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붇다』에서 「Ⅶ. 여래구덕(如來九德) ― 여래의 9가지 덕성」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붇다(스승-교육자)는 제자들(학생)이 왜 자신을 따라 공부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여래구덕(如來九德)입니다.
◐ 여래구덕(如來九德-여래의 9가지 덕성) ―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
[1] 함께하는 하나의 개념
여래의 9가지 덕성은 대부분 함께하여
‘iti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ti
이렇게 그분 세존(世尊)께서는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을 갖추신 분, 잘 가신 분(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이시다.
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①붇다에 대해 퍼져 있는 명성이거나 ②사실과 일치하는 설명 또는 ③성스러운 제자가 가진 붇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입니다. 특히, ③확실한 믿음은 일곱 가지 정법(正法-바른 법) 중 첫 번째/믿음의 기능/믿음을 갖춤/믿음의 힘/믿음의 재산 등으로 나타나서 행복한 삶과 향상된 삶의 양면에서 출발점을 지시합니다.
또한, 「buddhānussati(붇다-눗사띠) ― 불수념(佛隨念-붇다를 계속해서 기억 하기)」라는 이름으로 암송하는 신행(信行)의 도구입니다.
• itipi so bhagavā arahaṁ 이띠삐 소- 바가와- 아라항
세상에서 존귀한 분! 번뇌 다하고, 탐(貪)-진(嗔)-치(癡)를 완전히 부순 아라한 (阿羅漢)이기에 ‘아라항’입니다.
• sammāsambuddho 삼마-삼붇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정등각(正等覺)이기에 ‘삼마-삼붇도-’입니다.
• vijjācaraṇasampanno 윗자-짜라나삼빤노-
바른 삼매의 실천으로 무명(無明)이 부서지고 명(明)이 생겨난,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긴 명행족(明行足)이기에 ‘윗자-짜라나삼빤노-’입니다.
• sugato 수가또-
열반으로 잘 가고, 뒤따르는 진리의 길 보여주는 선서(善逝)이기에 ‘수가또-’입니다.
• lokavidū 로-까위두-
세상의 근본을 알아서 세상살이를 안내하는 ‘세간해(世間解)’이기에 ‘로-까위두-’입니다
•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
길들어야 하는 사람을 이끄는데 으뜸인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이기에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입니다.
• satthā devamanussānaṁ 삿타- 데-와마눗사-낭
신(神)과 인간(人間)의 스승인 천인사(天人師)이기에 ‘삿타- 데-와마눗사-낭’입니다.
• buddho 붇도-
알고, 닦고, 버림으로써 깨닫고, 그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불(佛-붇다)이기에 ‘붇도-’입니다.
• bhagavā 바가와-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 세상에 이익을 주고 세상에서 존중받는, 세상에서 존귀한 세존(世尊)이기에 ‘바가와-’입니다.
[2] 개별적 용례
이 외에 개별적 용례가 발견되는데, 각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아라한(arahant) ― 열 가지 족쇄(*)를 모두 끊어 생사 문제를 해결한 자
;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vimutto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
번뇌[루(漏)-āsava]는 2차 인식에 공동주관으로 참여하는 상(想)의 작용성/성질인데, 수(受)[객관/심상(心相-cittassa nimitta)]를 왜곡하여 무명(無明)을 생겨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의 완성은 누진(漏盡-āsavakkhaya)[누진통(漏盡通)/누진명(漏盡明)]으로 완성되는데, atakkāvacaro(딱까의 영역을 넘어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삶을 완성하여 ‘사실로서 온 자’인 여래의 근본 개념은 아라한입니다. 그리고 이런 완성은 중생 세상에 묶어두는 부정적 요소인 족쇄(saṃyojana)를 완전히 끊어낸 존재이기도 합니다.
(*) (AN 10.13-족쇄 경)
비구들이여, 이런 열 가지 족쇄가 있다. 무엇이 열인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오하분결(五下分結)]와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오상분결(五上分結)]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인가? 유신견(有身見), 의심, 계금취(戒禁取), 소유의 관심, 진에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이다.
