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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2) 사실

불교입문(Ⅱ-사실-책 읽기 260204) 전통과 진정 6. 한역의 문제[2) 유위와 무위 & 제행과 일체 & 자기화(māna)…

0 191 02.04 17:21

▣ 불교입문(Ⅱ-사실-책 읽기 260204) 전통과 진정 6. 한역의 문제[2) 유위와 무위 & 제행과 일체 & 자기화(māna)와 자만(vidha)](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0k544wUuwfo

 

1. 어제 공부에서 살펴본 촉(觸)이 근-경-식 삼사화합으로 나타나는 교재가 아함이 아니라 구사론의 주석이라는 정리를 소개하였습니다. → 아함의 문제가 아니라 구사론의 문제


2.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 노자의 무위와 부처의 무위에서 삶의 완성이란 동질성 위에 삶의 완성에 대한 선언의 차이(무위자연과 탐-진-치 없는 삶)를 이해해야 함


; 무위(無爲)의 정의 ― (SN 43-무위 상윳따)의 경들 : 탐(貪)-진(嗔)-치(癡)가 부서진 상태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9&wr_id=1  


katamañca, bhikkhave, asaṅkhataṃ? yo, bhikkhave,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 idaṃ vuccati, bhikkhave, asaṅkhat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무위(無爲)인가? 비구들이여, 탐(貪)이 부서지고, 진(嗔)이 부서지고, 치(癡)가 부서진 것 ― 이것이, 비구들이여, 무위(無爲)라고 불린다.


⇒ 유위(有爲)는 탐(貪)-진(嗔)-치(癡)가 부서지지 않은 상태를 지시함.


3. 제행(諸行)과 일체(一切) 


sabbe saṅkhārā를 제행과 일체로 다르게 번역한 데서 오는 착시의 문제가 제행무상-제행개고-제법무아인 삼법인을 제행무상-제법무아-열반적정의 삼법인으로 설명하는 차이를 생겨나게 했다고 보아야 함


4. māna(자기화)와 vidha(자만)


; 「ahaṅkāramamaṅkāramāna (ahaṅ-kāra)-(mamaṅ-kāra)-(māna)를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라고 해석한 것과 같은 맥락의 주제 ― ‘kataññū katavedī’를 ‘만들어진 것[무상(無常)-무아(無我)-연기(緣起)]을 알고, 만들어진 것[무상(無常)-무아(無我)-연기(緣起)]을 경험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한 것 → 주제의 확장(AN-29) - 「pātubhāvo dullabho lokasmiṃ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출현」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265 

 

; māna의 개념과 번역어 선택(자만 → 자기화)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3&wr_id=305


; 애(愛)의 정의 & 존재화와 자기화 ― (AN 4.128-여래의 놀라움 경2)(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40704)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4&wr_id=109



◐ 본문


4.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는 각각 saṅkhata와 asaṅkhata의 한역입니다. 그리고 asaṅkhata가 탐-진-치가 부서진 상태(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라고 정의되기 때문에 saṅkhata는 탐-진-치가 함께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탐-진-치가 부서진 상태는 열반의 정의와 같기 때문에 asaṅkhata는 열반의 동의어입니다. 그렇다면 saṅkhata는 열반 아닌 것 즉 삼법인의 행과 같은 것입니다.


한역의 과정에서 도덕경의 무위를 asaṅkhata의 번역어로 선택하였는데, 삶의 완성을 지시하는 용어라는 점에서는 타당한 번역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영향 아래 있던 한역의 불교는 삶의 완성을 지시하는 것인 무위가 탐-진-치의 부서짐(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인 asaṅkhata라는 원전의 이해에 접근하기보다는 도덕경의 무위 사상으로 접근하게 되면서 가르침의 진정에서 멀어진 현상(정체성의 상실)을 볼 수 있습니다.


도덕경의 무위는 인간의 의지(의도)가 참여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인간의 의지(의도)는 삶의 골격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여를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의도 이전에 작용하는 탐-진-치가 부서져 무탐(무망)-무진-무치의 의도로써 삶이 진행되어 해탈된 삶을 사는 것이 불교의 무위입니다.


5. 제행(諸行)과 일체(一切)


제행(諸行-모든 행)은 sabbe saṅkhārā인데, 삼법인에서 sabbe saṅkhārā aniccā와 sabbe saṅkhārā dukkhā로 나타납니다. 이때, aniccā는 무상(無常)이고, dukkhā는 고(苦)입니다. 그래서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입니다.


sabbe는 sabba의 복수 남성/중성의 주격/목적격인데, 단수 주격은 sabbo(남성)-sabbaṃ(중성)이고, 단수 목적격은 남성/여성/중성 모두 sabbaṃ입니다.


