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의 확장 ― (17)「takka의 영역(takkāvacara)을 넘어섬과 진리의 검증 기준」
안타깝게도 takka는 불교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개념입니다. 이 개념은 「삶의 메커니즘」에 의해 설명되는데, 간략히 설명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어서 결론만 소개하고 여기의 서술에 사용할 것입니다.
• takka ― 행위는 관심(chanda)에 실려 인식에 전달되고, 인식은 가공되어 행위에 전달되는데, 인식이 가공되는 과정을 takka라고 부르며, 가공된 결과는 애(愛)입니다. 그래서 「애(愛)의 형성 과정」입니다. 또한, takka는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인식-행위)하는 영역이라는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 「애(愛) = 고집성제(苦集聖諦)」
takka의 개념은 takkī라는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takkī가 takka를 두드려(takkapariyāhataṃ) 자기가 이해한 법을 설하는 사람으로 설명되기 때문인데, 「주제의 확장 ― (17-1)takkī-vīmaṃsī의 이해」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takka와 관련하여 ①takka의 영역(takkāvacara)을 넘어섬과 ②진리의 검증 기준을 설명하는 (MN 95-짱끼 경)의 연장된 주제를 설명하였습니다.
[1] takka의 영역(takkāvacara)을 넘어섬(atakkāvacara) : 부처님이 성취한 법의 중심 개념(구체성) ― 「유위(有爲-takkāvacara) → 무위(無爲-atakkāvacara)」
이때, takka의 영역(takkāvacara)은 애(愛)를 생겨나게 하는 유위(有爲)의 영역이어서, 「번뇌 → 무명(無明) → 탐(貪) → 소망(所望)」의 과정으로 애(愛)를 형성합니다[애(taṇhā) = 탐(rāga)+소망(nandi) ― nandirāgasahagatā].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takka의 영역을 넘어섬(atakkāvacara)[유위(有爲) → 무위(無爲)]’으로 대표되는데, ①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에 의해 ②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생겨나서 ③무탐(無貪)과 소망 없음(anandi)에 의해 애(愛)가 형성되지 않는 삶[애(愛)의 부서짐]입니다.
1. (SN 6.1-범천의 요청 경)은 부처님이 성취한 법이 takka의 영역을 넘어선 것(atakkāvacara)이라고 말해주는데, (MN 26-덫 경)과 (MN 85-보디 왕자 경)에도 나타나고, (DN 14-대전기경)에서는 위빳시 부처님의 일화로 소개됩니다.
ekaṃ samayaṃ bhagavā uruvelāyaṃ viharati najjā nerañjarāya tīre ajapālanigrodhamūle paṭhamābhisambuddho. atha kho bhagavato rahogatassa paṭisallīnassa evaṃ cetaso parivitakko udapādi — “adhigato kho myāyaṃ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 ālayarāmā kho panāyaṃ pajā ālayaratā ālayasammuditā. ālayarāmāya kho pana pajāya ālayaratāya ālayasammuditāya duddasaṃ idaṃ ṭhānaṃ yadidaṃ idappaccayatāpaṭiccasamuppādo. idampi kho ṭhānaṃ duddas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ṃ. ahañceva kho pana dhammaṃ deseyyaṃ; pare ca me na ājāneyyuṃ; so mamassa kilamatho, sā mamassa vihesā”ti. apissu bhagavantaṃ imā anacchariyā gāthāyo paṭibhaṃsu pubbe assutapubbā —
이렇게 나는 들었다. — 한때, 바야흐로 깨달음을 성취한 세존은 우루웰라에서 네란자라 강변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밑에 머물렀다. 그때 외딴곳에 홀로 머무는 세존에게 이런 심(心)의 온전한 생각이 떠올랐다. — ‘내가 성취한 이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애(愛)의 형성 과정]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들은 잡기를 즐기고 잡기를 좋아하고 잡기를 기뻐한다. 잡기를 즐기고 잡기를 좋아하고 잡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은 이런 토대 즉 여기에서의 조건성인 연기(緣起)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런 토대 즉 모든 행(行)을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음이고, 애(愛)의 부서짐이고, 바램이고, 소멸인 열반(涅槃)을 보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이 법을 설한다 해도 저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를 피곤하게 하고 나를 짜증 나게 할 것이다.’라고.
