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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확장

주제의 확장 ― 「manomaya[의성(意成)]의 용례」

▣ 주제의 확장 ― 「manomaya[의성(意成)]의 용례」


의성신(意成身)은 manomaya[의성(意成)]과 kāya[신(身)]의 결합입니다. 이때, maya는 1. made of, 2. consisting in이어서 manomaya[의성(意成)]은 ‘의(意)로 만들어진’ 또는 ‘의(意)로 구성된’입니다. 의(意)는 식(識) 또는 심(心)이 몸과 함께한 상태이므로 몸과 마음이 함께한 상태로 구성되거나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몸이란 의미가 될 것입니다. 「kāyaṃ …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색(色)을 가졌고, 의성(意成)이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근(根)]에 결함이 없는 몸」에 이어 「manomayo pītibhakkho sayaṃpabho antalikkhacaro subhaṭṭhāyī 의성(意成)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는 깨끗한 존재」라는 정형구로 보통 나타납니다.


용례들에 의하면, 의성신은 죽은 뒤 태어나는 몸의 종류이고, 덩어리진 자량이 아닌 희열을 음식으로 하며, 예를 들어 둘 혹은 셋의 마가다의 마을에 있는 밭 크기의 몸이라고 서술됩니다. 


존재는 색(色)을 가졌고, 사대(四大)로 구성되었고, 덩어리진 자량을 먹는 거친 아(我)와 색을 가졌고 의성(意成)이고[의(意)로 만들었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에 결함이 없는 의성(意成)의 아 그리고 무색을 가졌고, 상성(想成)인[상(想)으로 만든] 무색의 아입니다. 그래서 몸은 거친 몸과 의성의 몸과 상성의 몸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거친 아/거친 몸은 욕계(慾界) 존재, 의성의 아/의성의 몸은 색계(色界) 존재, 무색의 아/상성의 몸은 무색(無色)의 존재입니다.


[1] 의성(意成)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는 깨끗한 존재 ― 세상이 줄어드는[진화] 때 광음천(光音天)으로 이끌리는 중생들의 설명


(단수) manomayo pītibhakkho sayaṃpabho antalikkhacaro subhaṭṭhāyī

(복수)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1. (DN 1.7-범망경(梵網經), 일부 영속론자)[brahmajālasuttaṃ, ekaccasassatavādo] ― 일부는 영원하고 일부는 영원하지 않은 아(我)와 세상을 선언하는, 일부 영속 일부 비영속론자인 어떤 사문-바라문들


; 이 내용은 (DN 24.6-빠티까 경, 처음에 대한 앎의 선언 이야기)에서는 권능 가진 자, 범천(梵天)에 의해 창조된 처음에 대한 앎을 선언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부처님의 반론으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 또한, (DN 27.2-처음에 대한 앎 경, 네 계급의 청정)에서는 앞의 두 문단만 나타나는데, 바라문만이 으뜸이라는 바라문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입니다.


; 한편, (DN 27.10-처음에 대한 앎 경, 벼의 배분)에서는 삶의 퇴보를 후회하고 진보로 되돌리는 의논의 자리에서 악한 법들이 나타나기 전의 삶으로 소개됩니다.


; 그리고 (AN 10.29-꼬살라 경1)에서는 첫 문단만 나타나는데, 줄어드는[진화] 세상에서 으뜸이라고 알려진 광음천의 신들의 변화를 보면서 염오-이탐할 것을 이끕니다.


“hoti kho so, bhikkhave,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saṃvaṭṭati. saṃvaṭṭamāne loke yebhuyyena sattā ābhassarasaṃvattanikā honti. te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nti.


비구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줄어드는[진화] 때가 있다. 줄어드는[진화] 세상에서 대부분 중생은 광음천으로 이끌린다. 의성(意成)인 그들은 거기서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는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hoti kho so, bhikkhave, samayo, yaṃ kadāci karahaci dīghassa addhuno accayena ayaṃ loko vivaṭṭati. vivaṭṭamāne loke suññaṃ brahmavimānaṃ pātubhavati. atha kho aññataro satto āyukkhayā vā puññakkhayā vā ābhassarakāyā cavitvā suññaṃ brahmavimānaṃ upapajjati. so tattha hoti manomayo pītibhakkho sayaṃpabho antalikkhacaro subhaṭṭhāyī,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ti.


