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한국붇다와다불교 > 언론보도

언론보도

[해피스님 원고] 근본 경전으로 해석하는 가르침의 대의(大義)

0 339 2021.05.10 20:18

 

근본 경전으로 해석하는 가르침의 대의(大義)

 

1. 부처님 ― 여래(如來) 


불교의 교주이자 스승은 부처님인데, 여래(如來-tathāgata)라는 말로 대표됩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믿음은 「성스러운 제자는 믿음을 가졌다. ― ‘이렇게 그분 세존(世尊)께서는 아라한(阿羅漢-번뇌 다한 분), 정등각(正等覺-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분), 명행족(明行足-밝음과 실천을 갖춘 분), 선서(善逝-진리의 길 보인 분), 세간해(世間解-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는 분),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는 위없는 분), 천인사(天人師-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불(佛-깨달은 분), 세존(世尊-존귀한 분)이시다.’라고 여래(如來)의 깨달음을 믿는다.」라고 하여, 여래(如來)의 깨달음을 아홉 가지의 특성[여래구덕(如來九德)]으로 이해하여 믿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2. 부처 이전의 것 ― 사실 ― 삼법인(三法印)과 연기(緣起) 


대부분 종교는 교주 이전의 것을 설명하는데, 예수 이전의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야훼, 무함마드 이전의 창조주 하나님 알라 등 인격화(人格化)된 유일신(唯一神)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불교도 부처 이전의 것을 제시합니다. 여래들이 출현한 때거나 출현하지 않은 때거나 흔들리지 않고 법으로 확립되고 법으로 결정된 것이 있어서 여래는 이것을 깨닫고 실현하였다고 하는데, 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의 삼법인(三法印)과 여기에서의 조건성인 연기(緣起)입니다.


삼법인은 존재하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①번뇌의 영향 위에 있는 것[유위(有爲)]인 행(行)들과 ②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것[무위(無爲)]인 열반(涅槃)으로 구성되는 존재[법(法)-있는 거]들은 무아(無我)라는 공통된 특성 위에서, ①행들은 무상(無常)에 따르는 고(苦-괴로움-불만족)의 특성이 있고, ②열반은 무상의 가라앉음에 의한 락(樂-즐거움-행복-만족)의 특성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 「그림 1 ― 고(苦)와 락(樂)의 영역」 참조.


연기(緣起)는 보통 십이연기(十二緣起)라고 알려져 있는데, 번뇌의 영향 위에서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취(取)」의 조건 관계를 통해 자라나고 변화하는 존재[유(有)]에게 생(生)과 노사(老死) 그리고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 등 모든 괴로움 무더기가 생겨나고 자라난다고 설명하는, 존재에 수반되는 괴로움의 조건 관계입니다. → 「그림 2 ― 존재[유(有)]를 중심에 둔 십이연기(十二緣起)」 참조.


이런 삼법인과 연기는 사실이어서 「사실에 괴리된 삶은 괴로움을 만들고, 사실에 부합한 삶은 행복을 만든다.」라는 불교 사상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사실에 부합한 삶을 실현하여 불교의 교주가 되기 때문에 인격화되지 않은 원리-이치 그대로의 이 두 가지 사실이 부처 이전의 것입니다.


3. 최상위 개념 ― 고(苦)와 락(樂) 


부처님은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꿰뚫어 알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고와 대응하는 것이 락이기 때문에 고멸은 락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 즉 중생에게 고와 락을 꿰뚫어 알게 하는 것에 부처님의 존재 의미를 둔다는 선언인데, 이것이 불교의 최상위 개념입니다. 물론, 고의 당사자인 존재의 구명[나는 누구인가?]도 중요한데, 연기는 무명 내지 취의 과정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불완전한 존재 상태인 유에 대한 해석으로 답합니다[①유신(有身)-②오취온(五取蘊)-③식과 명색]. 그래서 존재의 구명은 최상위 개념인 고와 락에 수반되는 하위 개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부처님이 중생에게 던지는 메시지 ― 「괴롭니? 행복하자!, 아프니? 아프지 마!」


4. 불교의 쓰임새[왜 이 세상에 불교가 필요할까?] ― 진리(眞理) ― 사성제(四聖諦) 