이 장면은 부처님이 성취한 법과 중생의 특성을 단적으로 비교하면서 이 법의 두 가지 토대를 설명합니다.
• 부처님이 성취한 법 ― 「adhigato kho myāyaṃ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법」
• 중생의 특성 ― 「잡기(ālaya)를 즐기고, 좋아하고, 기뻐함」
• 이 법의 두 가지 토대 ― ①여기(중생 세상)에서의 조건성인 연기(縁起), ②모든 행(行)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음이고, 애(愛)의 부서짐이고, 이탐이고, 소멸인 열반 → 중생 세상의 조건성인 연기와 조건성이 가라앉은 것으로의 열반의 양쪽 측면.
• 중생들은 이 법의 토대를 보기 어려움.
이때, 부처님이 성취한 법은 분석되는데,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은 어떤 것에 대한 수식이고, 그 어떤 것은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입니다. 즉 ‘takka의 영역을 넘어선 법’에 대해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라고 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 부처님이 성취한 법의 본질은 ‘takka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어서,
2)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다.’라고 수식되는데,
3)이 법은 ①여기(중생 세상)에서의 조건성인 연기와 ②모든 행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의 조건을 놓음이고, 애의 부서짐이고, 이탐이고, 소멸인 열반의 두 가지 토대를 가진다
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부처님을 대표하는 개념 ― atakkāvacara 즉 ‘takka의 영역을 넘어섬’
• 중생을 대표하는 개념 ― ālaya(잡기-잡음) = 유위(有爲-takkāvacara)의 과정에서 형성된 애(愛)의 붙잡는 성질 → 고집(苦集)
• 깨달음 ― 「유위(有爲-takkāvacara) → 무위(無爲-atakkāvacara)」 즉 애(愛)가 형성되는 과정을 넘어섬 → 애멸(愛滅) → 고멸(苦滅)
1) 「다른 견해를 가진, 다른 믿음을 가진, 다른 경향을 가진, 다른 방법으로 정진하는, 다른 스승에게서 온 그대에게 이 법은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 (MN 72-왓차 불 경)
• 십사무기(十事無記)의 치우친 견해와 해탈한 심(心)을 가진 자의 태어남에 대한 왓차곳따 유행승과의 대화에서 부처님의 답변
• 십사무기(十事無記)에 대해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이런 견해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여래는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이런 견해가 없다고 다고 말하는 부처님에게 ‘고따마 존자께서는 어떤 위험을 보고 있기에 이렇게 이 모든 치우친 견해를 가까이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음
• 부처님의 대답 ― 「십사무기(十事無記)는 치우친 견해이고, 얽힌 견해이고, 황폐한 견해이고, 몸부림치는 견해이고, 투쟁하는 견해이고, 묶인 견해입니다. 괴로움과 함께하고, 파괴와 함께하고, 절망과 함께하고, 열기와 함께합니다. 염오(厭惡)로, 이탐(離貪)으로, 소멸(消滅)로,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왓차여, 나는 이런 위험을 보고 있기에 이렇게 이 모든 치우친 견해를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 부처님은 오온(五蘊)의 생겨남-무너짐의 관찰에 의해 치우친 견해가 제거되고 집착 없이 해탈했음
• 해탈한 심(心)을 가진 자는 어디에 태어납니까? ― [아라한의 사후]
• 해탈된 심(心)을 가진 자 즉 윤회하는 중생의 영역에서 벗어난 상태는 takka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 다른 스승에게서 온 그대로서는 알기 어려운 것
• 타고 있던 불이 꺼지면 그 불은 어디로 갔을까? ― 번뇌의 영향 위 즉 유위(有爲)의 불[중생으로의 삶]이 꺼지면 번뇌-무명(無明)-애(愛)를 연료로 이어지던 불은 더 이어지지 못하고 유위(有爲)의 영역[중생 세상]에서 꺼져 존재하지 않게 됨 → 불이 꺼진 무위(無爲)-열반(涅槃)의 실현
• 누진(漏盡)에 의해 탐(貪)-진(嗔)-치(癡)가 부서진 무위의 경지는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알고 사마타-위빳사나로 보지 못하는 다른 중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음
2)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 ― (DN 1-범망경)