무엇이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인가? 색탐(色貪), 무색탐(無色貪), 자기화, 들뜸, 무명(無明)이다. 이것이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열 가지 족쇄가 있다.
2. 정등각(正等覺-sammāsambuddha) ― 스스로(sam) 완전한(sammā) 깨달음을 성취한 자(buddha)
bujjhati pr. knows; understands; is aware (of)
sambujjhati pr. understands clearly, knows perfectly
sammāsambujjhati 없음
buddha 1 masc. Buddha; Awakened One. 2 pp. awakened; woke up; understood
sambuddha 1 masc. Awakened One; Buddha; who is wide awake; who has completely understood. 2. pp. fully understood; completely comprehended; awakened; enlightened
; saṃ + buddha ⇒ saṃ 3.1 ind. own; personal; self. saṃ 1.1 prefix. together; with
; sa- ①②prefix. with; having; affected with (=saha) with; together (with); accompanied (by)
• sammāsambuddha masc. perfectly awakened one; fully enlightened being
• satthā ca loke udapādi arahaṃ sammāsambuddho 아라한이고 정등각인 스승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DN 29-정신 경)에서 부처님은 자신의 출현을 ‘아라한이고 정등각인 스승이 세상에 출현하였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가르치는 내용 즉 법(法-dhamma)에 대해서도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고 가라앉음으로 이끌고 정등각에 의해 선언되었다(dhammo ca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라고 선언합니다.
; 아라한이고 정등각인 스승(satthā arahaṃ sammāsambuddho)
또한, 이 법의 실천 즉 범행(梵行-brahmacariyā)의 완성에 대해서도 말하는데, 스승과 법의 요소가 갖추어졌다 해도 그것만으로 범행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인 스승뿐 아니라 성취되고, 훈련되고, 자신감을 가지고, 유가안온(瑜伽安穩)을 얻었고, 바른 법을 잘 설할 수 있고, 다른 가르침이 생겼을 때 바른 법으로 잘 억제한 뒤에 비범(非凡)한 법을 설할 수 있는 제자인 장로 비구-중진 비구-신진 비구-장로 비구니-중진 비구니-신진 비구니와 흰옷을 입은 재가 제자로서 범행을 실천하는 남신자-소유하고자 하는 남신자-범행을 실천하는 여신자-소유하고자 하는 여신자로 구성되는 제자들이 있어야 하고, 그들에 의해 범행이 번성하고 풍부하고 널리 알려지고 사람들이 많고 널리 퍼져서 신과 인간들에게 잘 알려지고, 최상의 얻음과 최상의 명성을 성취하면, 그때 그 범행이 완성된다고 하여 스승과 법과 제자들 그리고 사회에서의 역할이 확보될 때 그 완성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 자신을 세상에 출현한 아라한-정등각인 현재의 스승이어서 장로인 스승이라고 직접 소개합니다.
이때, 이 법의 완전성에 대한 표현이 소개되는데, ‘보면서 보지 못한다(‘passaṃ na passatī’ti).’입니다. 완전함은 있어서 보이지만, 더할 바 뺄 바는 없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 「‘이렇게 모든 조건을 구족하고, 모든 조건을 완성하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지고, 오로지 완성된 범행(梵行)을 잘 드러내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본다. ‘이것을 제거해야 이렇게 그것이 더 청정해질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 ‘이것을 더해야 그것이 완성될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보지 못한다.」
3. 명행족(明行足-vijjācaraṇasampanna) ― (DN 3-암밧타 경)과 (MN 53-유학 경)은 명(明)과 행(行) 그리고 명행족을 정의합니다.(vijjāsampanno itipi caraṇasampanno itipi vijjācaraṇasampanno itipi.)(250704 수정)
1) (DN 3-암밧타 경)
• 행(行-caraṇa) ― 계목(戒目)의 단속-유익한 몸과 말의 업-청정한 생활-계를 갖춤-기능들에서 문을 보호-사띠와 바른 앎을 갖춤-만족-장애를 버리고 삼매에 듦 → 초선(初禪)-제2선-제3선-제4선을 성취하여 머묾
• 명(明-vijjā) ― 지견(知見)-의성신(意成身)-신족통(神足通)-천이통(天耳通)-타심통(他心通)-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누진통(漏盡通)
2) (MN 53-유학 경)
• 행(行-caraṇa) ― 계(戒)를 갖춤-기능들에서 문을 보호함-음식의 적당량을 앎-깨어있음의 실천-일곱 가지 정법(正法)을 갖춤 →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위한 높은 심인 네 가지 선을 원하는 대로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게 얻음
• 명(明-vijjā) ― 숙주명(宿住明)-천안명(天眼明)-누진명(漏盡明)
3) (SN 7.7-숟디까 경) ― 명행족 = 청정한 자
“na brāhmaṇo sujjhati koci, loke sīlavāpi tapokaraṃ.
