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의 확장 ― 「vitakka와 parivitakka」
• vitakka(vi-takka) = takka에서 떠오르는 생각
위딱까는 딱까로부터의 분리 즉 애(愛)의 형성 과정인 딱까로부터 애(愛)에 의한 고집(苦集)의 삶이 출발하는 현상(떠오른 생각)입니다. 딱까가 몸과 함께하지 않은 식(識)과 심(心)의 과정이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분리라는 것은 몸과 함께하는 의(意)의 영역에 진입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위딱까는 소유의 위딱까-분노의 위딱까-폭력의 위딱까 부분과 출리의 위딱까-분노하지 않는 위따까-비폭력의 위딱까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이때, (MN 122-공(空)의 큰 경)에 의하면, 소유의 위딱까 등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평범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으로 이끌지 못하고, 염오-이탐-소멸-가라앉음-실다운 지혜-깨달음-열반으로 이끌지 못해서 떠오르게 하지 않아야 하고, 출리의 위딱까 등은 성스러운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이끌어서 떠오르게 해야 합니다.
또한, (MN 19-두 부분의 생각 떠오름 경)에 의하면, 소유의 위딱까 등은 ‘나도 해로움으로 이끌고 남도 해로움으로 이끌고 둘 모두도 해로움으로 이끌며, 지혜의 소멸에 속하고, 파괴의 편에 속하고, 열반으로 이끌지 않는 것’이고, 출리의 위딱까 등은 ‘나도 해로움으로 이끌지 않고 남도 해로움으로 이끌지 않고 둘 모두도 해로움으로 이끌지 않으며, 지혜의 증대에 속하고, 생산의 편에 속하고, 열반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유의 위딱까 등은 분명히 알고 숙고하여 버리고 제거하고 끝나게 해야 하고, 출리의 위딱까 등은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접근하게 해야 합니다. 다만, 너무 오래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접근하게 하면 몸이 피곤해지고, 몸이 피곤하면 심이 산란해지고, 심이 산란하면 심이 삼매로부터 멀어지게 되므로 심이 산란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심을 안으로 진정되게 하고 가라앉게 하고 집중하고 삼매에 들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위딱까는 제한적입니다. ― 「초선의 유심유사(有尋有伺) → 머무는 과정 : 무심유사(無心有伺) → 제2선의 무심무사(無尋無伺)」
위딱까는 위짜라와 함께 그 범주가 소유에 국한되고 그 범주를 넘어서면 초선에서 순일한 출리의 위딱까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제2선을 성취하면 위딱까도 위짜라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MN 111-순서대로 경)은 무소유처(無所有處)까지 위딱까 이후의 삶의 골격을 구성하는 촉(觸)-수(受)-상(想)-사(思)-심(心)-관심-작의(作意)의 법들이 있습니다. 딱까에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딱까 밖을 구성하는 법들이 있다는 것은 무심무사의 제2선 이후에도 생각은 떠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위딱까는 욕계와 초선까지의 범주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지시하는 제한적 개념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위딱까가 없어진 이후의 경지에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parivutakka(온전한 생각 떠오름)가 그 내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parivutakka(온전한 생각 떠오름)은 몇 가지 용례에서 대표적으로 발견되는데, 모두 높은 수행의 경지에서의 생각 떠오름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rahogatassa paṭisallīnassa evaṃ cetaso parivitakko udapādi 외딴곳에서 홀로 머무는 ~에게 이런 심(心)의 온전한 생각이 떠올랐다.
여기서 ‘홀로 머묾(paṭisallīna: was in seclusion)’은 삼매에 들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제2선 이상의 심(心)의 삼매여서 vitakka의 제한적 범위 밖의 높은 경지를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evaṃ cetaso parivitakko udapādi는 65회 발견되는데, 이 문장이 rahogatassa paṭisallīnassa와 연결되지 않고, ‘어떤 비구’ 등 개별적 인물로 나타나는 경우는 (DN 4-소나단다 경)/(DN 11-께왓티 경)/(DN 18.9-자나와사바 경)/(MN 5-때 없음 경)/(MN 109-보름달 큰 경)/(SN 22.81-빠릴레이야 경)/(SN 22.82-보름달 경)이 있습니다.