일체(一切)는 (SN 35.23-일체 경)에서 sabbaṃ으로 소개되는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를 함께 지시하는 개념(십이처)의 한역입니다. 


그래서 제행(sabbe saṅkhārā)과 일체(sabbaṃ)는 지시하는 바가 다르다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제행과 일체가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바가 색-수-상-행-식 오온(오온과 십이처의 동치)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말할 수있지만, 제행은 행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이고, 일체는 오온 모두를 묶어서 지시하는 개념이어서 차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역 불교에서는 sabbe saṅkhārā aniccā와 sabbe saṅkhārā dukkhā를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일체개고(一切皆苦)로 번역하고 있어서 불필요한 고민을 만드는데, 반복을 피하는 한문의 경향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근본경전연구회는 이런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sabbe saṅkhārā dukkhā도 제행개고(諸行皆苦)로 번역하였습니다. → 삼법인(三法印) :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


6. māna와 vidha ⇒ 별책 : 「괴로움을 끝내기 위한 필수 요소 세 가지 ‒ Ⅲ」 참조


자만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는데, māna와 vidha입니다


māna는 자만(自慢)-교만-거만-오만-자부심 등으로 번역되었고, pride, conceit, arrogance 등으로 영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이 이 용어에 대한 적절한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māna는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 「ahaṅkāramamaṅkāramāna (ahaṅ-kāra)-(mamaṅ-kāra)-(māna)」


그래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그것을 부르는 용어로의 māna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물리침의 법(paṭivinītā) 또는 질의응답으로 설명한 부처님의 가르침(paṭipucchāvinītā)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아(我)로부터의 관찰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는 무아(無我)로부터의 관찰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은 아(我)로부터의 관찰자 즉 중생이고, māna는 아(我)로부터의 관찰자의 관찰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아(我)라는 전도된 상(想)-심(心)-견해에 의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라고 관찰하는 작용 = māna」


;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아(我)로부터의 관찰 = 존재화(bhavikā)

;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라는 관찰 = 자기화(māna)


; 딱까 → 존재화 → 욕탐 → 자기화 → 1차 인식 

 

한편, (AN 6.76-아라한의 경지 경)은 아라한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māna-omāna(열등의 māna)-atimāna(우월의 māna)-adhimāna(뽐냄의 māna)-thambha(완고)-atinipāta(비열)의 여섯 가지를 끊어야 한다고 합니다. māna를 포함하여 조성된 단어 세 가지(omāna-atimāna-adhimāna)가 함께 나타나는데, māna에 의해 나와 남을 만든 뒤 남들과의 관계로 확장된 개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만이라고 번역되는 빠알리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vidha인데, 「세 가지 자만(vidha) ― ‘내가 더 뛰어나다.’라는 자만(seyyohamasmīti vidhā), ‘나와 동등하다.’라는 자만(sadisohamasmīti vidhā), ‘내가 더 못하다.’라는 자만(hīnohamasmīti vidh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māna - vidhā]를 동의어로 보지는 않아야 합니다. (SN 18.22-제거 경)은

 

“kathaṃ nu kho, bhante, jānato kathaṃ passato imasmiṃ 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pagataṃ mānasaṃ hoti vidhā samatikkantaṃ santaṃ suvimuttan”ti?


라고 묻는 데, 이때 (ahaṅ-kāra)-(mamaṅ-kāra)-(māna)-(apagataṃ)의 māna와 vidhā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라고 자신을 만드는 작용인 māna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만나면서 남들과의 관계에서 '더 뛰어나다-동등하다-더 못하다'라는 비교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vidha인 것 같습니다. 또한, (AN 6.76-아라한의 경지 경)이 말하는 omāna-atimāna-adhimāna는 māna라는 기본 의미의 용어가 남들과의 관계로 확장된 개념의 용어들이라는 점에서 vidha와 유사성이 발견되기 때문에 māna와 vidha는 함께 검토되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을 통해 māna는 기존의 번역과 다르게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로, vidhā는 자기화된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으로의 ‘자만’이라고 기존의 번역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AN 6.76-아라한의 경지 경)의 네 가지는 자기화-열등의 자기화-우월의 자기화-뽐냄의 자기화가 되고, (SN 18.22-제거 경)의 문장은 


“대덕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의(意)는 식(識)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에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를 제거하고, 자만을 넘어섭니까, 평화롭게 잘 해탈합니까?” 


라고 번역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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