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진행중인 법회 > 해피스님과의 대화/기타

해피스님과의 대화/기타

몸 ― 심신치유를 위한 논문 참고 자료(240608)

몸 ― 심신치유를 위한 논문 참고 자료


불교(佛敎)라고 하면 대개 마음에 중심을 둔 공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몸에 대해서도 큰 비중을 부여합니다. 내가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로의 부처님 가르침에서 나는 몸과 마음이 함께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몸과 마음이 함께한 삶에서 파생되어 다시 나를 구성하는 수(受)-상(想)-행(行)은 마음이 아니라 몸에 묶여서 명색(名色)을 구성한 뒤 마음인 식(識)과 서로 조건 되는 관계로 함께하다가 몸이 무너져 죽으면 몸과 함께 버려진다고 설명할 정도로 몸은 삶에서 큰 비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을 말하는 경들 ― (DN 15-대인연경)/(SN 12.65-도시 경)


나는 누구인가 ㅡ 나의 개념의 확장.jpg

 

 

; 나는 불교를 믿는다(230221) - 최상위 개념(괴로울 것인가, 행복할 것인가?) & 나는 누구인가(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참조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6&wr_id=59

 

이외에도 많은 경은 몸과 관련한 서술을 담고 있는데, 몸에 대한 이해에 필요한 대표적 경들을 소개하였습니다.


한편, 몸에 대한 불교의 관점은 삶에 대한 이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삶의 문제를 해소하고 고멸(苦滅) 즉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에서도 몸은 큰 비중으로 함께합니다. 마음이 주관이 되어 몸을 객관 즉 대상으로 선택하여 집중-관찰-느낌의 과정으로 진행되는 것이 수행의 일반 구조인데, (DN 22/MN 10-대념처경)/(MN 119-몸에 속한 사띠 경)/(MN 118-입출식념 경)이 설명합니다. 


또한, (DN 2-사문과경)은 정형된 수행체계도(修行體系圖)를 보여주는데, 몸과 함께한 과정의 성숙입니다.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1&wr_id=36

인식에서, 주관인 내입처(內入處)는 식()과 근()이 함께한 것입니다. 즉 마음이 몸과 함께 대상인 외입처(外入處)를 인식하는 구조입니다. 내입처에 대한 이런 이해는 삶에 대한 이해의 중심인데, 오랜 세월 불교는 이 관점을 놓쳤습니다. 근본경전연구회가 되살린 삶에 대한 이런 관점은 가르침의 진정에 접근하는 시작점입니다. 불교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의 출발자리인데, 별도의 자료에서 설명하였습니다.

 

― 「. 몸의 역할 — ③인식 ()-()-()와 의()에 대한 이해 위에서 설명되는 몇 가지 표현의 용례참조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wr_id=45

 

 

1. (DN 15-대인연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2_02&wr_id=1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na 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mātukucchismiṃ samuccissath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mātukucchismiṃ okkamitvā vokkamissatha, api nu kho nāmarūpaṃ itthattāya abhinibbattissathā”ti? “no hetaṃ, bhante”. “viññāṇañca hi, ānanda, daharasseva sato vocchijjissatha kumārakassa vā kumārikāya vā, api nu kho nāmarūpaṃ vudd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āpajjissa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nāmarūpassa — yadidaṃ viññāṇaṃ”.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식(識)이 모태(母胎)에 들어오지 않는데도 명색(名色)이 모태(母胎)에서 공고해지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아난다여, 식(識)이 모태에 들어온 뒤에 잘못되었는데도 명색(名色)이 금생(今生)을 위해 재현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아난다여, 식(識)이 어린 남녀 아이에게서 끊어졌는데도 명색이 늘어나고 자라고 충만하게 되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명색(名色)에게 오직 식(識)이 원인이고, 식(識)이 인연이고, 식(識)이 자라남이고, 식(識)이 조건이다.”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ñca hi, ānanda, nāmarūpe patiṭṭhaṃ na labhissatha, api nu kho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dukkhasamudayasam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viññāṇassa yadidaṃ nāmarūpaṃ. ettāvatā kho, ānanda,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ettāvatā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ṃ, ettāvatā vaṭṭaṃ vattati itthattaṃ paññāpanāya yadidaṃ nāmarūpaṃ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다.’라는 것은 이런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식(識)이 명색(名色)에 머묾을 얻지 못했는데도 미래에 생(生)과 노사(老死)라는 고(苦)의 자라남의 생겨남을 선언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러므로, 아난다여, 오직 명색(名色)이 식(識)의 원인이고, 명색이 식의 인연이고, 명색이 식의 자라남이고, 명색이 식의 조건이다. 아난다여, [명색(名色)이 식(識)의 원인이고 ~ 조건인] 그 범위에서 태어나거나, 늙거나, 죽거나, 옮겨가거나,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 범위에서 이름이 적용되고, 그 범위에서 언어가 적용되고, 그 범위에서 개념이 적용되고, 그 범위가 지혜의 영역이고, 그 범위에서 금생(今生)의 선언을 위한 윤회가 있다. 즉 식(識)과 함께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이 존재 안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2. (SN 12.65-도시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wr_id=57