2. cetasā cetoparivitakkamaññāya etadahosi 심(心)으로부터 심(心)의 온전한 생각 떠오름을 알고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위의 용례에 의해 누구에게 심(心)의 온전한 생각이 떠오른 것을 다른 존재가 알고서 이어지는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로 나타남
3. ākāraparivitakko/ākāraparivitakkā/ākāraparivitakkena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1) ākāraparivitakko 지금여기에서 두 가지 보가 있는 5가지 법들 ― (MN 95-짱끼 경)/(MN 101-데와다하 경)
• (MN 95-짱끼 경)
“pubbeva kho tvaṃ, bhāradvāja, saddhaṃ agamāsi, anussavaṃ idāni vadesi. pañca kho ime, bhāradvāja, dhammā diṭṭheva dhamme dvedhā vipākā. katame pañca? saddhā, ruci, anussavo, ākāraparivitakko, diṭṭhinijjhānakkhanti — ime kho, bhāradvāja, pañca dhammā diṭṭheva dhamme dvedhā vipākā. api ca, bhāradvāja, susaddahitaṃyeva hoti, tañca hoti rittaṃ tucchaṃ musā; no cepi susaddahitaṃ hoti, tañc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ññathā. api ca, bhāradvāja, surucitaṃyeva hoti ... pe ... svānussutaṃyeva hoti ... pe ... suparivitakkitaṃyeva hoti ... pe ... sunijjhāyitaṃyeva hoti, tañca hoti rittaṃ tucchaṃ musā; no cepi sunijjhāyitaṃ hoti, tañc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ññathā. saccamanurakkhatā, bhāradvāja, viññunā purisena nālamettha ekaṃsena niṭṭhaṃ gantuṃ —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바라드와자여, 앞에서 그대는 믿음을 말했는데, 이제는 전승을 말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지금여기에 두 가지 보(報)가 있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어떤 다섯입니까? 믿음, 성향, 전승,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 견해와 통찰의 지속 — 바라드와자여, 지금여기에 두 가지 보(報)가 있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믿음에 철저하다 해도 그것이 없는 것이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믿음에 철저하지 않아도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사실이고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성향에 철저하다 해도 … 전승에 철저하다 해도 …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에 철저하다 해도 …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철저하다 해도 그것이 없는 것이고 공허하고 거짓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철저하지 않아도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고 사실이고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진리를 보호하는 현명한 사람이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완전한 결론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 (MN 101-데와다하 경)
“evaṃ vutte ahaṃ, bhikkhave, te nigaṇṭhe etadavocaṃ — ‘pañca kho ime, āvuso nigaṇṭhā, dhammā diṭṭheva dhamme dvidhāvipākā. katame pañca? saddhā, ruci, anussavo, ākāraparivitakko, diṭṭhinijjhānakkhanti — ime kho, āvuso nigaṇṭhā, pañca dhammā diṭṭheva dhamme dvidhāvipākā. tatrāyasmantānaṃ nigaṇṭhānaṃ kā atītaṃse satthari saddhā, kā ruci, ko anussavo, ko ākāraparivitakko, kā diṭṭhinijjhānakkhantī’ti. evaṃvādī kho ahaṃ, bhikkhave, nigaṇṭhesu na kañci sahadhammikaṃ vādapaṭihāraṃ samanupassāmi.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이여, 그 니간타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 ‘도반 니간타들이여, 지금여기에서 두 가지 보(報)가 있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어떤 다섯입니까? 믿음, 성향, 전승,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 견해와 통찰의 지속 — 도반 니간타들이여, 지금여기에서 두 가지 보가 있는 이런 다섯 가지 법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니간타 존자들에게 과거에 중심(*)을 둔 스승에 대한 어떤 믿음, 어떤 성향, 어떤 전승, 어떤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 어떤 견해와 통찰의 지속이 있습니까?’라고. 이렇게 말하는 나는, 비구들이여, 니간타들에 대해 어떤 법다운 변명도 보지 못한다.
(*) (MN 102-다섯이면서 셋 경)은 이 다섯 가지를 과거에 대한 설(說)의 영역이라고 설명함
2)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곳 ― (MN 102-다섯이면서 셋 경)/(SN 12.68-꼬삼비 경)
aññatrev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믿음과 다른 곳, 성향과 다른 곳, 전승과 다른 곳,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곳,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곳
3) mā ākāraparivitakkena ― [진리] 탐-진-치의 법은 버리고 무탐-무진-무치의 법은 성취하여 머물 것 ― (AN 3.66-께사무띠 경)/(AN 3.67-살하 경)/(AN 4.193-밧디야 경)
“etha tumhe, kālāmā, mā anussavena, mā paramparāya, mā itikirāya, mā piṭakasampadānena, mā takkahetu, mā nayahetu, mā ākāraparivitakkena, mā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mā bhabbarūpatāya, mā samaṇo no garūti. yadā tumhe, kālāmā, attanāva jāneyyātha — ‘ime dhammā akusalā, ime dhammā sāvajjā, ime dhammā viññugarahitā, ime dhammā samattā samādinnā ahitāya dukkhāya saṃvattantī’”ti, atha tumhe, kālāmā, pajaheyyātha.
깔라마들이여, 전승에 의해, 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성전의 자료라고 해서, 딱까를 원인으로, 문법적 의미를 원인으로, 온전한 생각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그대들은 오지(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법들은 불선(不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있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받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과 괴로움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버려야 합니다.
4) ākāraparivitakkena vā veditabbā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알아야 하는 것 ― (SN 35.153-방법이 있는가 경)
“atthi, bhikkhave,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bhikkhu aññatrev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ññaṃ byākareyya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으로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 있다.
“ayaṃ kho, bhikkhave, pariyāyo yaṃ pariyāyaṃ āgamma bhikkhu aññatrev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ññaṃ byākaroti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mī”ti
“비구들이여, 이것이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에 의해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