비구들이여,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자라나는[퇴보] 때가 있다. 자라나는[퇴보] 세상에 비어있는 범천(梵天)의 하늘 궁전이 나타난다. 그때 어떤 중생이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 광음천(光音天)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비어있는 범천(梵天)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는 거기서 의성(意成)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는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tassa tattha ekakassa dīgharattaṃ nivusitattā anabhirati paritassanā upapajjati — ‘aho vata aññepi sattā itthattaṃ āgaccheyyun’ti. atha aññepi sattā āyukkhayā vā puññakkhayā vā ābhassarakāyā cavitvā brahmavimānaṃ upapajjanti tassa sattassa sahabyataṃ. tepi tattha honti manomayā pītibhakkhā sayaṃpabhā antalikkhacarā subhaṭṭhāyino, ciraṃ dīghamaddhānaṃ tiṭṭhanti.


거기서 오랫동안 혼자 머무는 그에게 싫증과 동요가 생긴다. ― ‘다른 중생들도 여기에 왔으면!’이라고. 그때 다른 중생들도 수명의 부서짐 때문이거나 공덕의 부서짐 때문에 광음천(光音天)의 무리로부터 떨어져 그 중생의 동료로 범천(梵天)의 하늘 궁전에 태어난다. 그들도 거기서 의성(意成)이고, 희열이 음식이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는 깨끗한 존재로 오랫동안 긴 시간을 머문다.


[2] 하늘의 색(色)을 가졌고 의성(意成)이고 모든 수족을 다 갖추었고 결함이 없는 기능을 갖춘 아(我)


attā dibbo rūpī manomayo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1. (DN 1.15-범망경, 단멸을 말하는 자)[brahmajālasuttaṃ, ucchedavādo] ―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


“tamañño evamāha — ‘atthi kho, bho, eso attā, yaṃ tvaṃ vadesi, neso natthīti vadāmi; no ca kho, bho, ayaṃ attā ettāvatā sammā samucchinno hoti. atthi kho, bho, añño attā dibbo rūpī manomayo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taṃ tvaṃ na jānāsi na passasi. tamahaṃ jānāmi passāmi. so kho, bho, attā yato kāyassa bhedā ucchijjati vinassati, na hoti paraṃ maraṇā, ettāvatā kho, bho, ayaṃ attā sammā samucchinno hotī’ti. ittheke sato sattassa ucchedaṃ vināsaṃ vibhavaṃ paññapenti.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 ‘존자여, 그런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한 것이 없다고 나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여, 이 아(我)는 이만큼으로 바르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존자여, 하늘의 색(色)을 가졌고 의(意)로 만들었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에 결함이 없는 아(我)가 있습니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고 봅니다. 존자여, 그런 아(我)는 거기에서 몸이 무너진 뒤 단멸하고 상실됩니다. 죽음 이후는 없습니다. 이만큼, 존자여, 이 아(我)는 바르게 없어집니다.’라고. 이렇게 어떤 사람은 존재하는 중생들의 단멸과 상실에 의한 존재에서 벗어남을 선언한다.


[3] 의성신(意成身) ― manomayaṃ kāyaṃ


1. (DN 2-사문과경)과 그 수행 체계를 반복하는 경전들 ― (DN 3-암밧타 경), (DN 4-소나단다 경), (DN 5-꾸따단따 경), (DN 6-마할리 경), (DN 7-잘리야 경), (DN 8-깟사빠 사자후 경), (DN 10-수바 경), (DN 11-께왓따 경), (DN 12-로힛짜 경) & (MN 77-사꿀루다이 큰 경)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ā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so imamhā kāyā aññaṃ kāyaṃ abhinimmināti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그가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의(意)로 만든 몸[의성신(意成身)]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색(色)을 가졌고, 의(意)로 만들었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에 결함이 없는 다른 몸을 만들어냅니다.