그런데 고와 고멸(락)은 개념으로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를 바르게 알아서 완전히 소멸함으로써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실천적 가르침이어야 쓰임새를 가지고, 세상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는 누구에게 어떤 괴로움이 어떻게 생겨나서 자라나는지 그 조건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조건의 제어를 통해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이때, 고의 조건 관계로 애(愛-갈애) 또는 연기가 제시되는데, 연기는 애를 전후한 괴로움의 발생 과정 즉 십이연기입니다. 그리고 연기의 조건 관계를 해소하고 애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방법으로 정견(正見-바른 견해)-정사유(正思惟-바른 사유)-정어(正語-바른말)-정업(正業-바른 행위)-정명(正命-바른 생활)-정정진(正精進-바른 노력)-정념(正念-바른 사띠)-정정(正定-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제시되는데,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또한, 팔정도의 실천이 연기의 조건 관계를 해소하고 고멸을 실현하는 조건으로 제시되는데, 중도(中道)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고와 고멸의 최상위 개념은 각각의 조건 관계로 확장되는데, 고(苦)의 조건인 애를 중심에 둔 연기는 고집(苦集)이라고 하고, 고집(苦集)의 해소를 위한 실천인 팔정도의 실천을 고멸도(苦滅道)[고멸로 이끄는 실천=중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성되는 고(苦)-고집(苦集)-고멸(苦滅)-고멸도(苦滅道)를 포괄하여 사성제(四聖諦-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불교가 제시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런 진리의 완성이 깨달음인데, 깨달은 자[불(佛)]는 이렇게 정의됩니다. ― 「나는 실(實)답게 알아야 하는 것을 실답게 알았고[고(苦)], 닦아야 하는 것을 닦았고[고멸도(苦滅道)], 버려야 하는 것을 버렸습니다[고집(苦集)]. 그래서 바라문이여, 나는 불(佛-buddha-부처)입니다[고멸(苦滅)].」


불교는 오직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 그리고 나의 삶에 괴로움이 있기에 불교는 필요하고, 그 괴로움의 해소가 불교의 쓰임새입니다. 


5. 사는 이야기 


이렇게 불교는 ‘나’라는 존재에게 어떤 괴로움[고(苦)]이 어떻게 생겨나서 자라나고[고집(苦集)], 어떻게 제어하여[고멸도(苦滅道)], 행복을 실현[고멸(苦滅)]하는지를 설명하는 사성제를 진리 곧 정체성으로 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 「내가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과정의 어디 어디에 어떤 어떤 문제가 있어서 괴로움이 생겨나고 자라나는지를 설명하면 연기이고, 어떻게 어떻게 대응하면 문제가 해소되어 괴로움이 소멸하는지를 설명하면 중도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불교에는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없습니다. 오직 삶 위에서 삶에 수반되는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삶의 심오함의 끝에 닿은 부처님의 깨달음(atakkāvacara)에는 심오하여 어려움은 있을지언정 삶의 이야기를 벗어난 주제는 없는 것입니다.


6. 현실과 진리 


한편, 불교신행(佛敎信行)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집니다. 오직 깨달음을 지향하여 세간의 삶을 떠나서 사는 출가자의 신행과 가족과 함께하는 세간의 삶에서 부처님에 의지하는 재가자의 신행입니다.


출가자의 신행은 부처님을 직접 뒤따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출가는 「재가의 삶이란 압박이고 오염이 많지만, 출가는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온전히 충만하고 온전히 청정하고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범행(梵行)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할 것이다.」라는 다짐입니다. 이처럼 출가자의 신행 또한 열린 허공과 같고, ‘온전히 충만하고 온전히 청정하고 소라고둥처럼 빛나는 범행(梵行)의 실천’이어야 합니다. 


반면에 재가자의 신행은 압박과 오염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 압박과 오염 가운데서도 부처님에 의지하여 「갈수록 괴로움은 줄어들고 행복은 늘어나는 삶을 살다가 죽은 뒤에는 더 좋은 삶의 이어짐 즉 하늘에 태어나는 것」이 대부분의 재가자의 신행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이 재가자인 불교 신자에게 진리는 어떤 쓰임새를 가집니까? 


역시 불교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심오함의 끝에 닿아 완전한 행복을 실현하는 것으로의 깨달음이 있지만, 세상 모두가 깨달음을 성취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성제의 진리는 얼마만큼의 고(苦)에 대한 집(集)-멸(滅)-도(道)인지에 따라 모두의 삶이 처한 현실에 적용됩니다. 그래서 재가자에게도 불교적인 삶은 진리에 부합하는 이런 관점을 요구합니다. ― 「나에게 이런 또는 이만큼의 괴로움이 있다[고(苦)]. 이 괴로움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고집(苦集)]?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소하고[고멸도(苦滅道)],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고멸(苦滅)]?」


7. 재가 신자의 불교적인 삶, 특히, 스승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 


고멸(苦滅)을 이끄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토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삶 즉 나와 세상을 보는 바른 시각을 제시하는데, 정견(正見)입니다. 경들은 세 가지로 구성된 토대 위에서 바른 시각의 원초적 형태를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1) 가르침의 토대 ― 「①업(業), ②결실 있음, ③노력」 


부처님은 「업(業)을 말하는 자(kammavādī)이고, 결실 있음을 말하는 자(kiriyavādī)」라고 불립니다. 삶은 태어남[수저]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사는 동안의 행위 즉 업(業)의 결과가 쌓여서[온(蘊)] 결정되는데, 업(業)에는 결실 즉 과(果)와 보(報)가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은 공통되게 ①업(業)을 말하고, ②결실 있음을 말하고, ③노력을 말합니다. 삶을 결정하는 것인 업(業)에는 결실이 있으니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농부가 농사를 짓는 행위에는 풍작이든 흉작이든 결실이 있고, 풍작을 거두기 위해서는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부처님을 특징짓는 ①업과 ②결실 있음 위에서 ③노력을 통해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佛敎)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원초적 바른 견해 ― 「①저세상은 있다, ②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있다, ③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 


