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또는 부처님의 날(vesak)
한국불교 전통에서 부처님을 기념하는 날은 「오신 날(4월 8일) - 출가하신 날(2월 8일) - 깨달으신 날(12월 8일) - 돌아가신 날(2월 15일)」의 네 날이어서 불교의 4대 명절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다릅니다. 오신 날과 깨달으신 날과 돌아가신 날이 모두 4월 15일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부처님의 날(Buddha day) 또는 웨삭(vesak day)이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초기 불교의 4대 명절은 ①부처님(붇다)의 날 - 4월 15일, ②가르침(담마)의 날 - 6월 15일, ③제자들(상가)의 날 - 1월 15일, ④까티나 축제 - 9월 16일~10월 15일입니다[음력].
5월이면 여러 곳에서 부처님 오신 참뜻을 묻곤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삶의 의미는 오신 데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오셔서 무엇을 실현했고 무엇을 남기고 가셨는지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그 삶의 의미를 바르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5월을 기념하는 질문은 부처님 오신 날에 맞춘 ‘부처님 오신 참뜻’보다는 부처님의 날에 맞춰 ‘부처님의 삶의 의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1] 부처님의 탄생 ― 부처님오신날
(MN 123-놀랍고 신기한 것 경)은 부처님의 탄생을 전후한 놀랍고도 신기한 현상들을 소개하는데, 이런 놀랍고 신기한 법들은 (DN 14.2-대전기 경, 보살의 법다움)에서는 위빳시 부처님의 보살(菩薩) 시절의 일화로 나타나면서, 이것이 보살의 법다움(dhammatā)이라고 설명합니다.
경은 대표적으로 탄생게(誕生偈)를 소개합니다. ― 「대덕이시여, 저는 이것을 세존의 곁에서 듣고, 세존의 곁에서 받았습니다. — ‘아난다여, 태어나자마자 보살은 평평한 두 발로 땅 위에 굳게 선 뒤에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하얀 일산이 펼쳐질 때, 모든 방향을 바라보고, 황소의 소리로 말했다. — ‘나는 세상에서 최상이고, 첫째이고, 으뜸인 자이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고, 이제 다음의 존재[유(有)]는 없다.’라고.’」
부처님은 탄생의 시점에서 최상이고 으뜸인 존재이며 세상에서 벗어나 해탈된 삶을 실현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마지막 태어남이고, 다음의 존재 즉 몸에 구속된 불완전한 존재 상태는 더 이상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나지 않음을 통해 윤회하지 않게 되는 것 즉 생사 문제의 해결, 이것이 부처님 오신 참뜻입니다.
한편, 이 탄생게는 한역(漢譯)되었는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 삼계개고(三界皆苦) 아당안지(我當安之)」
입니다. 빠알리 게송은 자신의 벗어남의 관점을 말하지만, 일반적으로 한역(漢譯)은 독존(獨尊)에 이어 중생 구제에 중심을 두고 있다고 비교됩니다.
[2] 불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4개의 경
4개의 경은 부처님의 출가로부터 깨달음의 과정과 제자들의 깨달음을 이끄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MN 26-덫 경)/(MN 36-삿짜까 큰 경)/(MN 85-보디 왕자 경)/(MN 100-상가라와 경)입니다. (MN 85-보디 왕자 경)은 전체 과정에 대한 완전한 형태를 설명하고, 다른 경들은 각각의 주제에 따라 이 범위 안에서 설명합니다.
1. 깨달음의 과정의 출발은 출가입니다.
1) 출가의 목적 ― 「ariyā pariyesanā 성스러운 구함 = kiṃkusalagavesī 무엇이 유익(有益)인지 구함」
부처님의 출가 목적은 명확합니다. 위에 소개한 네 개의 경은 모두 「so evaṃ pabbajito samāno kiṃkusalagavesī anuttaraṃ santivarapadaṃ pariyesamāno ~ 이렇게 무엇이 유익(有益)/선(善)인지를 구하여 출가한 나는 위없이 평화롭고 고귀한 경지를 찾아 ~」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kusala(꾸살라) 즉 유익(有益)/선(善)은 무엇입니까? (MN 26-덫 경)은 성스러운 구함을 말하는데, 자신은 태어나는-늙는-병드는-죽는-슬픈-오염되는 존재지만 태어나는-늙는-병드는-죽는-슬픈-오염되는 것에서 위험을 보아서 태어남-늙음-병-죽음-슬픔-오염이 없는 위없는 유가안온(瑜伽安穩)인 열반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성스러운 구함을 위해 출가하였는데, 이것을, 다른 경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유익/선인지를 구하여 출가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kusala 즉 유익/선은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윤회에서 벗어나 슬픔과 오염이 없는 열반(涅槃)이라는 락(樂-행복)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경이 많은 곳에서 말하는 이익과 행복의 실현이고, 이런 점에서 부처님을 ‘세상에서 윤회의 장막을 벗긴 아라한-정등각(arahaṃ sammāsambuddho loke vivaṭṭacchado)’이라고 부른다고 하겠습니다.
