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N 12-인연 상윳따 250723 zoom) (SN 12.37~40)[몸=이전의 업 & 잠재와 식의 머묾(형성하지 않음에 의한 해탈) : 연기≠상의상관 & 속제-진제-중제](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jnmVhmnvdc
7.(SN 12.37-그대들의 것이 아님 경)은 ‘이 몸은 그대들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것도 아니다. 이전의 업이고, 형성된 것, 의도된 것, 경험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라며 연기를 철저히 사실에 들어맞게 사고하라고 합니다. 경은 연기의 정형구문에 이어 연기-연멸을 ‘즉’으로 소개하는데, 이 구문이 연기-연멸 즉 고집과 고멸의 조건 관계를 설명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SN 12.38-의도 경)/9.(SN 12.39-의도 경2)/10.(SN 12.40-의도 경3)은 식의 머묾의 조건이 잠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잠재에 대해서는 다음 수업에서 총괄 정리하겠습니다.
네 번째 깔라라캇띠야 품(kaḷārakhattiyavaggo)에 속한 경 4개((SN 12 37~40))를 공부하였습니다.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sca=ka%E1%B8%B7%C4%81rakhattiya
7. (SN 12.37-그대들의 것이 아님 경)은 ‘이 몸은 그대들의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전의 업(業)이고, 형성된 것, 의도된 것, 경험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라고 하면서 연기(緣起)를 철저히 사실에 들어맞게 사고하라고 말합니다.
이때, ‘연기의 사실에 들어맞는 사고’는 ‘중에 의해 설해진 법’과 같은 연기(緣起)와 연멸(緣滅)의 쌍으로 제시됩니다.
한편, 경은 연기의 정형구문에 이어 연기-연멸을 ‘즉’으로 이어서 소개하는데, 이 구문이 오직 연기-연멸 즉 삶의 이야기 위에서의 고집(苦集)과 고멸(苦滅)의 조건 관계를 설명할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기에 대해 상의상관(相依相關)으로 설명하는 후대의 교재들과 차이를 볼 수 있는데, 화엄경의 상의상관의 불교는 제망(帝網)-제망찰해(帝網刹海) 등으로 연결되어서 니까야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 대승(大乘)의 삼제(三際)[속제(俗諦)-진제(眞際)-중제(中際) 또는 공제(空際)-가제(假際)-중제(中際)]와 중(中)에 의해 설해진 법
― 연기(緣起)=속제(俗諦), 연멸(緣滅)=진제(眞際), 중에 의해 설해진 법=중제(中際)
; 공제(空際)=연멸(緣滅)=진제(眞際) & 가제(假際)=연기(緣起)=속제(俗諦) → 중제(中際) = 중에 의해 설해진 법
특히, 상의상관의 관점은 관계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한 수동적 존재성(*)으로 나를 이해하게 할 수 있는데, 격의불교(格義佛敎)의 측면 즉 노자의 무위(無爲)로 부처의 무위를 해석하는 등의 문제의 일면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업(業)을 잇는 자’로서의 나 즉 ‘능동적 존재성’으로 삶을 해석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 (SN 3.25-산의 비유 경) 참조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1_03&wr_id=1
(*) ‘탐-진-치를 없애려고 애쓰지 마라. 그냥 놓아버리면 된다.’라는 논리 → 그냥 놓아지는 것인가? 탐-진-치를 놓아버리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면 어떻게 대답할까?
; 놓지 못하는 것이 취(取-집착) → 오취온(五取蘊) ⇒ ‘놓겠어!’라고 말하면 탐-진-치가 저절로 물러가 주는 것인가? ⇒ 구차제주(九次第住)의 실천적 과정을 배제하고 말로만 해서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음 ⇒ 육사외도(六師外道)에 속한 주장으로 보아야 함
•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iyaṃ daṭṭhabbaṃ의 용례 → (SN 35.146-업(業)의 소멸 경)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11&wr_id=17
; 육내입처(六內入處)가 이전의 업이라는 설명(큰 순환고리에 의한 식의 머묾과 늘어남의 과정)과 몸이 이전의 업이라는 설명은 몸이 내입처에 속한 근(根)이라는 점에서 연결됨
•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의 용례 → (MN 52-앗타까나가라 경)/(AN 11.16-앗타까나가라 경)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6_02
8. (SN 12.38-의도 경)/9. (SN 12.39-의도 경2)/10. (SN 12.40-의도 경3)
• 잠재하다 = anuseti
잠재하면 식(識)이 머물고, 잠재하지 않으면 머물지 않습니다. 의도와 사유에 의해서도 잠재하지만, 의도하지 않고 사유하지 않아도 잠재하면 식은 머묿니다. 그래서 식의 머묾의 조건은 잠재입니다.
