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입문(Ⅱ-사실-책 읽기 260304) (제2부 총론) 제2장 딱까 Ⅰ.여래가 성취한 법 [1]딱까 ― 愛의 형성 과정[무명과 애의 관계 & 내면의 영역]](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Od11H7t8Xk
몸에 구속된 중생 → 맛지마니까야 관통법회 - 23. 개미집 경[개미집 비유 & 꾸마라깟사빠-원초적 바른 견해](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10421)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3_03&wr_id=3
존재(bhava) → 존재에서 벗어남(vibhava) → 비존재(abhava-존재 상태를 넘어섬-존재의 소멸)
무명과 애 ― 몸으로 감의 여부 & 무명에 덮이고 애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
무명과 애의 관계를 알려주는 두 개의 비유 ― ①집에서 기르는 짐승 수컷(소망과 탐=애)과 암컷(무명), ②애는 화살이고 무명은 독을 가진 결점
; 맛지마니까야 관통법회 - 19.두 부분의 생각 떠오름(위딱까) 경[위딱까의 이해](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10317)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2_09&wr_id=3
;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05. 수낙캇따 경[지나친 자기화 - 어떤 경지로 기운 사람(흔들리지 않는 경지) - 독화살의 비유](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30906)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1_05&wr_id=8
애(愛)에서 출발하는 십지연기(十支緣起) → 무명에서 출발하는 십이연기(十二緣起)
딱까 = 마음 혼자 인식하고 행위하는 내면의 영역 = 애(愛)의 형성 과정
딱까가 해석된 불교를 위해 딱까가 서술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이 책에서 충족함 ― 50쪽에 걸친 구체적 서술이 가장 큰 성과
; 윤회책 강의 260224) (제3부 제4장) 몸으로 가는 자 ― 연기된 식의 윤회①[사식(四食) & 가는 자 = 식, 가는 자의 정체=연기된 식](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10&wr_id=67
◐ 본문
Ⅰ. 여래가 성취한 법 ‒ atakkāvacara(딱까의 영역을 넘어섬) = 애멸(愛滅)의 삶
[1] 「딱까 ‒ (愛의 형성 과정)」 → 무명(無明)과 애(愛)
여기에서의 조건성(idappaccayatā)인 연기(緣起-paṭiccasamuppāda)는 여기 즉 중생 세상에서 괴로움이 생겨나 자라나는 조건 관계입니다. 그런데 중생을 대표하는 개념은 몸의 구속입니다(*). 몸(色)에 구속된 식(識) 즉 몸과 마음이 함께한 존재 상태(有身-몸 있음)가 중생인데, 무명(無明)의 덮개에 덮이고 애(愛)의 족쇄에 묶였기 때문입니다(무명에 덮이고 애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 그래서 무명과 애가 있는 한, 몸과 마음이 함께한 삶은 이어지고(몸으로 감), 무명과 애가 해소되면 식은 몸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되는데(몸으로 가지 않음), 해탈(解脫)/열반(涅槃)/불사(不死)의 의미입니다.
(*) (MN 23-개미집 경)은 몸을 개미집에 비유한 뒤 개미집 안 즉 몸 안에서 지혜의 칼로 무명과 애 등 부정적 요소를 해소하고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 무명의 장벽 제거 → 화와 절망을 버림 → 의심을 버림 →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림 → 오취온을 버림 → 다섯 가지 소유의 사유에 묶인 것을 버림 → 소망과 탐을 버림 → 번뇌 다한 비구
그래서 무명과 애의 유무는 그대로 중생인 존재로의 삶의 유무입니다. 애가 있으면 존재(有-bhava)가 되어 불만족한 삶을 살게 되고, 존재에서 벗어남(vibhava)을 통해 애가 없으면 비존재(abhava-존재 상태를 넘어섬-존재의 소멸)가 되어 불만족한 삶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무명과 애는 어떤 관계인데 함께해서 삶의 문제의 근원이 됩니까?
