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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2) 사실

제3-3장 두 단계의 깨달음과 예류자(수업 교재)

1 395 2025.09.10 19:21

제3-3장 두 단계의 깨달음과 예류자


「삶이 지(知)와 견(見)의 관점에서 설명되면,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남으로 완성되는 삶의 향상도 이렇게 지와 견의 관점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1차적으로 takka 밖의 현상의 영역에서 지와 견을 제어하고, 그 토대 위에서 2차적으로 takka 안의 사실의 영역에서 지와 견을 제어함으로 완성되는데, 1차적 제어의 완성은 여실지견(如實知見-yathābhūtañāṇadassana)이고, 2차적 제어의 완성은 해탈지견(解脫知見-vimuttiñāṇadassana) 즉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uttari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a)의 완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어는 지혜(paññā)의 성숙을 통해 완성되는데, 바른 삼매를 닦는 과정에서 첫 단계 깨달음인 여실지견에 해당하는 ①실다운 지혜(abhiññā)와 깨달음의 완성인 해탈지견에 해당하는 ②완전한 지혜(pariññā)로 성숙합니다.


• 실다운 지혜(abhiññā) ‒ 행(行)들에 대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실다움

• 완전한 지혜(pariññā) ‒ 열반에 대한 락(樂)-무아(無我)의 완전함


지혜의 이런 성숙 과정은 (SN 22.59-무아상 경) 등과 대응하여 이해할 수 있는데, 실다운 지혜(abhiññā)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이렇게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의 과정에 의한 여실지견을 지시하고, 완전한 지혜(pariññā)는 ‘염오-이탐-소멸’ 또는 ‘염오-이탐-해탈’의 과정에 의한 해탈지견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의 성숙은 깨달음을 예류자(預流者)와 아라한(阿羅漢)의 두 단계로 설명하게 하는데, ①행들에 대한 지견을 갖추어 (삼매의 제약 위에서) 행들의 영역에서 사실에 들어맞는 삶이 실현된 경지(존재의  실상 = 예류자)와 ②열반에 대한 지견(해탈의 흔들리지 않음-태어남의 끝-다음의 존재 없음)을 갖추어 (삼매의 제약을 해소하고 일상에서 사실에 들어맞는) 행들의 영역에서 벗어난 해탈된 삶이 실현된 경지(존재의 소멸 = 아라한)입니다. 


이 경지는 삼매의 힘으로 상(想)의 작용성인 번뇌를 억압한 경우[사념처(四念處)]와 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에 의한 작용성의 해소의 경우[사마타-위빳사나]입니다



[1] 「두 단계의 깨달음 ‒ 예류자(預流者)와 아라한(阿羅漢)」


※ 이 주제는 ‘주제의 확장(AN-26) - 「두 단계의 깨달음 ‒ 예류자(預流者)와 아라한(阿羅漢)」’의 요약입니다. nikaya.kr에서 ‘주제의 확장(AN-26)’으로 검색하면 상세한 자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완성을 지칭하는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가 있는데, 보통은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비구는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입니다.


1. 두 단계의 깨달음 ‒ 예류자(預流者)와 아라한(阿羅漢)


그런데 깨달음의 경지를 두 단계로 구분하여 나타내는 표현이 있습니다.


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yathābhūtaṃ pajānāti)

②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


이때,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은 예류자의 경지이고,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은 아라한의 경지입니다. 


• (DN 1-범망경)/(SN 22.109-예류자경)/(SN 22.110-아라한 경)/(SN 23.7-예류자 경)/(SN 23.8-아라한 경)/(SN 35.103-우다까 경)[예류자를 높은 앎을 성취한 자(vedagū)로, 아라한을 일체승자(sabbajī)로 표현]/(SN 38.5-안식 경)/(SN 38.6-최상의 안식(安息) 경)/(SN 48.2-예류자 경1)/(SN 48.4-아라한 경1)/(SN 48.3-예류자 경2)/(SN 48.5-아라한 경2)/(SN 48.26-예류자 경)/(SN 48.27-아라한 경)/(SN 48.32-예류자 경)/(SN 48.33-아라한 경)


• 예류자(預流者) -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자 → 높은 앎을 성취한 자 → 안식을 얻은 자


• 아라한(阿羅漢) -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한 자 → 일체승자 → 최상의 안식을 얻은 자


2.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두 단계로 설명하는 경전들 ‒ (AN 3.12-기억해야 하는 것 경)/(AN 3.24-아주 유용함 경)/(AN 3.25-금강석 같음 경)/(AN 3.13-꿈꾸는 사람 경)


(AN 3.12-기억해야 하는 것 경)과 (AN 3.24-아주 유용함 경)은 세 가지를 비교하게 해줍니다.