 

kiṃpaccayā nāmarūpan’ti? tassa mayhaṃ,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 ‘viññāṇe kho sati nāmarūpaṃ hoti,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tassa mayhaṃ, bhikkhave, etadahosi — ‘kimhi nu kho sati viññāṇaṃ hoti, kiṃpaccayā viññāṇan’ti? tassa mayhaṃ,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 ‘nāmarūpe kho sati viññāṇaṃ hoti,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무엇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생기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식(識)이 있을 때 명색(名色)이 있고,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생긴다.’라는 지혜의 관통이 여리작의(如理作意)를 통해서 생겨났다.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무엇이 있을 때 식(識)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식(識)이 생기는가?’라고.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명색(名色)이 있을 때 식(識)이 있고,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생긴다.’라는 지혜의 관통이 여리작의(如理作意)를 통해서 생겨났다.


“tassa mayhaṃ, bhikkhave, etadahosi — paccudāvattati kho idaṃ viññāṇaṃ nāmarūpamhā na paraṃ gacchati. ettāvatā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yadidaṃ 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ṃ; 


비구들이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 이 식(識)은 되돌아간다. 명색(名色)으로부터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 안에서 태어나거나, 늙거나, 죽거나, 옮겨가거나, 다시 태어난다. 즉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고,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있다. 


3. (SN 12.19-우현(愚賢)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wr_id=19

 

 

“yāya ca, bhikkhave, avijjāya nivutassa bālassa yāya ca taṇhāya sampayuttassa ayaṃ kāyo samudāgato, sā ceva avijjā bālassa appahīnā sā ca taṇhā aparikkhīṇā. taṃ kissa hetu? na, bhikkhave, bālo acari brahmacariyaṃ sammā dukkhakkhayāya. tasmā bālo kāyassa bhedā kāyūpago hoti, so kāyūpago samāno na parimuccati jātiyā jarā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na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 이 몸이 일어난다. 그 어리석은 자에게 무명은 버려지지 않고 갈애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괴로움의 부서짐을 위해 바르게 범행을 닦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진 뒤 몸으로 간다. 몸으로 간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yāya ca, bhikkhave, avijjāya nivutassa paṇḍitassa yāya ca taṇhāya sampayuttassa ayaṃ kāyo samudāgato, sā ceva avijjā paṇḍitassa pahīnā, sā ca taṇhā parikkhīṇā. taṃ kissa hetu? acari, bhikkhave, paṇḍito brahmacariyaṃ sammā dukkhakkhayāya. tasmā paṇḍito kāyassa bhedā na kāyūpago hoti. so akāyūpago samāno parimuccati jātiyā jarā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parimuccati dukkhasmāti vadāmi. ayaṃ kho, bhikkhave, viseso, ayaṃ adhippayāso, idaṃ nānākaraṇaṃ paṇḍitassa bālena yadidaṃ brahmacariyavāso”ti.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현명한 자에게 이 몸이 일어난다. 그 현명한 자에게 무명은 버려지고 갈애는 부서진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자는 괴로움의 부서짐을 위해 바르게 범행을 닦는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몸이 무너진 뒤 몸으로 가지 않는다. 몸으로 가지 않은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범행의 실천, 어리석은 자에 비해 현명한 자에게 이것이 차이이고, 이것이 특별함이고, 이것이 다름이다.


