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입문(Ⅱ-사실) 여래는 이것을 깨닫고 실현하였다』 출판 소회 ―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행위적 앎(무아-개별성) ⇒ 인식론적 인격론(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51117)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GXrbHis93Wk
책 『불교입문(Ⅱ-소유) 여래는 이것을 깨닫고 실현하였다』를 마감하는 소회를 말하였습니다.
; 앎에 대한 특별한 관점 = 바라문교의 아는 자 보는 자인 아(我-우주적 통일성)를 대체하는 불교의 개념 → 무아(無我)인 앎(개별성) :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존재성(연기된 식) ―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앎 = 행위적 앎 ⇒ 인식론적 인격론
; 인식론적 인격론 ― 인식이 행위를 이끌면서 행위가 만드는 인격
; 인식론적 인격론으로의 불교 ― 앎의 성숙(알지 못하고 보지 못함 → 여실지견 → 해탈지견)으로 삶의 향상(인격의 완성 : 범부 → 예류자 → 아라한)을 실현하는 불교
;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하는 그것’ ― 「행위적 앎이라는 동질성 위에 자기 활동성으로의 차별」
◐ 아(我)와 무아(無我)의 포괄적 대응성(책 272쪽)◑
이 대답(*)에서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보는 자, 듣는 자, 생각하는 자, 아는 자 – 그것이 아트만(ātman)이다.”입니다. 보는 자이고 아는 자여서 감각-마음-의식의 근원이라는 관점 또는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감각·사유·지식의 주체라는 관점입니다.
(*) ‘우빠니샤드의 ātman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의 질문에 대한 ChatGPT의 대답
이 책에서는 행위적 앎(active knowing)과 앎의 자기 활동성(agency of knowing)의 측면으로 심-의-식 즉 마음을 서술하고 있는데, 우빠니샤드의 아(我-아뜨만-ātman)를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행위적 앎(知-ñāṇa)으로 대체한 것이 불교라고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타당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삶 즉 사는 이야기에 대한 완전한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아는 자-보는 자 또는 감각-마음-의식의 근원을 설명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我-아뜨만-ātman)가 아니라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연기(緣起)-무아(無我)적 앎이고(동질성), 또한,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행위적 앎이라는 특성에 의해 아는 자로의 식과 보는 자로의 심으로 구분되었다(차별성)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심-의-식의 동질성 위에 차별성」
결국 우빠니샤드와 불교의 차이는 개별적 존재의 삶의 본질을 불멸성-초월성-우주성과의 동일성(브라흐만=아뜨만)을 가지는 아(我-아뜨만-ātman)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연기(緣起)-무아(無我)의 개별적 앎으로 볼 것인지가 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자신의 성취를 atakkāvacara(딱까의 영역을 넘어섬) 즉 애가 형성되는 내적 영역에서 애멸을 실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인식-행위)하는 영역에서 아는 자-보는 자 또는 감각-마음-의식의 근원을 직접 확인하였기 때문(정등각-완전한 깨달음)에 그것이 완전히 보아내지 못한 우빠니샤드가 말하는 아(我-아뜨만-ātman)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 무아(無我)의 선언!
이것이 아(我)와 무아(無我)의 차이라고 하겠는데, 이 책에는 ①무아의 의미, ②심-의-식, ③지와 견의 주제에 적용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