅)을 실현하는 것[팔정도(八正道)]에 가르침 즉 불교의 쓰임새를 두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 「“pubbe cāhaṃ, anurādha, etarahi ca dukkhañ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n”ti.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꿰뚫어 알게 한다.」


한편, (MN 22-뱀의 비유 경)에서는 ‘허무주의자인 사문 고따마는 존재하고 있는 중생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라는 거짓된 비난에 대해 「pubbe cāhaṃ bhikkhave, etarahi ca dukkhañ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ṃ.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꿰뚫어 알게 한다.」라고 동일한 입장을 표명합니다.


8) 십사무기(十事無記)에 속하는 열 가지 주제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그렇다’라고 답하지 않습니다. 무명(無明)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중생들의 제한된 인지능력의 밖에 있는 주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생명과 몸에 대한 두 가지 주제는 연기(緣起) 즉 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해 답이 주어진다고 해야 합니다. 「서로 조건 되는 것인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구성된 나 그리고 삶의 과정의 누적을 통한 변화」 또는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廻)」에 의한 삶의 설명은 그대로 생명과 몸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DN 6-마할리 경)과 (DN 7-잘리야 경)에 의하면, 초선(初禪)~천안통(天眼通)을 성취한 높은 삼매를 닦는 수행자라 해도 “그 생명이 그 몸입니까? 아니면 다른 생명과 다른 몸입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은 그럴 만하지만 누진통(漏盡通)으로 아라한을 성취하면 그럴 만하지 않습니다. 천안통까지는 완전히 알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누진한 아라한은 완전히 알고 보기 때문에 의문을 가지지 않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더욱이 누진한 분으로의 부처님은 이렇게 즉 완전히 알고 보기 때문에 상견(常見)으로도 단견(斷見)으로도 말하지 않습니다. — 「그러나 도반들이여, 나는 그것을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 그래서 나는 ‘그 생명이 그 몸입니다.’라거나 ‘다른 생명과 다른 몸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9) 육계(六界)[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가르침에 의해서 식(識)이 몸에 종속되지 않은 것이라고 알면, “그 생명이 그 몸입니다.”라는 명제는 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식(識)은 아(我)가 아닙니다. (MN 38-갈애 부서짐의 큰 경)은 ‘옮겨가고 윤회하는(sandhāvati saṃsarati) 것’으로의 식(識)의 윤회를 말하는 사띠 비구에게 ‘그 식(識)이 어떤 식인가?’라고 되묻고서 아(我)의 특성을 가진 식(識)이라고 답하는 사띠 비구를 질책한 뒤에 연기(緣起)된 식(識)[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몸과 함께하는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연기된 식의 윤회가 부처님이 설명하는 삶에 대한 완전한 앎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이 다른 몸입니다.”라는 명제도 참이 아니라고 알아야 합니다.


10) (SN 15.1-풀과 나무토막 경)으로 시작하는 (SN 15-시작을 알 수 없음 상윳따) 등 많은 경들은 「pubbā koṭ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sandhāvataṃ saṃsarataṃ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처음 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라고 하여 옮겨가고 윤회하는 자가 무명(無明)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중생이라고 설명합니다. 식(識)과 명색(名色)이 함께한 중생의 상태에서 죽어서 식과 명색이 함께한 중생의 상태로 옮겨가고 윤회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때, 명색은 이전 몸과 새로운 몸으로의 차이를 가지기 때문에 금생과 내생을 관통하는 것은 식 즉 연기된 식입니다. 그래서 윤회는 ‘중생의 윤회 또는 연기된 식의 윤회’입니다.


11) 불교(佛敎)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유신(有身-sakkāya)입니다(SN 22.78-사자 경). ‘몸이 있음’의 의미인데, 마음이 몸과 함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설명하는 나는 몸과 마음이 함께하여 구성되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듯 아(我)인 마음의 설정 위에서 마음에 부수되는 것으로의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몸은 마음을 조건 짓는 것이기 이전에 마음과 함께 대등하게 나를 구성하는 나의 일부입니다.