잠재에 대해서는 다음 수업에서 총괄 정리하여 다시 공부하겠습니다.
◐ [질문] 식(識)의 머묾을 위한 기반으로의 상(想)의 잠재를 상온(想蘊)으로 보아도 좋은지?
[대답] 상온(想蘊)은 삶의 누적을 지시하는데, 여기서는 누적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의미합니다. (SN 22.53-애착 경)/(SN 22.54-씨앗 경)은 형성하지 않음에 의한 해탈(anabhisaṅkhaccavimuttaṃ)을 말하는데, 지난 삶의 과정에서 누적된 것들의 흩어냄이 아니라 지금 새로운 것을 형성해서 쌓지 않으면 삶의 문제는 해소되어 해탈한다는 것입니다. 불교가 해탈(解脫)과 열반(涅槃)을 위한 실현 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식의 머묾을 위한 기반을 상온으로 이해하면, 지난 삶의 누적을 모두 해소해야 해탈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어 지금 삶의 문제 해소에 의한 깨달음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 ‘나’란 존재가 오온(五蘊)이라면 무더기 전체의 문제를 해소해야 하겠지만, 부처님의 정의에 의하면, 나는 오취온(五取蘊)이어서 취(取)의 문제만 해결하면 ‘나’라는 존재를 소멸하고 중생들의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 불교입문(2) 4. - 삼법인 복습[형성하지 않음에 의한 해탈](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00514) ☞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3&wr_id=5
; (DN 33.4-합송경, 한 가지로 구성된 법들)은 ‘모든 중생은 형성작용(行)으로 유지된다(sabbe sattā saṅkhāraṭṭhitikā).’라고 알려줍니다.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3_10&wr_id=6
형성하지 않음에 의한 해탈(anabhisaṅkhaccavimuttaṃ)은 바로 이 형성작용을 하지 않음에 의해 중생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 (SN 12.40-의도 경3)은 nati(성향)의 개념을 말합니다.
; nati fem. inclination; tendency; bent; bias; lit. bend 경향. 성향. 기움. 굽음
• (MN 19-두 부분의 생각 떠오름 경)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2_09&wr_id=1
yaññadeva, bhikkhave, bhikkhu bahulamanuvitakketi anuvicāreti, tathā tathā nati hoti cetaso 비구들이여, 비구가 거듭해서 자주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접근하게 하면 심(心)의 성향이 된다.
• (MN 144-찬나를 위한 가르침 경)/(SN 35.87-찬나 경)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5_02&wr_id=1
evaṃ vutte, āyasmā mahācundo āyasmantaṃ channaṃ etadavoca — “tasmātiha, āvuso channa, idampi tassa bhagavato sāsanaṃ, niccakappaṃ manasi kātabbaṃ — ‘nissitassa calitaṃ, anissitassa calitaṃ natthi. calite asati passaddhi, passaddhiyā sati nati na hoti. natiyā asati āgatigati na hoti. āgatigatiyā asati cutūpapāto na hoti. cutūpapāte asati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이렇게 말했을 때, 마하쭌다 존자가 찬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그러므로, 도반 찬나여, 이것도 그분 세존의 가르침이라고 늘 작의 해야 합니다. — ‘의지하는 자에게 떨림이 있고,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 떨림이 없다. 떨림이 없을 때 진정이 있고, 진정이 있을 때 성향이 없다. 성향이 없을 때 오고 감이 없고, 오고 감이 없을 때 죽고 태어남이 없다. 죽고 태어남이 없을 때 이 세상도 없고 저세상도 없고 둘의 중간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이 끝이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