 

4. (MN 28-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큰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3_08&wr_id=4

 

“seyyathāpi, āvuso, kaṭṭhañca paṭicca valliñca paṭicca tiṇañca paṭicca mattikañca paṭicca ākāso parivārito agāraṃ tveva saṅkhaṃ gacchati; evameva kho, āvuso, aṭṭhiñca paṭicca nhāruñca paṭicca maṃsañca paṭicca cammañca paṭicca ākāso parivārito rūpaṃ tveva saṅkhaṃ gacchati. ajjhattikañceva, āvuso, cakkhuṃ aparibhinnaṃ hoti, bāhirā ca rūpā na āpāthaṃ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ajjhattikañceva, āvuso, cakkhuṃ aparibhinnaṃ hoti bāhirā ca rūpā āpāthaṃ āgacchanti, no ca tajjo samannāhāro hoti, neva tāva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yato ca kho, āvuso, ajjhattikañceva cakkhuṃ aparibhinnaṃ hoti, bāhirā ca rūpā āpāthaṃ āgacchanti, tajjo ca samannāhāro hoti. evaṃ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yaṃ tathābhūtassa rūpaṃ taṃ rūp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vedanā sā vedan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ā tathābhūtassa saññā sā saññ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ye tathābhūtassa saṅkhārā te saṅkhār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nti, yaṃ tathābhūtassa viññāṇaṃ taṃ viññāṇupādānakkhandhe saṅgahaṃ gacchati.


• 육내입처(六內入處) - 안의 것, 육외입처(六外入處) - 밖의 것

• samannāhāra ― concentration(집중), bringing together(묶음-합침-접촉시킴)


※ (SN 35.185-꼿티까 경) ― 「도반 꼿티까여, 안(眼)이 색(色)들에게 족쇄가 아니고, 색(色)들이 안(眼)에게 족쇄가 아닙니다. 이 둘을 연(緣)하여 생기는 욕탐(欲貪)이 거기서 족쇄입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나무토막을 연(緣)하고, 덩굴을 연(緣)하고, 짚을 연(緣)하고, 진흙을 연(緣)하고, 공간에 둘러싸여 집이란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도반들이여, 뼈를 연(緣)하고, 근육을 연(緣)하고, 살을 연(緣)하고, 피부를 연(緣)하고, 공간에 둘러싸여 몸[rūpa-색(色)]이란 이름을 얻게 됩니다. 도반들이여, 안의 안(眼)이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밖의 색(色)들이 영역에 들어오지 않고, 이것에 속한 집중도 없습니다[이것들을 묶어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에 속하는 식(識)의 부분[안식(眼識)]은 출현하지 않습니다. 도반들이여, 안의 안(眼)이 망가지지 않았고 밖의 색(色)들이 영역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것에 속한 집중이 없습니다[이것들을 묶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에 속하는 식(識)의 부분은 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반들이여, 안의 안(眼)이 망가지지 않았고 밖의 색(色)들이 영역에 들어오며, 이것에 속한 집중도 있을 때[이것들을 묶어주면], 이렇게 이것에 속하는 식(識)의 부분이 출현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있게 된 것[존재-bhūta] 중의 색(色)은 색취온(色取蘊)을 따라가 쌓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있게 된 것 중의 수(受)는 수취온(受取蘊)을 따라가 쌓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있게 된 것 중의 상(想)은 상취온(想取蘊)을 따라가 쌓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있게 된 것 중의 행(行)들은 행취온(行取蘊)을 따라가 쌓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있게 된 것 중의 식(識)은 식취온(識取蘊)을 따라가 쌓입니다. 


“so evaṃ pajānāti — ‘evañhi kira imesaṃ pañcannaṃ upādānakkhandhānaṃ saṅgaho sannipāto samavāyo hoti. vuttaṃ kho panetaṃ bhagavatā — ‘y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i so dhammaṃ passati; yo dhammaṃ passati so paṭiccasamuppādaṃ passatīti. paṭiccasamuppannā kho panime yadidaṃ pañcupādānakkhandhā.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o ālayo anunayo ajjhosānaṃ so dukkhasamudayo. yo 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chandarāgavinayo chandarāgappahānaṃ, so dukkhanirodho’ti. ettāvatāpi kho, āvuso, bhikkhuno bahukataṃ hoti.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압니다. — ‘이렇게 이 오취온(五取蘊)의 따라가 쌓임과 모임과 조합이 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法)을 보는 자는 연기(緣起)를 본다.’라고. 또한, 이 오취온은 연기된 것들이다. 이 오취온에 대한 관심, 잡음, 친밀함, 묶임이 괴로움의 자라남이다[고집(苦集)]. 이 오취온에 대한 욕탐(欲貪)의 제어와 욕탐(欲貪)의 버림이 괴로움의 소멸이다[고멸(苦滅)].’라고. 도반들이여, 이만큼도 비구가 많이 행한 것입니다.