vijjācaraṇasampanno, so sujjhati na aññā itarā pajā”ti.
비록 세상에서 계를 중시하고 고행을 하더라도(종교적 삶을 살더라도) 바라문은 아무도 청정하지 않습니다. 명행족(明行足), 그가 청정합니다. 다른, 그 외의 사람은 아닙니다.
4) 명행족의 게송① ― (DN 3-암밧타 경)/(DN 27-처음에 대한 앎 경)/(MN 53-유학 경)/(SN 6.11-사낭꾸마라 경)/(SN 21.11-마하깝삐나 경)/(AN 11.10-모라니와빠 경)
‘khattiyo seṭṭho janetasmiṃ, ye gottapaṭisārino.
vijjācaraṇasampanno, so seṭṭho devamānuse’ti.
‘가문을 의지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끄샤뜨리야가 으뜸이고
신과 인간들 가운데서는 명행족(明行足), 그가 으뜸이다.’라고.
4) 명행족의 게송② ― (SN 7.8-악기까 경)
“pubbenivāsaṃ yo vedī, saggāpāyañca passati.
atho jātikkhayaṃ patto, abhiññāvosito muni.
이전의 존재 상태를 아는 분, 천상과 지옥을 보는 분
그리고 태어남의 부서짐을 성취한 분, 실다운 지혜로 완성한 성자.
“etāhi tīhi vijjāhi, tevijjo hoti brāhmaṇo.
vijjācaraṇasampanno, somaṃ bhuñjeyya pāyasan”ti.
이런 세 가지 명(明)에 의해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이 됩니다.
명행족(明行足), 그가 이 우유죽을 먹을 수 있습니다.
; (AN 3.59-띠깐나 경)/(AN 3.60-자눗소니 경)은 명행족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이 게송을 통해 삼명을 갖춘 바라문을 말합니다.
; (SN 7.13-데와히따 경)도 명행족을 직접 말하지 않으면서 첫 번째 게송을을 소개하는데, 보시가 여기에 주어져야 함을 말합니다.
4. 선서(善逝-sugata)
선서(善逝-sugata)는 세존(世尊-bhagavā)과 함께 여래를 지시하는 보편적 호칭이어서 개별적 용례를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①세상에서 (열반으로) 잘 가신 분이면서 ②(뒤따르는 사람들에게) 진리의 길 보이신 분의 양면의 용례를 볼 수 있습니다.
1) (SN 38.3-법을 설파한 자에 대한 질문 경)은 탐-진-치가 버려지고 뿌리 뽑히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된 분이 세상에서 (열반으로) 잘 가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2) (SN 3.1-젊은이 경) 등에서 붇다를 ‘세존(bhagavā) 그리고 스승(satthā)인 선서(sugato)’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세상에서 (열반으로) 잘 가신 분이면서 동시에 앞서 가 확인한 진리의 길을 이끄는 스승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3) 이외에 경 제목에 선서가 들어가는 (AN 4.160-선서의 율 경)을 주목해야 하는데, 선서 즉 붇다와 제자들의 역할 분담을 주제로 합니다.