유사한 용례로는 「pabbajiṃ kiṃkusalānuesī 무엇이 유익(有益)/선(善)인지를 구하여 출가했다.」라고 말하는 (DN 16.35-대반열반경, 수밧다 유행승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유익(有益)과 무익(無益)을 선언한 분이어서 유익과 무익의 기준 위에서 상황에 맞게 잘 분별하여 말하는 분이라는 의미의 분별설자(分別說者 - vibhajjavādo)를 말하는 (AN 10-94-왓지야마히따 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출가의 정형 구문
① 깨달음 이전,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나에게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재가의 삶이란 압박이고 오염이 많지만, 출가는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온전히 충만하고 온전히 청정하고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범행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해야겠다.’라고.
② 그런 나는 나중에 원치 않아 얼굴이 눈물에 젖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슬피 울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은 머리의 소년이고 상서로운 젊음을 갖춘 초년기의 젊은 나이에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다.
; ①만 나타나는 경들도 있고, ①과 ②가 함께 나타나는 경들도 있음
; 온전히 청정한 범행의 실천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떨치고 나서는 비장함을 보여줌
2. 깨달음의 과정
1) 출가한 ‘수행자 고따마’는 무소유처를 이끄는 알라라 깔라마와 비상비비상처를 이끄는 웃따까 라마뿟따라는 두 스승을 찾아 그 경지를 성취하지만, 목적한 삶의 완성(kusala-유익)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 떠납니다. 소유(욕계)와 존재(색계-무색계) 그리고 해탈된 삶(열반의 실현)의 세 가지 삶을 참고하면, 수행자 고따마는 인도에 있던 삼매 즉 ‘소유의 삶은 넘어섰지만, 존재의 삶에서의 벗어남을 이끌지는 못하는 제한적 삼매’의 끝을 경험한 뒤 존재의 삶에서 벗어나 해탈된 삶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납니다.
2) 출가 이후 깨달음까지 부처님의 행적
• 알라라 깔라마와 웃따까 라마뿟따 두 분 스승에게서 무소유처와 비상비비상처를 성취하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염오하여 떠나고,
• 소유의 삶에서 ①밖으로 떠나 머물고 ②안으로 가라앉히는 양면의 성취가 깨달음을 위한 전제가 된다는 점을 확인하고,
• 고행(苦行)을 시도하지만 깨달음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확인한 뒤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초선(初禪)에서 시작하는 사선(四禪)[초선-제2선-제3선-제4선] - 삼명(三明)[숙주명-천안명-누진면]의 깨달음의 길을 통해 깨달아 부처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때, 소유의 삶에서의 성취는 비유를 통해
①밖 ― 몸과 심(心)으로 소유의 삶에서 떠나 머무는지,
②안 ― 소유의 삶에서 소유의 관심, 소유의 갈망, 소유의 열중, 소유의 갈증, 소유의 열기를 안으로 버리고, 가라앉히는지
에 대한 세 가지 경우로 나타나는데, 세 번째 경우인 ①밖으로 떠나 머물고 ②안으로 가라앉히는 양면의 성취가 깨달음을 위한 전제가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한편, 소유의 삶을 극복한 이후의 과정으로는 고행(苦行)이 제시되는데, 그때까지 인도에 있었던 깨달음의 길입니다. 수행자 고따마는 ①신체적 방법 1가지, ②호흡 멈춤의 방법 6가지, ③소식(小食) 1가지 등 10가지의 방법으로 고행을 시도하는데, ①과 ②의 방법은 몸이 진정되지 않고, ③의 방법은 몸이 파괴되는 부작용 때문에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합니다. ― (MN 12-사자후 큰 경)도 참조
수행자 고따마는 과거-미래-현재의 고행 수행자 가운데 가장 혹독한 고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 것은 고행이 깨달음의 길이 아니기 때문 즉 노력의 문제보다는 길의 문제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깨달음을 위한 다른 길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는데, 초선(初禪)의 기억을 떠올려 마침내 깨달음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길의 과정이 행복이라는 점에서 괴로움에 의해 행복은 얻어진다는 인도 사회의 선입견을 극복하는 과정도 나타나는데, 깨달음의 길 즉 불교의 탄생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 ‘행복으로 행복을 완성하는 불교 수행!’
