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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차】 업(業) 이야기
쉽지만 어긋남이 없는 공부를 위해 해피법당이 개설하는 새출발법회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수업에서는 마음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매 순간 삶의 과정에서 새로이 생겨난 마음이 몸통으로는 하나이지만 대상과 역할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다르게 불린다는 것을 알아야 관리-활용을 적절히 할 수 있어 괴로움을 만들지 않게 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이렇게 조건에 따라 다른 것으로 구분해 알아야 하는 이유를 업(業)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업(業)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인데, 왜 이런 노력이 필요할까요?
세상을 보는 바른 시각 즉 정견(正見) 가운데 요즘 우리가 공부하는 (DN 23-빠야시 경)의 세 가지 즉 ‘①저세상은 있다, ②화생(化生)하는 중생은 있다, ③선악(善惡)의 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에서 업(業)은 지옥-축생-아귀-인간-천상의 다섯 세상에서 윤회하는 삶 가운데 금생과 내생에 걸쳐 괴로울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동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 업(業)은 무엇입니까?
업(業)은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분류됩니다. 좀 더 상세히 분류하면,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의 신업(身業)과 망어(妄語)-양설(兩舌)-악구(惡口)-기어(綺語)의 구업(口業) 그리고 간탐-진에-사견(邪見)의 의업(意業)으로 분류하여 십업(十業)[십악업(十惡業)-십선업(十善業)]이 됩니다.
이때, 십악업은 괴로움[고(苦)]를 초래하는 업(業)이고, 십선업은 행복[락(樂)]을 초래하는 업입니다. 그래서 업은 신구의로 행위 하고 고락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게 됩니다.
그런데 업(業)은 단순히 신구의(身口意)로 행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원인이나 조건이 행위 이면에서 작용하는 것입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이 질문은 중요한 관심거리였나 봅니다. (AN 3.62-근본 교리 등 경)은 세 가지 외도의 견해를 소개하는데, 원인-조건 없음의 견해[무인무연(無因無緣)]과 있다는 견해 두 가지[①신(神)의 뜻, ②전생의 업(業)]입니다. 이 세 가지를 삼종외도(三種外道)라고 하는데,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세 가지 밖의 길이란 의미입니다. 경은 「현자들과 함께 교차하여 질문하고, 이유를 묻고, 함께 대화하고, 더 나아가면 결실 없음으로 정착된다.」라고 합니다. 삶의 현실을 사실 그대로 보아내지 못한 가르침 즉 사실 아닌 가르침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스승으로 존경 받을 수는 있지만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지는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중에서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생의 행위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전생의 행위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존자들은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생명을 해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험담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거친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간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원인인 거슬린 심(心)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전생의 행위를 원인으로 삿된 견해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전생의 행위를 중심에 두면 관심이거나 노력이거나 이것은 행해야 할 것이라거나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되돌아옴이 없다. 이렇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사실과 믿을만함으로부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띠를 잊고 보호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스스로 법다운 사문이라는 주장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법에 맞는 질책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중에서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창조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창조가 원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존자들은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생명을 해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험담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거친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간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거슬린 심(心)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창조주의 창조를 원인으로 삿된 견해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창조주의 창조를 중심에 두면 관심이거나 노력이거나 이것은 행해야 할 것이라거나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되돌아옴이 없다. 이렇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사실과 믿을만함으로부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띠를 잊고 보호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스스로 법다운 사문이라는 주장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법에 맞는 질책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중에서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무인무연(無因無緣)].’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 ‘그대 존자들이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무인무연(無因無緣)].’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입니까?’라고. 비구들이여, 내가 이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다면 존자들은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생명을 해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범행(梵行)을 실천하지 않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거짓을 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험담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거친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쓸모없고 허튼 말을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간탐하는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거슬린 심(心)을 가진 자가 될 것이고,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이 삿된 견해를 가진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원인도 조건도 없음[무인무연(無因無緣)]을 중심에 두면 관심이거나 노력이거나 이것은 행해야 할 것이라거나 이것은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되돌아옴이 없다. 이렇게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해 사실과 믿을만함으로부터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띠를 잊고 보호하지 않고 머무는 자에게 스스로 법다운 사문이라는 주장은 없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그런 주장과 그런 견해를 가진 사문-바라문들에 대한 나의 세 번째 법에 맞는 질책이다.”
그러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삶의 현실을 사실 그대로 보아낸, 사실인 가르침에서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합니까?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이 질문에 심(心)이 바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원인이라고 알려줍니다. 심(心)을 원인으로 신구의(身口意)로 행위 하여 고(苦)와 락(樂)을 만드는 것을 업(業)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때, 어감을 위해 심(心)과 의(意)를 원어[빠알리어]로 표현하면 좋겠습니다. 심(心)은 citta[찟따], 의(意)는 mano[마노]입니다. 그러면 이 문장은 「citta를 원인으로 몸과 말과 mano로 행위 하여 고(苦)와 락(樂)을 만드는 것이 업(業)」이 됩니다.
이제 업(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질문이 필요합니다. 여기까지의 업(業)에 대한 정의에 의하면, 누구나 citta를 원인으로 몸과 말과 mano로 행위 하는 것인데, 왜 누구는 괴로움[고(苦)]을 만들고 누구는 행복[락(樂)]을 만드는 것일까요?
부처님은 여기에서 탐진치(貪嗔癡)를 제시합니다. 욕심[탐(貪)]-성냄[진(嗔)]-어리석음[치(癡)]이라고 잘 알려진 탐진치 삼독(三毒)입니다. 그래서 탐진치에 오염된 citta가 몸과 말과 mano로 오염된 행위를 하면 괴로움을 만들고, 탐진치에서 벗어나 청정해진 citta가 청정해진만큼 몸과 말과 mano로 청정한 행위를 하면 청정해진만큼 행복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업에 대한 분명한 정의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원인의 자리인 citta라는 마음과 행위의 자리인 mano라는 마음을 구분해 알아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지난주에는 「심이라고도 의라고도 식이라고도 하는 그것, 마음!」을 먼저 공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업에 대한 이런 정의에서 보면, 심(心) 즉 citta는 탐진치에 조건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citta가 탐진치의 오염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느냐[청정]을 가지고 고락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때 탐진치를 설명하는 재미있는 경전이 있는데, (AN 3.69-외도 경)입니다. - 「탐(貪)은 결점은 작지만 바램이 느립니다. 진(嗔)은 결점은 크지만 바램이 빠릅니다. 치(癡)는 결점도 크고 바램도 느립니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좀 더 표면의 마음인 의(意) 즉 mano의 조건 관계로 고락의 상태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오개(五蓋)-오장(五障)]입니다. 간탐-진에-해태혼침-들뜸후회-의심의 다섯 가지가 마음의 덮개이고 장애라는 것입니다.
특히, (MN 48-꼬삼비 경) 등은 감춰진 citta(*)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다섯 가지 장애 등에 의해 citta는 내면 깊숙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아서, citta와 탐진치의 조건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표면에서 덮고 있는 다섯 가지 장애를 먼저 걷어내야 하는 필요성이 제기되기 것입니다.
(*) pariyuṭṭhitacitto ‒ 초기불전연구원(대림스님) : 사로잡힌 마음, 근본경전연구회(해피스님-현재) : 스며든 심
업(業)에 대한 공부는 이렇게 해서 다섯 가지 장애와 mano의 상관관계로 초점을 옮겨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