이때, 붇다의 역할은 법을 설하고 범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katamo ca, bhikkhave, sugatavinayo? so dhammaṃ deseti ādikalyāṇaṃ majjhekalyāṇaṃ pariyosānakalyāṇaṃ sātthaṃ sabyañjanaṃ, kevalaparipuṇṇaṃ parisuddhaṃ brahmacariyaṃ pakāseti. ayaṃ, bhikkhave, sugatavinayo. evaṃ sugato vā, bhikkhave, loke tiṭṭhamāno sugatavinayo vā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nti.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선서(善逝)의 율(律)인가? 그는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고, 온전하게 완전하고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선서(善逝)의 율(律)이다. 이렇게, 비구들이여, 선서(善逝)와 선서(善逝)의 율(律)은 많은 사람의 이익과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연민하기 위하여, 신과 인간의 번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에 존재한다.
이어서 정법(正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네 가지와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네 가지를 제시하는데, 제자들의 역할입니다.
첫째, 부처님이 설하신 ‘처음도 좋고 중간에도 좋고 끝도 좋은, 의미를 갖추고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신 그대로 ‘음절과 단어가 잘 배열되어 잘 구성된 경들’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배움의 대상이 되는 경들이 설하신 그대로를 벗어나면 부처님의 역할로써 설해진 가르침이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유연하고 원만하게 하는 법들을 갖추고 인내하고 이어지는 가르침을 바르게 붙잡아야 하는데, 특히, (MN 15-미루어 생각함 경)은 원만하게 하는 법(↔모나게 하는 법)에 초점을 두고 이 역할을 설명합니다. 설하신 그대로 바르게 배운 제자들의 삶은 이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배우고 계승한 그대로 진지하게 경을 남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죽은 뒤에도 경들은 뿌리가 잘리지 않아 의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선배들부터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풍족하게 살지 않고, 해이하지 않으며, 들어갈 때는 짐을 내려놓고, 여읨에서는 앞서가야 합니다. 그렇게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실현하지 못한 것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배들도 선배를 본받아 모범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때, ‘풍족하게 살지 않고, 해이하지 않고, 들어갈 때는 짐을 내려놓고, 여읨에서는 앞서가는 것’은, (MN 3-법(法)의 후계자 경)이 말하는, 스승이 홀로 머무실 때 제자들이 떨침을 이어서 공부하는 것의 일환이어서 이런 제자는 칭찬받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의 역할은 네 가지로 제시되는데, 제자들이 역할에 충실하면 정법(正法)은 혼란하지 않게 되고 사라지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AN 4.160-선서의 율 경)이 제시하는 제자의 역할은 (AN 5.156-정법을 혼란스럽게 함 경3)에서는 ⑤상가의 화합을 포함한 다섯 가지로 제시됩니다.
5. 세간해(世間解-lokavidū)
1) 세상의 끝을 아는 현명한 자 ― (SN 2.26-로히땃사 경)/(AN 4.45-로히땃사 경)/(AN 4.46-로히땃사 경2)
“gamanena na pattabbo, lokassanto kudācanaṃ.
na ca appatvā lokantaṃ, dukkhā atthi pamocanaṃ.
걸어감에 의해 닿아지지 않지만, 세상의 끝은 언제 어느 때나 있다.
세상의 끝에 닿은 뒤에 괴로움에서 벗어남은 있다.
“tasmā have lokavidū sumedho,
lokantagū vusitabrahmacariyo.
lokassa antaṃ samitāvi ñatvā,
nāsīsati lokamimaṃ parañcā”ti.
그러므로 세상의 끝에 도달하고 범행을 완성한 현명한 자, 세간해(世間解)는
스스로 완전히 평화로운 자는 세상의 끝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도 저세상도 갈망하지 않는다.“
2) 현명한 자, 모든 법에 대해 그것에서 생겨나지 않는 성자 ― (AN 3.40-지배 경)
“natthi loke raho nāma, pāpakammaṃ pakubbato.
attā te purisa jānāti, saccaṃ vā yadi vā musā.
악업을 지은 자에게, 참으로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사람아, 그대의 행위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그대가 안다.
“kalyāṇaṃ vata bho sakkhi, attānaṃ atimaññasi.
yo santaṃ attani pāpaṃ, attānaṃ parigūhasi.
“passanti devā ca tathāgatā ca,
lokasmiṃ bālaṃ visamaṃ carantaṃ.