“seyyathāpi, mahārāja, puriso muñjamhā īsikaṃ pavāheyya. tassa evamassa — ‘ayaṃ muñjo, ayaṃ īsikā, añño muñjo, aññā īsikā, muñjamhā tveva īsikā pavāḷhā’ti. seyyathā vā pana, mahārāja, puriso asiṃ kosiyā pavāheyya. tassa evamassa — ‘ayaṃ asi, ayaṃ kosi, añño asi, aññā kosi, kosiyā tveva asi pavāḷho”ti. seyyathā vā pana, mahārāja, puriso ahiṃ karaṇḍā uddhareyya. tassa evamassa — ‘ayaṃ ahi, ayaṃ karaṇḍo. añño ahi, añño karaṇḍo, karaṇḍā tveva ahi ubbhato’ti. evameva kho, mahārāja, bhikkhu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ā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so imamhā kāyā aññaṃ kāyaṃ abhinimmināti rūpiṃ manomayaṃ sabbaṅgapaccaṅgiṃ ahīnindriyaṃ. idampi kho, mahārāja, sandiṭṭhikaṃ sāmaññaphalaṃ purimehi sandiṭṭhikehi sāmaññaphalehi abhikkantatarañca paṇītatarañca. 


예를 들면, 대왕이여, 사람이 문자 풀로부터 갈대를 골라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 ‘이것은 문자 풀이고 이것은 갈대이다. 문자 풀이 다르고 갈대가 다르다. 이제 문자 풀로부터 갈대가 제거되었다.’라고. 다시 예를 들면, 대왕이여, 사람이 칼을 칼집에서 꺼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 ‘이것은 칼이고 이것은 칼집이다. 칼이 다르고 칼집이 다르다. 이제 칼집으로부터 칼이 꺼내졌다.’라고. 다시 예를 들면, 대왕이여, 사람이 뱀을 개미집으로부터 끌어낼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개미집이다. 뱀이 다르고 개미집이 다르다. 이제 개미집으로부터 뱀은 끌어내졌다.’라고. 이처럼, 대왕이여, 비구는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의(意)로 만든 몸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색(色)을 가졌고, 의(意)로 만들었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에 결함이 없는 다른 몸을 만들어냅니다. 이것도, 대왕이여, 이전의 눈에 보이는 사문의 결실들보다 더 훌륭하고 더 뛰어난 눈에 보이는 사문의 결실입니다.


2. AN 1, 14. etadaggavaggo, 2. dutiyavaggo (AN 1.198-208-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 으뜸의 품, 두 번째 품)


“etadaggaṃ, bhikkhave, mama sāvakānaṃ bhikkhūnaṃ manomayaṃ kāyaṃ abhinimminantānaṃ yadidaṃ cūḷapanthako” .


비구들이여, 나의 비구 제자 가운데 의성신(意成身)을 만듦의 측면에서 으뜸은 쭐라빤타까이다.


3. (AN 5.44-마음에 흡족한 공양을 올리는 자 경)


atha kho uggo gahapati vesāliko aparena samayena kālamakāsi. kālaṅkato ca uggo gahapati vesāliko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jji.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웨살리 출신의 장자 욱가는 죽었다. 죽은 후에 웨살리 출신의 장자 욱가는 어떤 의성신으로 태어났다.


4. (AN 5.100-까꾸다의 경)


tena kho pana samayena kakudho nāma koliyaputto āyasmato mahāmoggallānassa upaṭṭhāko adhunākālaṅkato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o. tassa evarūpo attabhāvapaṭilābho hoti — seyyathāpi nāma dve vā tīṇi vā māgadhakāni gāmakkhettāni. so tena attabhāvapaṭilābhena neva attānaṃ no paraṃ byābādheti.


그때 꼴리야 출신의 까꾸다는 존자 마하목갈라나의 시자였는데, 방금 죽어서 어떤 의성신(意成身)으로 태어났다. 그는 예를 들어 둘 혹은 셋의 마가다의 마을에 있는 밭 크기의 몸을 얻었다. 그는 그 몸을 얻어서 자신도 괴롭히지 않고 남도 괴롭히지 않았다.