12)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두 번째 대답은 오취온(五取蘊)입니다. 몸인 색(色)과 마음인 식(識)에 삶의 과정에서 파생된 수(受)-상(想)-행(行)이 더해진 정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대답은 서로 조건 되기에 하나의 개념이 되는 ‘식(識)과 명색(名色)’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파생된 무더기인 수온(受蘊)-상온(想薀)-행온(行蘊)과 지금 삶의 동력 즉 활성 요소인 촉(觸)과 작의(作意)를 명(名)으로 정의하고 몸인 색(色)에 더하여 명색(名色)이 정의됩니다. 이런 명색이 식과 서로 조건 됨 위에서 함께하여 나를 구성하는 것인데, bhūta(활성 존재)입니다. 


이때, 명은 명식(名識)의 형태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명이 식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색에 묶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죽으면 명이 몸과 함께 버려진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식과 함께 다음 생으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SN 1.61-명(名) 경)은 「명(名)이 모든 것을 정복하고, 명으로부터 넘어서는 것이 없습니다. 명이라는 하나의 법에게 모든 것은 지배되고 뒤따릅니다.」라고 하여 (SN 1.62-심(心) 경)이 말하는 심 또는 (SN 1.63-애(愛) 경)이 말하는 갈애와 대등한 지배자의 역할을 보여줍니다. — 「세상은 심에 의해 이끌리고, 심에 의해 휩쓸립니다. 심이라는 하나의 법에게 모든 것은 지배되고 뒤따릅니다.」, 「세상은 애(愛)에 의해 이끌리고, 애에 의해 휩쓸립니다. 애라는 하나의 법에게 모든 것은 지배되고 뒤따릅니다.」


이렇게 몸은 명색으로 삶에 참여하고, 나를 구성합니다. 그리고 심 또는 애 즉 마음과 대등하게 모든 것을 지배하고 앞장섭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 ‘몸은 중요합니다!’


13) 경은 많은 곳에서 하늘에 태어날 것을 안내합니다. (AN 6.25-계속해서 기억함의 토대 경) 등은 「성스러운 제자는 천신(天神)을 계속해서 기억한다. ― '사대왕천(四大王天)의 신(神)들이 있고,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신들이 있고, 야마천(夜摩天)의 신들이 있고, 도솔천(兜率天)의 신들이 있고, 화락천(化樂天)의 신들이 있고,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신들이 있고, 범신천(梵身天)의 신들이 있고, 그보다 높은 천(天)의 신들이 있다. 이런 신들은 믿음을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다. 이런 신들은 계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계가 있다. 이런 신들은 배움을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이런 신들은 보시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보시가 있다. 이런 신들은 지혜를 갖추어 여기서 죽은 뒤 그곳에 태어났다. 나에게도 그런 지혜가 있다.’라고.」하여 하늘에 태어날 것을 권장합니다. 또한, (MN 120-행(行)에 의한 태어남 경)도 「믿음을 갖추고, 계를 갖추고, 배움을 갖추고, 보시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비구가 있다. 그는 ‘아!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큰 부자인 끄샤뜨리야들의 … 큰 부자인 바라문들의 … 큰 부자인 장자들의 … 사대왕천의 신들 … 색구경천의 신들의 … 비상비비상처에 도달한 신들의 일원으로 태어나야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심을 북돋우고, 그 심을 확고히 하고, 그 심을 닦는다. 그에게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그 행들과 머묾들은 거기에 태어남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이런 길, 이런 실천이 거기에 태어남으로 이끈다. → 태어나지 않음」이라고 하는데, 여러 경들의 공통된 지향을 보여줍니다.

 

[1] 몸 자체에 대한 앎  

 

[2] 몸과 마음의 만남  

 

[3] 몸의 역할 ㅡ 1. 경향 = 본능(?), 2. 행위, 3. 인식, 4. 몸과 느낌, 5. 몸의 자량, 6. 몸의 건강

 

[4] 몸과 수행  

 

[5] 죽음과 죽음 이후  

 

[6] 죽음 이후를 직접 언급하는 표현들

 

[7] 의성신 

 

첨부 화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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