• 끄샤뜨리야 왕이 기억할 곳 - ①태어난 곳, ②왕이 된 곳, ③최고 지도자가 된 곳

• 비구가 기억할 곳 - ①출가한 곳, ②사성제를 꿰뚫어 안 곳, ③아라한 된 곳


• 어떤 사람에게 크게 도움 되는 것 - ①삼보에 귀의한 것, ②사성제를 꿰뚫어 안 것, ③아라한 된 것


⇒ 삶의 향상의 두 단계 - ①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 ②아라한 되는 것


이때 각각의 세 가지를 재배열하면 「태어난 곳-출가한 곳-귀의한 것, 왕이 된 곳-사성제를 꿰뚫어 안 곳-사성제를 꿰뚫어 안 것, 최고 지도자가 된 곳-아라한 된 곳-아라한 된 것」의 연결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구가 출가한 곳과 어떤 사람이 삼보에 귀의한 것은 크샤뜨리야 왕의 태어난 곳과 견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출가 또는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신자로서의 새로운 태어남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어서 왕이 되는 것과 견주어지는 것은 사성제를 꿰뚫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은 완결이므로 논의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성제를 꿰뚫음’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관식을 거쳐 왕이 되는 것에 비유되는 의미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과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의 용례 분석은 ‘사성제를 꿰뚫음’이 예류자인 것을 알려줍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AN 3.25-금강석 같음 경)은 


1) 두 단계의 깨달음을 말해줍니다. 사성제를 꿰뚫은 자로서의 예류자와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의 경전들과 같은 주제의 경입니다. 


2) 예류자 ‒ 사성제를 꿰뚫음을 ‘마치 눈을 가진 자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번갯불로 형상을 보듯이’라고 비유함으로써 법안(法眼)을 얻음을 말해주는데, 무엇보다도 바른 삼매에 들어있는 제한된 시간(번갯불이 번쩍이는 시간) 동안의 여실지견이라는 점을 확인해 줍니다.


3) 아라한 ‒ 심해탈-혜해탈의 실현을 ‘보석이건 돌이건 금강석으로 부수지 못할 것이 없듯이’라고 비유함으로써 완성된 깨달음을 나타냅니다. 


(*) 대승불교의 금강(金剛) 즉 금강경 등에서 쓰이는 금강의 근거가 되는 경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 삶의 향상의 두 단계 - ①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 ②아라한 되는 것 = ①삼매의 제약 위에서의 깨달음, ②일상에서의 깨달음 


한편, (AN 3.13-꿈꾸는 사람 경)은 꿈이 없는 사람과 꿈꾸는 사람과 꿈에서 벗어난 사람의 비유로써 깨달음의 과정을 다시 설명하는데, 계를 경시하는 자여서 깨달음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과 계를 중시하는 자여서 깨달음을 기대하는 사람 그리고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다.

 

⇒ 삶의 향상의 두 단계 - ①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 ②아라한 되는 것 = ①삼매의 제약 위에서의 깨달음, ②일상에서의 깨달음 = ①꿈꾸는 사람, ②꿈에서 벗어난 사람


이렇게 이 네 개의 경은 깨달음을 비유를 통해 예류자와 아라한의 두 단계로 설명합니다.


3. 그러면 부처님은 왜 사쌍(四雙)의 성자 가운데 예류자와 아라한만을 언급하는 것입니까? 예류자가 가지는 두 가지 특징을 통해 이해해 보았습니다.