5. (AN 5.166-소멸의 경)


“idhāvuso, bhikkhu sīlasampanno samādhisampanno paññāsampanno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eyyāpi vuṭṭhaheyyāpi — atthetaṃ ṭhānaṃ. no ce diṭṭheva dhamme aññaṃ ārādheyya, atikkammeva kabaḷīkārāhārabhakkh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o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jjeyyāpi vuṭṭhaheyyāpi — atthetaṃ ṭhānan”ti.


벗들이여, 세상에 비구가 계(戒)를 갖추고 삼매를 갖추고 지혜를 갖추면 상수멸(想受滅)에 들거나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능합니다. 만약에 그가 현세에서 무위(無爲)의 앎을 성취하지 못하면, 거친 음식으로 사는 신들의 동반자를 뛰어넘어 어떤 의성신(意成身)으로 태어나 상수멸(想受滅)에 들거나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 가능합니다.


6. (AN 11.13-난디야의 경)


“puna caparaṃ tvaṃ, nandiya, devatā anussareyyāsi — ‘yā devatā atikkammeva kabaḷīkārāhārabhakkhānaṃ devatānaṃ sahabyataṃ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ā, tā karaṇīyaṃ attano na samanupassanti katassa vā paticayaṃ. seyyathāpi, nandiya, bhikkhu asamayavimutto karaṇīyaṃ attano na samanupassati katassa vā paticayaṃ; evamevaṃ kho, nandiya, yā tā devatā atikkammeva kabaḷīkārāhārabhakkhānaṃ devatānaṃ sahabyataṃ aññataraṃ manomayaṃ kāyaṃ upapannā, tā karaṇīyaṃ attano na samanupassanti katassa vā paticayaṃ. iti kho te, nandiya, devatā ārabbha ajjhattaṃ sati upaṭṭhāpetabbā.


"다시 난디야여, 그대는 다음과 같이 천신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덩어리 음식을 먹는 신들의 동료를 넘어서서 어떤 의성신(意成身)으로 다시 태어난 신들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한 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보지 못한다. 마치 확실하게 해탈한 비구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한 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덩어리 음식을 먹는 신들의 동료를 넘어서서 어떤 의성신(意成身)으로 다시 태어난 신들은 자신에게서 더 이상 해야 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미 한 것을 다시 반복할 필요를 보지 못한다. 난디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천신을 대상으로 안으로 사띠를 확립해야 한다.


7. 의성신으로(수단격) ― manomayena kāyena ― (SN 51.22-쇠 구슬 경)


sāvatthinidānaṃ.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 “abhijānāti nu kho, bhante, bhagavā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abhijānāmi khvāhaṃ, ānanda,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abhijānāti pana, bhante, bhagavā iminā cātumahābhūtikena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abhijānāmi khvāhaṃ, ānanda, iminā cātumahābhūtikena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ti.


사왓티에서 설해짐.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신통(神通)에 의해 의성신(意成身)으로 범천(梵天)의 세상에 가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난다여, 나는 신통(神通)에 의해 의성신(意成身)으로 범천(梵天)의 세상에 간 것을 기억한다.” “또한,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으로 신통(神通)에 의해 범천(梵天)의 세상에 가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아난다여, 나는 신통(神通)에 의해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으로 범천(梵天)의 세상에 간 것을 기억한다.”


“yañca kho, omāti, bhante, bhagavā iddhiyā manomayena kāyena brahmalokaṃ upasaṅkamituṃ, yañca kho abhijānāti, bhante, bhagavā iminā cātumahābhūtikena kāyena iddhiyā brahmalokaṃ upasaṅkamitā, tayidaṃ, bhante, bhagavato acchariyañceva abbhutañcā”ti. “acchariyā ceva, ānanda, tathāgatā acchariyadhammasamannāgatā ca, abbhutā ceva, ānanda, tathāgatā abbhutadhammasamannāgatā ca”.


