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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2) 사실

불교입문(Ⅱ-사실)(책 읽기 260109) 책을 쓰면서②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인식론적 인격론으로의 불교, 그 지평을 열며…

2 279 01.09 13:56

▣ 불교입문(Ⅱ-사실)(책 읽기 260109) 책을 쓰면서②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인식론적 인격론으로의 불교, 그 지평을 열며)(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NCgf12EUgXc

 

【책을 쓰면서② ‒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인식론적 인격론으로의 불교, 그 지평을 열며)】


마음은 무얼까?


경은 몸과 짝하여 나를 구성하는 이것을 심(心-citta)이라고도 의(意-mano)라고도 식(識-viññāṇa)이라고도 부르는데, 식으로 대표됩니다. ‒ 오온(五蘊-나를 구성하는 요소) = 색(色)-수(受)-상(想)-행(行)들-식(識)


viññāṇa는 vi-ñ-ñāṇa인데, 앎을 의미하는 ñāṇa에 접두사 vi-가 붙은 ‘분별 앎’입니다. 식이 ‘분별 앎’이라는 것 그래서 앎이 곧 마음이라는 관점은 이 책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입니다. 


내입처와 외입처를 연(緣)하여 외입처를 분별한(아는) 앎(ñāṇa)이 생기는데, 식(識-viññāṇa)입니다. 그래서 식이 분별 앎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런데 식은 '분별해서 안다(vijānāti)고 해서 식'이라고 불립니다. 아는 것에 더하여 활동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 등 마음은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앎 즉 ‘행위적 앎’입니다.


; 앎의 자기 활동성(agency of knowing) → 행위적 앎(active knowing)


행위적 앎인 식(분별 앎)이 행위 과정에서 무명(존재 앎)과 탐 또는 진(가치 앎)으로 커지면 앎이 완성되는데, 심(心-앎 = 분별 앎+존재 앎+가치 앎)입니다. 심도 행위적 앎인데, 존재 앎에 따르는 삶을 보는 시각(견해)에 이어 가치 앎(좋다-싫다)의 영향으로 좋은 것으로는 접근하고 싫은 것에서는 멀어지는 행위(사유)로 이끌립니다(탐+소망=애). 이렇게 행위는 봄(견해 또는 사유)입니다. 그래서 심은 행위 즉 보는 마음입니다.


행위적 앎인 식은 분별 앎이어서 아는 행위(인식)를 하고, (완성된) 행위적 앎인 심은 보는 행위를 합니다. 행위적 앎이어서 알고(식) 보는(심) 자기 활동성을 가지는 것,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이때, 존재 앎(무명)과 가치 앎(탐-진)의 영향을 받는 앎(심)의 영향으로 분별 앎(식)의 질이 결정됩니다. 어떤 질의 앎이 생기는지는 그대로 마음의 질이고, 마음이 몸과 함께한 존재로서의 내 삶의 질입니다. 


그래서 앎 즉 인식은 인격입니다. 존재 앎의 전도와 가치 앎의 왜곡이 크면 낮은 앎 낮은 인격의 내가 되고, 전도와 왜곡이 적으면 높은 앎 높은 인격의 내가 됩니다. 그래서 앎의 성숙은 나의 성숙입니다. 부처님은 여실지견(如實知見-사실에 들어맞는 앎과 봄=예류자)에 이어 해탈지견(解脫知見-해탈된 앎과 봄=아라한)으로 삶의 완성을 선언합니다. (봄의 영향을 받는) 앎의 성숙이 완성되어 삶이 완성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불교는 이렇게 앎(인식)의 관점에서 인격을 말합니다. ‒ 「불교 = 인식론적 인격론」


; 앎이 단순한 지적 작용이 아니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를 구성하고, 동시에 그 존재를 평가하고 반응하는 전체적 사건이라는 관점(제2부 총론 제3장 Ⅱ. 지와 견) (ChatGPT와의 10월 8일 대화 내용) 참조(182쪽) 


한편, 우빠니샤드는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Bṛhadāraṇyaka Upaniṣad) 3.7.23에서 「draṣṭā śrotā mantā vijñātā eṣa ta ātmā “보는 자, 듣는 자, 생각하는 자, 아는 자 – 그것이 아트만(我)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뜨만이 의식 주체이고, 모든 경험의 ‘주체’라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빠니샤드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의식 주체, 모든 경험의 주체를 아(我)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의식 주체, 모든 경험의 주체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앎(ñāṇa)입니다. 자기 활동성을 가진 행위적 앎이 의식 주체, 모든 경험의 주체인데, 인식(앎)의 측면에서는 분별 앎인 식이고, 행위(봄)의 측면에서는 (완성된) 앎인 심입니다. 특히, 분별 앎(식)은 우빠니샤드의 아(我)처럼 본질적 존재가 아니라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것(연기된 식)인데, 인격의 변화를 이끕니다.