사람아, 선(善)을 마주해서는 자신을 등한시하고
자기에게 악함이 있을 때는 자신을 숨기는 사람
세상에서 어리석은 자의 고르지 못한 행위를 신도 여래도 본다.
tasmā hi attādhipateyyako ca,
lokādhipo ca nipako ca jhāyī.
그러므로 자신을 지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신중하고 선(禪)을 닦는다.
“dhammādhipo ca anudhammacārī,
na hīyati saccaparakkamo muni.
pasayha māraṃ abhibhuyya antakaṃ,
yo ca phusī jātikkhayaṃ padhānavā.
so tādiso lokavidū sumedho,
sabbesu dhammesu atammayo munī”ti. dasamaṃ.
법을 지배하는 자는 법을 따라 행한다.
진리를 위해 노력하는 성자는 퇴보하지 않는다.
노력을 다하는 자는 마라를 극복하고
죽음을 정복하여 태어남의 부서짐을 얻는다.
그렇게 그 현명한 자, 세간해(世間解)는
모든 법에 대해 그것에서 생겨나지 않는 성자이다.
6.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anuttaro purisadammasārathi)
1) (AN 4.111-께시 경)
“bhagavā pana, bhante,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kathaṃ pana, bhante, bhagavā purisadammaṃ vinetī”ti? “ahaṃ kho, kesi, purisadammaṃ saṇhenapi vinemi, pharusenapi vinemi, saṇhapharusenapi vinemi. tatridaṃ, kesi, saṇhasmiṃ — iti kāyasucaritaṃ iti kāyasucaritassa vipāko, iti vacīsucaritaṃ iti vacīsucaritassa vipāko, iti manosucaritaṃ iti manosucaritassa vipāko, iti devā, iti manussāti. tatridaṃ, kesi, pharusasmiṃ — iti kāyaduccaritaṃ iti kāyaduccaritassa vipāko, iti vacīduccaritaṃ iti vacīduccaritassa vipāko, iti manoduccaritaṃ iti manoduccaritassa vipāko, iti nirayo, iti tiracchānayoni, iti pettivisayo”ti.
그런데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십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길들이십니까?“ ”께시여, 나는 사람을 부드럽게 길들이기도 하고, 거칠게 길들이기도 하고, 부드럽고 거칠게 길들이기도 한다. 거기서, 께시여, 이것이 부드러운 길들임이다. ― ‘이렇게 몸의 좋은 행위가 있고, 이렇게 몸의 좋은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말의 좋은 행위가 있고, 이렇게 말의 좋은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의(意)의 좋은 행위가 있고, 이렇게 의(意)의 좋은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신(神)들이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있다.’라고.
거기서 께시여, 이것이 거친 길들임이다. ― ‘이렇게 몸의 나쁜 행위가 있고, 이렇게 몸의 나쁜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말의 나쁜 행위가 있고, 이렇게 말의 나쁜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의(意)의 나쁜 행위가 있고, 이렇게 의(意)의 나쁜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지옥이 있고, 이렇게 축생의 모태가 있고, 이렇게 아귀의 영역이 있다.’라고.
“tatridaṃ, kesi, saṇhapharusasmiṃ — iti kāyasucaritaṃ iti kāyasucaritassa vipāko, iti kāyaduccaritaṃ iti kāyaduccaritassa vipāko, iti vacīsucaritaṃ iti vacīsucaritassa vipāko, iti vacīduccaritaṃ iti vacīduccaritassa vipāko, iti manosucaritaṃ iti manosucaritassa vipāko, iti manoduccaritaṃ iti manoduccaritassa vipāko, iti devā, iti manussā, iti nirayo, iti tiracchānayoni, iti pettivisayo”ti.