(MN 19-두 부분의 생각 떠오름 경)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을 위해 스승이 해야 할 바를 했다고 말하는데, '나는 평화롭고 안전하고 기쁨을 주는 길(팔정도)을 열었고, 나쁜 길(팔사도)을 막았고, 집에서 기르는 짐승 수컷(소망과 탐 = 애)을 몰아냈고 암컷(무명)을 쫓아냈다.'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짐승에 견주어 무명은 암컷에, 애는 수컷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애가 집(오취온-존재)을 지키기 위해 세상을 향해 짖고 맹렬히 물어뜯는 수컷의 역할을 한다면, 무명은 수컷을 낳고 보듬어 집을 유지하는 암컷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을 허물기 위해서는 짖고 맹렬히 물어뜯는 수컷을 몰아내야 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컷을 낳고 보듬는 암컷도 소굴에서 쫒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MN 105-수낙캇따 경)은 ‘애(愛)는 화살이고, 무명(無明)은 독(毒)을 가진 결점이다. 욕탐(欲貪)과 진에를 수단으로 괴롭힌다.’라고 하는데, 애는 화살이고, 무명은 독을 가진 결점이라는 관계를 설명합니다. 독화살을 맞았을 때, 직접 타격하는 (독이 발라진) 화살은 애이고, 거기에 발라진 독은 무명이라는 관계를 알려줍니다. 그래서 무명과 애 가운데 직접적 타격을 가하는 문제 요소는 애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집을 지키는 수컷의 용맹함이라고 하겠습니다.
연기가 ‘무명 → 행들 ~ 수 → 애 ~ 생 → 노사’의 연기된 법 12개로 설해지지만(십이연기), 때로 무명과 행들이 배제된 ‘식-명색 ~ 수 → 애 ~ 생 → 노사’의 10개로 설해지기도 하는 것(십지연기)은 ①수컷이 직접 세상으로부터 집을 지켜내는 삶과 소굴 속에 자리하여 그 수컷을 낳고 보듬는 암컷의 역할까지도 포함한 삶 또는 ②화살인 애에 직접 꿰뚫린 삶과 꿰뚫은 화살에 독이 발라지는 결점의 과정까지도 포함한 삶에 대한 설명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는 애가 있으면 존재가 되고, 존재에서 벗어남을 통해 애가 없으면 비존재(존재 상태를 넘어섬-존재의 소멸)가 되는 것인데, 사성제에서 고집성제가 ①포괄적인 사성제에서 무명이 아니라 애인 이유이고, ②심층적인 사성제에서 유애와 무명인 이유입니다.
이런 이해를 통해 ‘무명 → 행들’은 암컷(무명)이 수컷(애)을 낳는 과정, (독이 발라진 화살인) 애가 생겨나는 과정이고, ‘식-명색 ~ 수 → 애 ~ 생 → 노사’는 수컷(애)이 세상을 향해 맹렬히 짖고, 생겨난 (독이 발라진 화살인) 애에 의해 꿰뚫려 괴로움이 생겨나 자라나는 삶의 과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삶은 애가 생겨나는 과정과 생겨난 애에 의한 고집(苦集-괴로움의 자라남)의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이때, 생겨난 애에 의한 고집의 과정은 몸의 구속에 따라 마음이 몸과 함께 작용(인식과 행위)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애가 생겨나는 과정은 (마음이 몸을 떠날 수는 없지만 작용의 측면에서)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인식과 행위)하는 내면의 영역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 밝혀진 이 내면의 영역은 takka(딱까)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마음 혼자 인식하고 행위하는 내면의 영역인 딱까는 애의 형성 과정입니다. ‒ 「딱까(애의 형성 과정)」
(*) 생겨난 애에 의한 고집(苦集-괴로움의 자라남)의 과정 ‒ 사식(四食-cattāro āhārā)
활성 존재인 중생을 유지하고 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는 것인 네 가지 자량이 있는데, 사식(四食)이라고 한역된 교리입니다. 그런데 네 가지 자량의 인연-자라남-생김-기원은 애(愛)라고 정의됩니다. 그래서 자량은 애가 전제된 중생의 삶에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자량이 아니라 무명에 덮이고 애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으로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게 붙잡는, 해탈-열반의 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동력이라는 의미입니다.
“cattārome, bhikkhave,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ḷīkāro āhāro ‒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ime kho, bhikkhave, cattār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비구들이여, 활성 존재인 중생을 유지하고 존재를 추구하는 자를 도와주는 네 가지 자량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자량[=단식(段食)], 촉(觸)이 두 번째이고[=촉식(觸食)], 의사(意思)가 세 번째이고[=의사식(意思食)], 식(識)이 네 번째이다[=식식(識食)].
이때, 활성 존재인 중생과 존재를 추구하는 자는 개별의 두 존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1차 인식에 참여하는 공동주관으로의 육내입처와 욕탐(欲貪)/무명(無明)의 요소/지금 삶의 행위자인 심(心)을 의미하는데, 네 가지 자량에 대한 기본적 시각입니다.
; 주제의 확장 ‒ (12)「사식(四食-cattāro āhārā)」 참조 ⇒ nikaya.kr에서 ‘주제 사식’(제목)으로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