; 「이렇게 존재의 소멸(bhavaniroda)/존재로부터 벗어남(vibhava)을 모르는 사람들은 존재에 대해 다양한 주장을 하지만, takka의 영역을 넘어섬 즉 애멸(愛滅)을 실현한 여래는 그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꿰뚫어 압니다. 여래의 이런 측면을 칭송하는 것이 여래에 대한 바른 칭송입니다.」
• 계(戒)에 의해 여래를 칭송하는 것은 작고 하찮은 것
•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은 무엇인가?」
• 여래는 62가지 사견(邪見)에 대해 꿰뚫어 앎 ―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안다. ― ‘이렇게 붙잡고 이렇게 집착된 이 경우의 견해 때문에 이런 이끌림이 있고 이런 다시 태어남이 있다.’라고. 여래는 이것을 꿰뚫어 알고, 이보다 더 높은 것도 꿰뚫어 안다. 그러나 그 앎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자에게 개별적으로 꺼짐이 알려진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수(受)의 자라남과 줄어듦과 매력과 위험과 해방을 있는 그대로 안 뒤에 집착 없이 해탈했다.」
; 62견은 애(愛) 때문에 경험된 것이고 동요이고 몸부림일 뿐이며, 촉(觸)이 조건이고, 육촉처(六觸處)를 원인으로 경험되어 괴로움을 생겨나고 자라나게 함.
• 「이것이 여래가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인, 그것에 의해 여래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칭송하여 말할 수 있는 다른 법들이다.」
; 깨달음 ― 「유위(有爲-takkāvacara) → 무위(無爲-atakkāvacara)」 즉 애(愛)가 형성되는 과정을 넘어섬 → 애멸(愛滅) → 고멸(苦滅)
3) 지혜롭지 못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기준 ― (AN 4.192-경우 경)
• 지혜롭지 못한 자 ― 심오하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법의 의미와 구절을 말하지 못함
• 지혜로운 자 ― 심오하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법의 의미와 구절을 말함
4) 진리의 검증 기준 ― (MN 95-짱끼 경) : 망(望)-진(嗔)-치(癡)가 있는 사람이 설할 수 없는 법
※ lobhanīyā dhammā(바라기 마련인 법들)-luddha(바라는 자), dosanīyā dhammā(싫어하기 마련인 법들)-duṭṭha(싫어하는 자), mohanīyā dhammā(모르기 마련인 법들)-mūḷha(모르는 자)에서 lobhanīyā-dosanīyā-mohanīyā는 망(望-lobha)-진(嗔-dosa)-치(癡-moha)의 동사형인 lubbhati-dussati-muyhati의 미래수동분사이고, luddha-duṭṭha-mūḷha는 과거분사입니다. 그래서 이 경의 주제어는 망(望)-진(嗔)-치(癡)입니다.
• 진리(眞理-saccā)에 대한 입장 : saddhā(믿음)-ruci(경향)-anussava(전승)-ākāraparivitakka(온전한 떠오름의 출현)-diṭṭhinijjhānakkhanti(견해와 통찰의 지속)은 사실과 거짓의 두 가지 보(報)가 있음 → 이것에 대해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완전한 결론을 내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 → ‘나에게 이런 믿음 … 견해와 통찰의 지속이 있다.’라고 말하지 ‘이것만이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완전한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 진리를 보호하는 것 → 그러나 이것이 진리를 아는 것은 아님 → 진리에 대한 앎 → 진리의 성취
• 진리에 대한 앎의 질문 ― 바라기 마련인 법들, 싫어하기 마련인 법들, 모르기 마련인 법들에 대한 검증 → 「바라는-싫어하는-모르는 자에게 있는 그런 몸의 행위와 그런 말의 행위가 있다. 그러므로 이 존자가 설하는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평화롭고, 숭고하고,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독창적이고, 현자에게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법은 바라는-싫어하는-모르는 자에 의해 잘 설해질 수 없는 것이다.」
[2] (MN 95-짱끼 경)의 연장 ― (SN 35.153-방법이 있는가 경)/(AN 3.66-께사뭇띠 경)/(AN 3.67-살하 경)/(AN 4.193-밧디야 경)
이렇게 takka의 영역을 넘어선(atakkāvacara) 법은 망(望)-진(嗔)-치(癡)가 있는 사람이 설할 수 없는 법이어서 진리의 검증 기준입니다. 이때, (MN 95-짱끼 경)이 말하는 다섯 가지 법은 지금여기에 두 가지 보(報)가 있는 법이어서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SN 35.136-방법이 있는가 경)에 의하면 그보다는 나의 안에 탐(貪)-진(嗔)-치(癡)의 유무를 지혜로써 직접 보아서 아는 방법이라고 제시됩니다.