거기서 께시여, 이것이 부드럽고 거친 길들임이다. ― ‘이렇게 몸의 좋은 행위가 있고, 이렇게 몸의 좋은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몸의 나쁜 행위가 있고, 이렇게 몸의 나쁜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말의 좋은 행위가 있고, 이렇게 말의 좋은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말의 나쁜 행위가 있고, 이렇게 말의 나쁜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의(意)의 좋은 행위가 있고, 이렇게 의(意)의 좋은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의(意)의 나쁜 행위가 있고, 이렇게 의(意)의 나쁜 행위의 보(報)가 있다. 이렇게 신(神)들이 있고, 이렇게 사람들이 있고, 이렇게 지옥이 있고, 이렇게 축생의 모태가 있고, 이렇게 아귀의 영역이 있다.’라고.”
“sace te, bhante, purisadammo saṇhena vinayaṃ na upeti, pharusena vinayaṃ na upeti, saṇhapharusena vinayaṃ na upeti, kinti naṃ bhagavā karotī”ti? “sace me, kesi, purisadammo saṇhena vinayaṃ na upeti, pharusena vinayaṃ na upeti, saṇhapharusena vinayaṃ na upeti, hanāmi naṃ, kesī”ti. “na kho, bhante, bhagavato pāṇātipāto kappati. atha ca pana bhagavā evamāha — ‘hanāmi, naṃ kesī’”ti! “saccaṃ, kesi! na tathāgatassa pāṇātipāto kappati. api ca yo purisadammo saṇhena vinayaṃ na upeti, pharusena vinayaṃ na upeti, saṇhapharusena vinayaṃ na upeti, na taṃ tathāgato vattabbaṃ anusāsitabbaṃ maññati, nāpi viññū sabrahmacārī vattabbaṃ anusāsitabbaṃ maññanti. vadho heso, kesi, ariyassa vinaye — yaṃ na tathāgato vattabbaṃ anusāsitabbaṃ maññati, nāpi viññū sabrahmacārī vattabbaṃ anusāsitabbaṃ maññantī”ti.
“만약, 대덕이시여, 세존께서 사람을 부드럽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고, 거칠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고, 부드럽고 거칠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으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십니까?” “만약, 께시여, 내가 사람을 부드럽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고, 거칠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고, 부드럽고 거칠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으면, 그 사람을 죽인다.” “대덕이시여, 세존에게 생명을 해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존께서 ‘께시여, 나는 그들을 죽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이다, 께시여. 여래에게 생명을 해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부드럽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고, 거칠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고, 부드럽고 거칠게 길들여도 길들지 않는 사람에게 여래는 말해야 한다거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말해야 한다거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성스러운 율에서, 께시여, 여래가 말해야 한다거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현명한 동료수행자들도 말해야 한다거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죽임당한 것이다.”
2) (MN 137-육처(六處) 분석 경)
‘cha ajjhattik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bāhirāni āyatanāni veditabbāni, cha viññāṇakāyā veditabbā, cha phassakāyā veditabbā, aṭṭhārasa manopavicārā veditabbā, chattiṃsa sattapadā veditabbā, tatra idaṃ nissāya idaṃ pajahatha, tayo satipaṭṭhānā yadariyo sevati yadariyo sevamāno satthā gaṇamanusāsitumarahati, so vuccati yoggācariyānaṃ anuttaro purisadammasārathī’ti — ayamuddeso saḷāyatanavibhaṅgassa.
육내입처(六內入處)는 알려져야 한다. 육외입처(六外入處)는 알려져야 한다. 육식(六識)의 모임은 알려져야 한다. 육촉(六觸)의 모임은 알려져야 한다. 열여덟 가지 의(意)의 행보(行步)는 알려져야 한다. 서른여섯 가지 중생의 발길은 알려져야 한다. 거기서 이것을 의지하여 이것을 버려라. 성자가 실천하는 세 가지 염처(念處)가 있으니 그것을 실천한 성자는 스승이 되어 무리를 지도할 수 있다. 그는 실천행(實踐行)을 위한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라고 불린다. — 이것이 육처의 분석에 대한 요약이다.
7. 천인사(天人師-satthā devamanussānaṃ) ― 개별 용례 없음
8. 불(佛-buddha) ― 왜 불(佛)인가? ⇒ 「Ⅰ. 붇다는 누구인가?」 참조
9. 세존(世尊-bhagavā) ― 여래를 지시하는 보편적 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