1) 특징1. 예류자 – 대부분 괴로움은 멸진-해소되어 남아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음


(SN 56.49-산의 왕 시네루 경1)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산의 왕 시네루에 7개의 완두콩만한 자갈을 올려놓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올려놓은 7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과 산의 왕 시네루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가?」


라는 비유를 통해 견해를 갖추고 실현한 성스러운 제자 즉 예류자에게는 대부분 괴로움이 다하고 소진되어 남아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고 말합니다. 예류자의 삶이 얼마나 행복(불만족의 해소)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진리 상윳따의 이어지는 11개의 경(SN 56.50~60)은 비유를 달리하면서 동일한 내용을 설하고 있는데, 예류자의 경지에 대한 강조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SN 13-관통 상윳따)도 동일한 내용을 다른 비유로써 설명하는데, 11개 경전 중 10개(SN 13.1~10)은 「법의 관통은 이렇게 큰 이익이고, 법을 얻음은 이렇게 큰 이익이다.」고 합니다(*). 


(*) 이어지는 1개의 경전(SN 13.11-산 경3)은 「견해를 갖춘 사람은 이렇게 큰 성취가 있고, 이렇게 큰 실다운 지혜를 가졌다.」라고 설합니다.


2) 특징2. 예류자 - 깨달음이 보장된 자리


(SN 13.1-손톱 끝 경)~(SN 13.11-산 경3)은 


이처럼, 비구들이여, 견해를 갖추고 실현한 성스러운 제자에게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있는 것은 적다. 최대 일곱 번의 태어남은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이전의 괴로움 무더기와 비교하여 16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160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160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 하고, (SN 15.10-사람 경)은 


“yato ca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ukkhaṃ dukkhasamuppādaṃ, dukkhassa ca atikkamaṃ.

ariyaṃ caṭṭhaṅgikaṃ maggaṃ, dukkhūpasamagāminaṃ.


고(苦)와 고의 자라남과 고의 극복

그리고 고의 가라앉음으로 이끄는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바른 지혜로 볼 때


“sa sattakkhattuṃparamaṃ, sandhāvitvāna puggalo.

dukkhassantakaro hoti, sabbasaṃyojanakkhayā”ti. dasamaṃ.


그 사람은 최대 일곱 번을 옮겨간 뒤에

모든 족쇄가 부서져 괴로움을 끝낸다.


라고 하여, 예류자에게는 최대 일곱 번의 태어남만이 남아있다고 알려줍니다. 즉 일곱 번의 윤회하는 삶 이내에 아라한을 성취하여 여덟 번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류자를 성취하였다는 것은 이렇게 아라한을 보장받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일래자(一來者)나 불환자(不還者)에 비해 예류자(預流者)를 특히 더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두 단계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일단 예류자까지만 도달하면 아라한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SN 56.3-좋은 가문의 아들 경1)은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사성제(四聖諦)의 있는 그대로의 관통을 위해서였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할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사성제의 있는 그대로의 관통을 위해서일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현재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사성제의 있는 그대로의 관통을 위해서이다.


라고 하여 출가의 목적을 예류자의 성취로 제시하는데, (SN 56.4-좋은 가문의 아들 경2), (SN 56.5-사문바라문 경1), (SN 56.6-사문바라문 경2) 등에서도 유사하게 설명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류자가 되면 아라한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예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는 퇴보하지 않음에 의해 보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깨달음을 두 단계로 제시합니다.


※ 1단계의 깨달음 : 예류자 – 해탈된 삶을 향해 벗어남의 길에 오른 수행자 ; 사념처 → 여실지견


    2단계의 깨달음 : 아라한 – 해탈된 삶의 실현 ; 사마타-위빳사나 → 해탈지견


4. 여실지견 → 염오-이탐-소멸 또는 해탈


이렇게 예류자의 경지를 지시하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은 (SN 22-온(蘊) 상윳따)의 여러 경들을 중심으로 다시 서술됩니다. 


(SN 22.59-무아상 경) 등은 오온(五蘊) 각각에 대해 ①무아(無我)를 선언하고, ②무상(無常)과 고(苦)에 대한 동의에 이어 ③「‘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라고 하여 여실지견을 이끕니다. 그리고 경은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수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상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행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는 자는 이탐한다. 이탐으로부터 해탈한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하여 깨달음의 과정을 이어서 말해줍니다.