“세존께서 신통(神通)에 의해 의성신(意成身)으로 범천(梵天)의 세상에 가신 것을 기억하시고, 세존께서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이 몸으로 신통(神通)에 의해 범천(梵天)의 세상에 가신 것을 기억하시는 것은 세존의 놀랍고 신기함입니다.” “아난다여, 여래들은 놀랍고 또한 놀라운 법을 갖추었다. 아난다여, 여래들은 신기롭고 또한 신기한 법을 갖추었다.


8. 의성신으로(수단격) ― manomayena kāyena ― (AN 8.30-아누룻다 대인의 생각 경)


“mama saṅkappamaññāya, satthā loke anuttaro.
manomayena kāyena, iddhiyā upasaṅkami.


나의 사유를 아신 뒤에 세상의 위 없는 스승은

의성신(意成身)에 의해, 신통(神通)으로 오셨다.


[3] 색을 가진 의성(意成)의 신들 ― devā rūpino manomayā


1. (MN 60-흠 없음 경)


“santi, gahapatayo,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natthi sabbaso āruppā’ti. tesaṃyeva kho, gahapatayo, samaṇabrāhmaṇānaṃ eke samaṇabrāhmaṇā ujuvipaccanīkavādā. te evamāhaṃsu — ‘atthi sabbaso āruppā’ti. taṃ kiṃ maññatha, gahapatayo, nanume samaṇabrāhmaṇā aññamaññassa ujuvipaccanīkavādā”ti? “evaṃ, bhante”. “tatra, gahapatayo, viññū puriso iti paṭisañcikkhati —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natthi sabbaso āruppā’ti, idaṃ me adiṭṭhaṃ; yepi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atthi sabbaso āruppā’ti, idaṃ me aviditaṃ. ahañceva kho pana ajānanto apassanto ekaṃsena ādāya vohareyyaṃ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na metaṃ assa patirūpaṃ. ye kho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natthi sabbaso āruppā’ti, sace tesaṃ bhavataṃ samaṇabrāhmaṇānaṃ saccaṃ vacanaṃ, ṭhānametaṃ vijjati — ye te devā rūpino manomayā, apaṇṇakaṃ me tatrūpapatti bhavissati. ye pana te bhonto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atthi sabbaso āruppā’ti, sace tesaṃ bhavataṃ samaṇabrāhmaṇānaṃ saccaṃ vacanaṃ, ṭhānametaṃ vijjati — ye te devā arūpino saññāmayā, apaṇṇakaṃ me tatrūpapatti bhavissati. dissanti kho pana rūpādhikaraṇaṃ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vaṃ-pesuñña-musāvādā. ‘natthi kho panetaṃ sabbaso arūpe’”ti. so iti paṭisaṅkhāya rūpānaṃyev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장자들이여,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 ‘전적으로 무색계(無色界)의 존재는 없다.'라고, 장자들이여, 그 사문-바라문들에게 정반대의 주장을 가진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 ‘전적으로 무색계의 존재는 있다.'라고, 장자들이여, ‘이 사문-바라문들은 서로 간에 정반대의 주장을 가졌다.’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덕이시여.”


장자들이여, 거기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숙고합니다. —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전적으로 무색계의 존재는 없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이것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전적으로 무색계의 존재는 있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졌다. 이것도 나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만약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내가 한 측면에 의해 받아들인 뒤에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적절하지 않다. 만약 ‘전적으로 무색계의 존재는 없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색을 가진 의성(意成)의 신들, 나는 흠 없이 거기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전적으로 무색계의 존재는 있다.’라는 이런 주장 이런 견해를 가진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색(無色)을 가진 상성(想成)의 신들, 나는 흠 없이 거기에 태어날 것이다.’라는 경우는 있다. ‘색 때문에 몽둥이를 들고 무기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논쟁하고 상호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는 것들이 나타나는데, 전적으로 무색계에는 이것이 없다.’라고.


그는 이렇게 숙고한 뒤에 색들을 염오하고 이탐하고 소멸하기 위해 실천합니다.