이렇게 수행자 고따마는 사선(四禪)-삼명(三明)의 과정으로 번뇌를 부수고[누진(漏盡)] 깨달아 부처가 되는데, 출가할 때 목적한 유익(有益)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SN 12-10-고따마 경) 등은 이런 깨달음의 본질 즉 유익의 실현이 생사 문제의 해결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 「세상에서 윤회의 장막을 벗긴 아라한-정등각(arahaṃ sammāsambuddho loke vivaṭṭacchado)」
※ 혹자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인도에 있던 고행의 끝, 인도에 있던 삼매의 끝에서 깨달았는데, 거기에 불교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과정에서 ①고행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 아니어서 벗어나고, ②삼매는 그 제한을 넘어 존재의 삶에서의 벗어남을 이끄는 전혀 새로운 삼매수행[정정(正定)]을 깨닫고 그 방법으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합니다. 그래서 불교의 깨달음은 이렇게 인도의 틀을 벗어난 불교 고유의 것입니다.
3.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 ― (KN 2.11-법구경(法句經), 늙음 품)
anekajāti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gahakār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옮겨가고 윤회하는 다양한 태어남의 과정에서 찾지 못한
집을 짓는 자를 찾는 자가 있다.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ṃ na kāhasi.
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ṅkhataṃ.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집을 짓는 자여, 그대는 발견되었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한다.
그대에게 서까래는 모두 부서졌고 대들보는 유위(有爲)에서 벗어났다.
심(心)은 행(行-형성작용)에서 벗어났고, 애(愛)의 부서짐을 얻었다.
4. 깨달음의 소회 & 부처님이 성취한 법
(MN 26-덫 경)과 (MN 85-보디 왕자 경)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의 자리에서 그 소회를 말하는데, (SN 6.1-범천의 요청 경)으로 독립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 「‘내가 성취한 이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딱까[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들은 잡기를 즐기고 잡기를 좋아하고 잡기를 기뻐한다. 잡기를 즐기고 잡기를 좋아하고 잡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이런 토대 즉 여기에서의 조건성인 연기(緣起)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런 토대 즉 모든 행(行)을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음이고, 애(愛)의 부서짐이고, 바램이고, 소멸인 열반을 보기 어렵다.」
이 소회에 의하면, 부처님이 성취한 법은 딱까[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섬 즉 딱까라는 내적 영역에서 애(愛)가 생겨나지 않는 애멸(愛滅)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애(愛)는 고집(苦集)입니다. 그래서 애멸(愛滅)은 고멸(苦滅)이고, 그대로 출가의 목적인 유익의 실현입니다.
부처님의 오도송은 딱까[애(愛)의 형성 과정]에 중심을 둔 부처님의 성취 위에서 해석해야 그 의미를 정확히 드러냅니다.
5. 깨달음 이후의 삶 ― 부처로서의 45년
부처님은 29세에 출가하고 35세에 깨달아 부처가 된 뒤 45년을 부처로서 살다가 80세에 돌아가셨습니다. (SN 56.11-전법륜경)과 (SN 22.59-무아상경)을 필두로 제자들의 향상을 이끌다가 (DN 16.36-대반열반경, 여래의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몸이 무너진 뒤 몸으로 가지 않음을 통해 몸의 구속에서조차 벗어난 완전한 행복의 실현을 직접 드러내 보여줍니다. ― 완전한 열반(parinibbāna)
(MN 121-공(空-텅 빔)의 작은 경)은 깨달은 뒤, 부처로서 몸과 함께한 삶의 과정에 대해 「그는 이렇게 분명히 안다. — ‘욕루(慾漏)를 연(緣)한 불안은 여기에 없다. 유루(有漏)를 연한 불안은 여기에 없다. 무명루(無明漏)를 연한 불안은 여기에 없다. 그러나 생명을 조건으로 이 몸을 연한 육처(六處)에 속한 불안만은 있다.’라고. 그는 ‘욕루에 속한 상(想)은 비어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유루에 속한 상은 비어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무명루에 속한 상은 비어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그는 거기에 없는 것에 의해 그것의 공(空-비어있음)을 관찰하고, ‘그러나 생명을 조건으로 이 몸을 연한 육처(六處)에 속한 것만은 비어있지 않다.’라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을 ‘존재하는 이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난다여, 이렇게도 사실에 따르고 전도되지 않았고 청정함을 넘어선 위없는 공(空-텅 빔)에 들어감이 있다.」라고 하여, 깨달음 이전, 몸으로 가는 삶의 과정에서 함께한 몸의 구속에 따르는 불안(daratha)은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깨달음 이후 45년 간의 부처로서의 삶은 이렇게 몸에 따르는 문제는 남아있는 가운데 법을 전하다가 몸이 무너진 뒤에 몸으로 가지 않음에 의해 몸의 문제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는 것 즉 완전한 열반(parinibbāna)을 실현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이것이 생사 문제의 해결이라는 깨달음의 본질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이후 부처로서의 삶을 대표하는 사건은 전법의 시작(녹야원/다섯 비구)과 완전한 열반입니다. 특히, 몸에 속한 문제까지도 해소된 완전한 고멸(苦滅)은 불교가 지향하는 유익(有益)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35세에 깨달아 부처가 된 사건보다도 80세에 몸이 무너진 뒤 몸으로 가지 않음으로써 실현된 완전한 열반이 더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6. (DN 16.36-대반열반경, 여래의 마지막 말씀)
그때 세존은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다. — “아난다여, 그런데 그대들은 ‘이전에는 스승이 있었다. 이제는 스승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난다여. 그러나 이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선언한 법(法)과 율(律)이 내가 가고 난 후에는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아난다여, 그리고 지금 비구들은 서로를 모두 도반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고 난 후에는 그대들은 이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건넌 장로는 신진 비구를 이름이나 성이나 도반이라는 말로 불러야 한다. 신진 비구는 건넌 장로를 ‘대덕(bhante)’이라거나 ‘존자(āyasmā)’라고 불러야 한다.