불교 신자에게는 이런 토대 위에서의 삶이 바른 신행(信行)입니다. 토대를 벗어나 잘못 설해진 법 위에서 살아가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신행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울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근본 사유가 됩니다. 그러면 이런 토대 위에서의 삶 즉 바른 신행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나와 세상을 보는 시각 즉 견해의 구축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내 삶의 터전인 세상에 대한 바른 앎을 바른 견해[정견(正見)]라고 하는데, 향상으로 이끌리는 삶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경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바른 견해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초적 형태의 바른 견해로는 「①저세상은 있다, ②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있다, ③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라는 세 가지가 제시됩니다.


이때, ①저세상 있음은 윤회(輪廻)한다는 선언이고, ②화생 하는 중생 있음은 윤회해서 다시 태어나는 세상이 지옥(地獄)-축생(畜生)-아귀(餓鬼)-인간(人間)-천상(天上)의 다섯 갈래로 구성된다는 설명이며[오도윤회(五道輪廻)], ③업에 과와 보가 따름은 원하는 세상 즉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늘로 이끄는 업을 실천해야 한다는 방법의 제시여서 태어남의 선택입니다. 여기서 하늘로 이끄는 업으로는 보시(布施-베풂)와 오계(五戒-질서)를 시작에 두는데[심(心)의 배에 보시의 돛을 올리고 오계의 바람을 맞아 행복을 향한 항해를 출발함 → 「그림 3 ― 열반(涅槃)으로 나아가는 인생항로(人生航路)」 참조],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婬)-불망어(不妄語)-불음주(不飮酒)의 오계는 십선업(十善業)으로 확장되어 락의 과와 보를 가져오는 업(業)을 대표합니다. ― 「불살생(不殺生)-불투도(不偸盜)-불사음(不邪婬)-불망어(不妄語)-불양설(不兩舌)-불악구(不惡口)-불기어(不綺語)-불간탐(不慳貪)-부진에(不瞋恚)-정견(正見)」


그런데 저세상이 있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해피 스님은 죽어봤는지, 그래서 죽은 뒤에 저세상이 있어서 윤회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는지?’ 묻기도 합니다. 물론 해피 스님은 이 몸으로의 삶에서 죽어보지 못했고, 저세상이 있다고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그대는 죽어봤는지, 죽은 뒤에 저세상이 없어서 단멸(斷滅) 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는지?’ 되물으면 그 또한 확인하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주제들은, 말하자면, 스승에 대한 믿음의 영역에 있는 것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제들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공감과 동의 그리고 신뢰로써 뒤따르는 사람을 신자(信者)라고 하고, 이런 방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불교 신자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받아들이고 뒤따르는 사람이 불교 신자입니다.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뒤따르면서 불교 신자의 허울을 쓰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음이고, 삶은 바르게 향상으로 이끌리지 못합니다.


8. 가르침에 의지한 실천 ― 자주(自洲)-법주(法洲) → 자력종교(自力宗敎) 


이렇게 불교는 행위 즉 업(業)에 따르는 과(果)와 보(報)에 관심을 집중합니다. 어떤 업이 괴로움의 과와 보를 가져오고, 어떤 업이 행복의 과와 보를 가져오는지 바르게 알아서 괴로움을 초래하는 업을 피하고 행복을 일구는 업을 적극 실천하는 것이 불교 신행의 본질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업이 괴로움의 편에 있고 어떤 업이 행복의 편에 있는지에 대한 분명함 즉 법칙성을 확보해야 하는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부처님은 유익(有益-kusala → 이익과 행복)과 무익(無益-akusala → 손해와 괴로움)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선언 위에서 잘 분별하여 설하는 스승[분별설자(分別說者)-vibhajjavāda]입니다. 무엇이 유익(有益)/선(善)이고, 무엇이 무익(無益)/악(惡)인지 선언하고, 선언된 기준 위에서 상황에 맞게 잘 분별하여 설한다는 것인데, 병에 따라 적절한 약을 주는 의사라는 의미입니다[대의왕(大醫王) → 응병여약(應病與藥)]. 특히, 정등각(正等覺-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자)인 부처님에 의해 선언된 이 기준은 완전하고 부작용이 없는 기준이어서 고(苦)-락(樂)의 과(果)-보(報)를 가져오는 행위의 기준이 되고, 그 법칙성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최선의 방법이 됩니다. 


이렇게 스승인 부처님은 행복을 위한 가르침을 주고, 제자들은 그 방법을 실천하여 스스로 행복을 실현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주(自洲-스스로 섬이 됨)-법주(法洲-법이 이끄는 섬)의 가르침 즉 자력종교(自力宗敎)입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