5. (AN 4.171-의도 경)/(SN 12.25-부미자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8_08&wr_id=4/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1&wr_id=33

 

 

“kāye vā, bhikkhave, sati kāya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vācāya vā, bhikkhave, sati vacī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mane vā, bhikkhave, sati mano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avijjāpaccayāva.


비구들이여, 몸이 있을 때 안으로 몸의 의도[신사(身思)]가 원인인 락(樂)과 고(苦)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말이 있을 때 안으로 말의 의도[구사(口思)]가 원인인 락(樂)과 고(苦)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의(意)가 있을 때 무명(無明)의 조건으로부터 안으로 의(意)의 의도[의사(意思)]가 원인인 락(樂)과 고(苦)가 생긴다.


 

6.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SN 41.6-까마부 경2)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5_04&wr_id=12

 

“kati panāyye, saṅkhārā”ti?


“그러면 스님. 몇 개의 행(行)들이 있습니까?”


“tayome, āvuso visākha, saṅkhārā — kāyasaṅkhāro, vacīsaṅkhāro, cittasaṅkhāro”ti.


“도반 위사카여, 이런 세 가지 행(行)들이 있습니다. — 신행(身行), 구행(口行), 심행(心行).”


“katamo panāyye, kāyasaṅkhāro, katamo vacīsaṅkhāro, katamo cittasaṅkhāro”ti?


“그러면 스님, 무엇이 신행(身行)이고, 무엇이 구행(口行)이고, 무엇이 심행(心行)입니까?”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asaṅkhāro,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도반 위사카여, 들숨도 날숨도 신행(身行)이고,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口行)이고, 상(想)과 수(受)가 심행(心行)입니다.”


“kasmā panāyye,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k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k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그러면 스님, 왜 들숨도 날숨도 신행(身行)이고, 왜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口行)이고, 왜 상(想)과 수(受)가 심행(心行)입니까?”


“assāsapassāsā kho, āvuso visākha, kāyikā ete dhammā kāyappaṭ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pubbe kho, āvuso visākha,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paṭibaddhā, t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 paṭibaddha: bound to(묶다); depent on(의존하다); attracted on or by(끌어들이다. 불러일으키다). (pp. of paṭibandhati)


“도반 위사카여, 들숨도 날숨도 몸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몸이 의존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들숨도 날숨도 신행(身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위딱까 한 뒤, 위짜라 한 뒤 나중에 말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口行)입니다. 상(想)과 수(受)는 심(心)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심(心)이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想)과 수(受)가 심행(心行)입니다.”


 

(SN 41.6-까마부 경2)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7&wr_id=1

 

sādhu ... pe ... uttariṃ pañhaṃ apucchi — “yvāyaṃ, bhante, mato kālaṅkato, 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 imesaṃ kiṃ nānākaraṇan”ti? “yvāyaṃ gahapati, mato kālaṅkato tassa kāyasaṅkhāro niruddho paṭippassaddho, vacīsaṅkhāro niruddho paṭippassaddho, cittasaṅkhāro niruddho paṭippassaddho, āyu parikkhīṇo, usmā vūpasantā, indriyāni viparibhinnāni. yo ca khvāyaṃ, gahapati,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 tassapi kāyasaṅkhāro niruddho paṭippassaddho, vacīsaṅkhāro niruddho paṭippassaddho, cittasaṅkhāro niruddho paṭippassaddho, āyu aparikkhīṇo, usmā avūpasantā, indriyāni vippasannāni. yvāyaṃ, gahapati, mato kālaṅkato, yo cāyaṃ bhikkhu saññāvedayitanirodhaṃ samāpanno, idaṃ nesaṃ nānākaraṇan”ti.


“감사합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 “대덕이시여, 죽어 사망한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 이들에게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장자여, 죽은 자에게 신행(身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구행(口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심행(心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생명력은 다하고, 체열은 식고, 기능들은 부서집니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비구에게 신행(身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구행(口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심행(心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생명력은 다하지 않고, 체열은 식지 않고, 기능들은 아주 깨끗합니다. 장자여, 죽은 자와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비구 ― 이들에게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7. (SN 35.103-웃다까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1&wr_id=19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에게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가 파내지는가? 비구들이여, 사대로 구성되었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인 이 몸을 지시하여 종기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애(愛)를 지시하여 종기의 뿌리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애(愛)는 버려졌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비구에게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가 파내진다.