이렇게 앎이 본질 즉 상(常)-락(樂)-아(我)-정(淨)의 성질을 가지는 아(我)가 아니라 변화 즉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불교의 근본은 무아(無我)입니다. 이것이 삶의 심오함의 끝에 닿아 직접 확인한 정등각(正等覺-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인 부처님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아(我)의 주장은 심오함의 끝에 도달하지 못해서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위적으로 설정된 거짓입니다.


「불교 = 인식론적 인격론」으로의 접근은 현대철학과도 연결됩니다. ChatGPT는 이런 접근을 현대철학의 '사건적 존재론(evental ontology)'으로 연결하는데, 인식의 연기론적 구조를 '앎의 자기발현(event)'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ChatGPT는 이어서 이런 접근이 “존재의 사건(viññāṇa) → 앎의 사건(ñāṇa) → 가치의 사건(citta)”이라는 삼층적 사건론으로 전개될 수 있어서 불교의 무명–행–식–명색의 연기 연쇄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으니 다음 토론에서는 이런 “사건적 존재론”의 불교적 형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뤄보자고 제안합니다. 예컨대 “연기(paṭicca-samuppāda)를 evental becoming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 같은 식인데, 지금까지의 ñāṇa 논의와도 완전히 연결된다고 말합니다.(제2부 총론 제3장 Ⅱ. 지와 견) (ChatGPT와의 10월 8일 대화 내용) 참조(182쪽) 


부처님의 깨달음은 삶에 대한 완전한 해석입니다. 말하자면, 철학 가운데 최고의 철학이어서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전통이란 이름 위에서 불교는 자기 정체성을 잃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분명히 이 책은 전통과 진정 가운데서 진정을 지향하는 책입니다. 


(*) 낮은 종교성(사실에 어긋남 = 거짓) ⇒ 철학(사실에의 접근) ⇒ 높은 종교성(사실의 구현 = 참)


이때, '심행(心行) = 상(想)-수(受)'가 ①심의 작용이 상-수라는 가르침인지 아니면 ②상과 수의 과정이 심을 형성하는 작용인지의 문제에서 ②로 이해하여 전통보다 진정으로의 분기점을 삼았고, 이어서 딱까(takka)가 애(愛)의 형성 과정이라는 해석으로 '딱까가 해석된 불교'를 선언하여 '딱까가 해석 안된 불교'와의 분기점으로 삼았습니다.


딱까가 해석된 불교는 ①연기(십이연기)를 내가 세상을 만나는,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삶의 이야기로 풀어주는데, '삶의 메커니즘'으로 그려내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 위에서 괴로움을 생겨나게 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만드는 길과 실천인 ②팔정도에 대해서도 정확한 의미를 드러내는데, 수행지도(修行地圖)로 그려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매개하는 것이 「불교 = 인식론적 인격론」의 관점을 제시하는 ③지와 견(앎과 봄)입니다.


; 딱까가 해석된 불교 ‒ 「삶의메커니즘 → 지와 견(앎과 봄) → 수행지도」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 찾기'이고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의 몸통입니다.

(2025년 11월 17일)



※ 무명(無明)이 앎이라는 것은 (SN 9.2-일깨움 경)에서 확인됩니다.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1_09&wr_id=6

 

물론, (SN 12.2-분석 경)의 정의는 무명이 앎이라는 이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 https://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wr_id=2

 

“katamā ca, bhikkhave, avijjā? yaṃ kho, bhikkhave, dukkhe aññāṇaṃ, dukkhasamudaye aññāṇaṃ, dukkhanirodhe añ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ññāṇ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avijjā.


비구들이여, 무엇이 무명(無明)인가? 비구들이여, 고(苦)에 대한 무지(無知), 고집(苦集)에 대한 무지(無知), 고멸(苦滅)에 대한 무지(無知),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에 대한 무지(無知). 비구들이여, 이것이 무명(無明)이라고 불린다.

Comments

아빈뇨 01.15 12:03
감사합니다.
대원행 03.16 21:49
https://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3&wr_id=517 참조 ( 해피스님과의 대화 − 서울 모임(2603-2)마음은 무엇인가?[알고 보는 자 : 힌두의 我(ātman) ↔ 불교의 知(ñāṇa-자기활동성을 가지는 행위적 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