[4] 의성(意成)의 아(我)


1. (DN 9.7-뽓타빠다 경, 세 가지 아(我)를 얻음)


“tayo kho me,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ā — oḷāriko attapaṭilābho, manomayo attapaṭilābho, arūpo attapaṭilābho. katamo ca, poṭṭhapāda, oḷāriko attapaṭilābho? rūpī cātumahābhūtiko kabaḷīkārāhārabhakkho, ayaṃ oḷāriko attapaṭilābho. katamo manomayo attapaṭilābho? rūpī manomayo sabbaṅgapaccaṅgī ahīnindriyo, ayaṃ manomayo attapaṭilābho. katamo arūpo attapaṭilābho? arūpī saññāmayo, ayaṃ arūpo attapaṭilābho.


뽓타빠다여, 이런 세 가지 아(我)를 얻음이 있는데, 거친 아(我)를 얻음, 의성(意成)의 아(我)를 얻음, 무색(無色)의 아(我)를 얻음입니다. 그러면 뽓타빠다여, 무엇이 거친 아를 얻음입니까? 색(色)을 지녔고, 사대(四大)로 구성되었고, 덩어리진 자량을 먹는 이것이 거친 아를 얻음입니다. 무엇이 의성의 아를 얻음입니까? 색을 가졌고 의성(意成)이고[의(意)로 만들었고] 수족을 완전히 갖추고 기능에 결함이 없는 이것이 의성의 아를 얻음입니다. 무엇이 무색의 아를 얻음입니까? 무색을 지녔고, 상성(想成)인[상(想)으로 만든] 이것이 무색의 아를 얻음입니다.


“oḷārikassapi kho ahaṃ,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assa pahānāya dhammaṃ desemi —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siyā kho pana te, poṭṭhapāda, evamassa —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dukkho ca kho vihāroti, na kho panetaṃ, poṭṭhapāda, evaṃ daṭṭhabbaṃ. saṃkilesikā ceva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ca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i, pāmujjaṃ ceva bhavissati pīti ca passaddhi ca sati ca sampajaññañca sukho ca vihāro.


뽓타빠다여, 나는 거친 아를 얻음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러나 뽓타빠다여, 그대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괴롭게 머문다.’라고. 뽓타빠다여, 그러나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합니다.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입니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입니다. 환희와 희열과 진정과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게 될 것이고, 즐겁게 머뭅니다.


“manomayassapi kho ahaṃ,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assa pahānāya dhammaṃ desemi …


뽓타빠다여, 나는 의성의 아를 얻음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


“arūpassapi kho ahaṃ, poṭṭhapāda, attapaṭilābhassa pahānāya dhammaṃ desemi …


뽓타빠다여, 나는 무색의 아를 얻음을 버리기 위해서 법을 설합니다. …


“pare ce, poṭṭhapāda, amhe evaṃ puccheyyuṃ — ‘katamo pana so, āvuso, oḷāriko attapaṭilābho, yassa tumhe pahānāya dhammaṃ deseth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tesaṃ mayaṃ evaṃ puṭṭhā evaṃ byākareyyāma — ‘ayaṃ vā so, āvuso, oḷāriko attapaṭilābho, yassa mayaṃ pahānāya dhammaṃ desema, yathāpaṭipannānaṃ vo saṃkilesikā dhammā pahīyissanti, vodāniyā dhammā abhivaḍḍhissanti, paññāpāripūriṃ vepullattañca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athā’ti.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질문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 ‘도반들이여, 이것이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실천하는 그대들에게 오염의 법들은 버려질 것이고, 청정해지는 법들은 늘어날 것이다. 지혜의 완성과 충만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그것의 버림을 위한 법을 설하는 그 거친 아를 얻음입니다.’라고.