비구들이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이렇게 말한다. — ‘참으로 이것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 참으로 이것이 일체의 승리자, 참으로 이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그는 파내었다.’라고. 그러나 비구들이여, 이 웃다까 라마뿟따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가 아니면서 ‘나는 높은 앎을 이룩한 자다.’라고 말한다. 일체의 승리자가 아니면서 ‘나는 일체의 승리자다.’라고 말한다. 종기의 뿌리를 파내지 못했으면서 ‘나에게 종기의 뿌리는 파내어졌다.’라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그것을 바르게 말하는 비구는 말해야 한다. — 참으로 이것이 높은 앎을 이룩한 자, 참으로 이것이 일체의 승리자, 참으로 이 파내지 못한 종기의 뿌리를 그는 파내었다.’라고. 


 

8. (DN 2.24-사문과경, ()와 견())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4_01_02&wr_id=53

 

“so evaṃ samāhite citte parisuddhe pariyodāte anaṅgaṇe vigatūpakkilese mudubhūte kammaniye ṭhite āneñjappatte ñāṇadassanāya cittaṃ abhinīharati abhininnāmeti. so evaṃ pajānāti — ‘ayaṃ kho me kāyo rūpī cātumahābhūtiko mātāpettikasambhavo odanakummāsūpacayo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ṃsana-dhammo; idañca pana me viññāṇaṃ ettha sitaṃ ettha paṭibaddhan’ti.


그가 이렇게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심(心)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압니다. — ‘나의 이 몸은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 식(識)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9. (SN 55.21-마하나마 경1)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7_12_03&wr_id=4

 

tassa mayhaṃ, bhante, evaṃ hoti — ‘imamhi cāhaṃ samaye kālaṃ kareyyaṃ, kā mayhaṃ gati, ko abhisamparāyo’”ti?


대덕이시여, 그런 저에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만약 지금 죽는다면 나의 갈 곳은 어디일까? 어디에 태어날까?'라고.


“mā bhāyi, mahānāma, mā bhāyi, mahānāma! apāpakaṃ te maraṇaṃ bhavissati apāpikā kālaṃkiriyā. yassa kassaci, mahānāma, dīgharattaṃ saddhāparibhāvitaṃ cittaṃ sīlaparibhāvitaṃ cittaṃ sutaparibhāvitaṃ cittaṃ cāgaparibhāvitaṃ cittaṃ paññāparibhāvitaṃ cittaṃ, tassa yo hi khvāyaṃ kāyo rūpī cātumahābhūtiko mātāpettikasambhavo odanakummāsūpacayo aniccucchādanaparimaddanabhedanaviddhaṃsanadhammo. taṃ idheva kākā vā khādanti gijjhā vā khādanti kulalā vā khādanti sunakhā vā khādanti siṅgālā vā khādanti vividhā vā pāṇakajātā khādanti; yañca khvassa cittaṃ dīgharattaṃ saddhāparibhāvitaṃ ... pe ... paññāparibhāvitaṃ taṃ uddhagāmi hoti visesagāmi.

 

"두려워하지 말라, 마하나마여. 두려워하지 말라, 마하나마여. 그대의 죽음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나쁘게 죽음을 맞지 않을 것이다. 마하나마여, 누구든지 오랜 세월 온전히 믿음을 닦은 심(心)과 온전히 계를 닦은 심(心)과 온전히 배움을 닦은 심(心)과 온전히 보시를 닦은 심(心)과 온전히 지혜를 닦은 심(心)을 가진 사람의 몸은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여기서 까마귀들이 쪼아 먹고, 독수리들이 쪼아 먹고, 매들이 쪼아 먹고, 개들이 뜯어먹고, 자칼들이 뜯어 먹고, 많은 살아있는 벌레 떼가 파먹겠지만, 오랜 세월 온전히 믿음을 닦은 심(心)과 온전히 계를 닦은 심(心)과 온전히 배움을 닦은 심(心)과 온전히 보시를 닦은 심(心)과 온전히 지혜를 닦은 이 심(心)은 위로 올라가고 특별한 곳으로 가게 된다.


 

10. (SN 36.21-시와까 경)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4_02&wr_id=1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원인-조건 ― “담즙, 점액, 바람, 겹침, 기후, 고르지 못함, 갑작스러움, 그리고 업보가 여덟 번째이다.


 

[답글에 이어집니다]

 

Comments

대원행 06.11 23:17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6_02&wr_id=92 참조 (부산불교의사회(240610) ― 몸 & 칠불통계[수행-인식 with 몸 & 전승의 중심 4가지]
대원행 06.17 20:25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09&wr_id=102 참조 (해피스님과의 대화(서울 240608) ― 2. 사마타-위빳사나의 위치 & 몸의 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