경은 이렇게


• 예류자 -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자

• 아라한 -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한 자


의 구체적 의미를 알려줍니다. 즉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예류자는 오온 즉 행들의 무상-고-무아를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이고,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한 아라한은 염오-이탐-소멸[해탈]의 과정을 통해 집착 없는 삶의  완성 즉 열반을 실현한 자인 것입니다.



◐ [참고] dhammacakkhu[법안(法眼)]의 두 가지 용례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예류자를 설명하는 용어로는 법안(法眼-dhammacakkhu)도 있습니다. 그런데 법안은 두 가지 동사와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1. dhammacakkhuṃ uppajjati


이때 uppajjati는 to be born; arises인데, ‘법안이 생기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과거형인 udapādi로 나타나는데 arose; originated. (aor. of udapajjati)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특별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유형의 dhammacakkhu는


dhammacakkhuṃ udapādi ‒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n”ti.


‘자라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법안(法眼)이 생겼다.


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가르침이 설해지면 가르침에 의해 법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2. dhammacakkhupaṭilābho


이때 paṭilābho는 attainment; acquisition; obtaining.인데, ‘법안을 얻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SN 13-관통 상윳따)에서 발견됩니다.(SN 13.1~SN 13.10)


evaṃ mahatthiyo kho, bhikkhave, dhammābhisamayo; evaṃ mahatthiyo dhamma-cakkhupaṭilābho””ti.


비구들이여, 법의 관통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고, 법안을 얻음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다.


3. 두 표현의 차이에 대한 이해


dhammacakkhuṃ udapādi는 꼰단냐 존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라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법안이 생겼다.」라는 말은 고멸의 가능성에 대한 공감이고, 고멸을 이끄는 스승 즉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dhammacakkhupaṭilābho(법안을 얻음)은 (SN 13-관통 상윳따)의 경들에서 ‘이제 최대 일곱 생만이 남아있다.’라고 언급함으로써 예류자인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법안이 생김(dhammacakkhuṃ udapādi)과 법안을 얻음(dhammacakkhu paṭilābho)은 다릅니다. 가르침을 통해 고멸의 가능성에 대한 공감 즉 믿음이 생긴 것으로의 법안이 생기면 이어지는 공부를 통해 무상-고-무아를 꿰뚫음으로써 법을 관통하고 여실지견한 예류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법안이 열림(dhammacakkhuṃ udapādi)을 예류도(預流道)를 얻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예류과에 이르는 과정의 성자라는 점에서 타당성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4. 예외적으로 dhammacakkhuṃ uppajjati가 나타나는 경은 (AN 3.95-사라다 경)인데, 법안이 생기는 것이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의 성취여서 법을 드러나게 하여 법의 위빳사나로 연결되는 과정의 경지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에 의해 법안이 생기면 법의 위빳사나에 의해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법안(法眼)을 얻어 예류자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이 생김 → 함께 견(見)이 생김 → 유신견(有身見)과 의심과 계금취(戒禁取)의 세 가지 족쇄가 버려짐 → 간탐과 진에의 두 가지 법을 제거하고 죽는다면, 이 세상으로 다시 오게 묶는 족쇄가 없음


• 법안(法眼)의 생김 =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 = 법(法)의 드러남

→ 견(見)이 생김 = 법(法)의 위빳사나 = 무상(無常)의 관찰 

→ 여실지견(如實知見) =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가 버려짐 = 예류자(預流者)

→ 욕탐(慾貪)-간탐-소유의 관심과 진에의 제거 = 불환자(不還者) = 이 세상으로 다시 오게 묶는 족쇄가 없음


; 이런 과정을 진행하는 그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무는 상태인데, 상수멸까지의 단계적 과정을 포함해서 이해하면, 삼매를 닦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성과를 법안(法眼)의 생김~불환자의 과정에 걸쳐 설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답글로 계속]

Comments

대원행 2025.09.14 21:26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3&wr_id=161 참조 ((특강 zoom 250910) 두 단계의 깨달음과 예류자[예류자(보장된 경지)-실다운 지혜(abhiññā)와 아라한-완전한 지혜(pariññ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