“pare ce, poṭṭhapāda, amhe evaṃ puccheyyuṃ — ‘katamo pana so, āvuso, manomayo attapaṭilābho, …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 의성의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


“pare ce, poṭṭhapāda, amhe evaṃ puccheyyuṃ — ‘katamo pana so, āvuso, arūpo attapaṭilābho, …


뽓타빠다여, 만약 남들이 우리에게 ‘도반들이여, 그대들이 …무색의 아를 얻음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


“taṃ kiṃ maññasi, poṭṭhapāda, nanu evaṃ sante sappāṭihīrakataṃ bhāsitaṃ sampajjatī”ti? “addhā kho, bhante, evaṃ sante sappāṭihīrakataṃ bhāsitaṃ sampajjatī”ti.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뽓타빠다여?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이 아닙니까?” “대덕이시여, 참으로 이런 경우는 정당하게 말해진 것입니다.”



“yasmiṃ, citta, samaye oḷāriko attapaṭilābho hoti, neva tasmiṃ samaye manomay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na arūp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oḷāriko attapaṭilābhotveva tasmiṃ samaye saṅkhaṃ gacchati. yasmiṃ, citta, samaye manomayo attapaṭilābho hoti, neva tasmiṃ samaye oḷārik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na arūp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manomayo attapaṭilābhotveva tasmiṃ samaye saṅkhaṃ gacchati. yasmiṃ, citta, samaye arūpo attapaṭilābho hoti, neva tasmiṃ samaye oḷārik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na manomay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arūpo attapaṭilābhotveva tasmiṃ samaye saṅkhaṃ gacchati.


”찟따여, 거친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의성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무색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seyyathāpi, citta, gavā khīraṃ, khīramhā dadhi, dadhimhā navanītaṃ, navanītamhā sappi, sappimhā sappimaṇḍo. yasmiṃ samaye khīraṃ hoti, neva tasmiṃ samaye dadhīti saṅkhaṃ gacchati, na navanītanti saṅkhaṃ gacchati, na sappīti saṅkhaṃ gacchati, na sappimaṇḍoti saṅkhaṃ gacchati; khīraṃ tveva tasmiṃ samaye saṅkhaṃ gacchati. yasmiṃ samaye dadhi hoti ... pe ... navanītaṃ hoti... sappi hoti... sappimaṇḍo hoti, neva tasmiṃ samaye khīranti saṅkhaṃ gacchati, na dadhīti saṅkhaṃ gacchati, na navanītanti saṅkhaṃ gacchati, na sappīti saṅkhaṃ gacchati; sappimaṇḍo tveva tasmiṃ samaye saṅkhaṃ gacchati. evameva kho, citta, yasmiṃ samaye oḷāriko attapaṭilābho hoti ... pe ... yasmiṃ, citta, samaye manomayo attapaṭilābho hoti ... pe ... yasmiṃ, citta, samaye arūpo attapaṭilābho hoti, neva tasmiṃ samaye oḷārik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na manomayo attapaṭilābhoti saṅkhaṃ gacchati; arūpo attapaṭilābho tveva tasmiṃ samaye saṅkhaṃ gacchati. imā kho citta, lokasamaññā lokaniruttiyo lokavohārā lokapaññattiyo, yāhi tathāgato voharati aparāmasan”ti.


예를 들면, 찟따여,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가 됩니다. 우유가 있을 때는 응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생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우유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응유가 되었을 때는 … 생 버터가 되었을 때는 … 정제된 버터가 되었을 때는 … 최상의 버터가 되었을 때는 우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응유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생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처럼, 찟따여, 거친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의성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찟따여, 무색의 아를 얻음이 있을 때는 거친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고, 의성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도 얻지 않습니다. 그때는 오직 무색의 아를 얻음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이것들이, 찟따여, 세상의 명칭이고, 세상의 언어이고, 세상의 삶이고, 세상의 개념입니다. 그것들에 의해서 여래는 집착 없이 설명합니다.”


[5] 기타 ― (SN 35.94-길들이지 않고 보호하지 않음 경)


Papañcasaññā itarītarā narā,
Papañcayantā upayanti saññino;
Manomayaṃ gehasitañca sabbaṃ,
Panujja nekkhammasitaṃ irīyati.


망상(妄想)의 상(想)을 가진 이런저런 인간들은

망상(妄想)으로 접근하는 상(想)을 가진 자들이다.

세속과 연결된 모든 의성(意成)을 떨치고

출리와 연결된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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