아난다여, 상가가 원한다면 내가 가고 난 후에는 소소한 학습 계율은 폐지해도 좋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후에 찬나 비구에게는 범천의 징계를 주어야 한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범천의 징계입니까?” “아난다여, 찬나 비구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말하더라도 비구들은 그에게 말을 하지도 말고, 훈계하지도 말고, 충고하지도 말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느 한 비구라도 부처나 법이나 상가나 길이나 실천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우리에게 스승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에 있던 세존에게 질문하지 못했다.’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은 침묵했다. 두 번째로 세존은 … 세 번째로 세존은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어느 한 비구라도 부처나 법이나 상가나 길이나 실천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우리에게 스승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에 있던 세존에게 질문하지 못했다.’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라고. 세 번째도 비구들은 침묵했다.
그러자 세존은 비구들에게 말했다. ― “비구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스승에 대한 존중 때문에 묻지 않는다면 도반이 도반에게 물어보도록 하라.”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비구들은 침묵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참으로 놀랍습니다. 대덕이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비구 상가에는 부처님이나 법이나 상가나 길이나 실천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는 비구는 한 명도 없다고 제게는 분명함이 있습니다.”라고.
“아난다여, 그대는 믿음을 가지고 말한다. 아난다여, 참으로 여기에 대해서 여래에게는 ‘이 비구 상가에는 부처나 법이나 상가나 길이나 실천에 대해서 확실하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는 비구는 한 명도 없다.’라는 앎이 있다. 아난다여, 이들 500명의 비구 가운데 최하인 비구가 예류자여서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자,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이다.”
그러고 나서 세존은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나니 「유위에서 형성된 것들은 무너지는 것이다. 불방일(不放逸)로써 성취하라.」(“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ti)”라고 말했다.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씀이다.
7. 최고의 예배 ― (DN 16.27-대반열반경, 한 쌍의 살라 나무)
부처님이 마지막 말씀을 남기기 전, 한 쌍의 살라 나무 사이에 누우실 때, 부처님께 예배하기 위한 여러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현상보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르침 그대로 배워 알고 실천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최고의 예배라고 알려줍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가 부처님을 예배하는 방법도 같습니다. 부처님을 최고로 예배하는 방법은, 물질을 통한 예배도 필요하지만,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설하신 그대로 배워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교학+수행]하는 이유입니다.
그러자 세존은 아난다 존자에게 말했다. ― “아난다여, 두 그루의 살라 나무는 꽃 피울 때가 아닌데도 활짝 피어났고, 여래의 예배를 위해 여래의 몸 위로 뿌려지고 흩날리고 덮었다. 천상의 만다라와 꽃들도 허공에서 떨어져서 여래의 예배를 위해 여래의 몸 위로 뿌려지고 흩날리고 덮었다. 천상의 전단향 가루도 허공에서 떨어져서 여래의 예배를 위해 여래의 몸 위로 뿌려지고 흩날리고 덮었다. 천상의 악기가 여래의 예배를 위해 허공에서 연주되고, 천상의 노래가 여래의 예배를 위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만큼으로는 여래를 존경하고 중히 여기고 우러르고 예배하고 흠모하는 것이 아니다. 아난다여,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고, 여법하게 실천하고, 법을 따라 행하며 머무는 비구나 비구니나 남신자나 여신자가 여래를 최고의 예배로 존경하고 중히 여기고 우러르고 예배하고 흠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난다여, ‘우리는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실천하고, 여법하게 실천하고, 법을 따라 행하며 머물 것이다.’라고, 아난다여, 그대들은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