• (MN 95-짱끼 경)이 말하는 지금여기에 두 가지 보(報)가 있는 다섯 가지 법 ― saddhā(믿음)-ruci(경향)-anussava(전승)-ākāraparivitakka(온전한 떠오름의 출현)-diṭṭhinijjhānakkhanti(견해와 통찰의 지속)
• (SN 35.136-방법이 있는가 경) ― 무위(無爲)의 앎의 선언 즉 takka의 영역을 넘어서는 방법은 이 다섯 가지 법들과 다름 → 나의 안에 탐(貪)-진(嗔)-치(癡)의 유무를 지혜로써 직접 보아 아는 방법
그런데 (AN 3.66-께사뭇띠 경) 등은 몇 가지 법들을 기준 삼지 말고 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의 법을 기준으로 하라고 말하는데, (MN 95-짱끼 경)의 다섯 가지 법과 비교됩니다.
• (AN 3.66-께사뭇띠 경)/(AN 3.67-살하 경)/(AN 4.193-밧디야 경)이 같은 주제에 대해 제시하는 법들 ― anussava(전승)-paramparā(계승)-itikira(들음)-takka-naya(문법적 의미)-ākāraparivitakka(온전한 떠오름의 출현)-diṭṭhinijjhānakkhanti(견해와 통찰의 지속)-bhabbarūpatā(가능성)-samaṇo no garūti(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
하지만, 이런 구성의 차이는 상세함이 더해진 설명일 뿐 의미하는 바는 같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MN 95-짱끼 경)과 (SN 35.136-방법이 있는가 경)의 다섯 가지와 (AN 3.66-께사뭇띠 경)/(AN 3.67-살하 경)/(AN 4.193-밧디야 경)의 아홉 가지는 이렇게 분석됩니다.
• anussava(전승)-ākāraparivitakka(온전한 떠오름의 출현)-diṭṭhinijjhānakkhanti(견해와 통찰의 지속)의 세 가지는 공유
• saddhā(믿음)-ruci(경향)은 paramparā(계승)-itikira(들음)-piṭakasampadāna(성전의 자료)-takka-naya(문법적 의미)-bhabbarūpatā(가능성)-samaṇo no garūti(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로 대체
→ paramparā(계승)-piṭakasampadāna(성전의 자료)-naya(문법적 의미)는 anussava(전승)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itikira(들음)은 ruci(경향)과, takka(→takkī)-bhabbarūpatā(가능성)-samaṇo no garūti(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는 saddhā(믿음)과 대체하여 이해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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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 95- 짱끼 경) 등 |
saddhā |
ruci |
anussava |
ākāraparivitakka |
diṭṭhinijjhānakkhan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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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3.66- 께사뭇띠 경) 등 |
takka-bhabbarūpatā-samaṇo no garūti |
itikira |
anussava-paramparā-piṭakasampadāna-naya |
ākāraparivitakka |
diṭṭhinijjhānakkhanti |
이런 이해 위에서 이 다섯 가지 방법은 진리의 검증 기준이 되지 못하고(MN 95-짱끼 경), 무위(無爲)의 앎 즉 깨달음은 이 다섯 가지 방법이 아니라 지혜로써 보아서 알아야 성취할 수 있고(SN 35.136-방법이 있는가 경),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지혜로써 보아서 망(望)-진(嗔)-치(癡)의 법(法)은 버리고 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의 법(法)은 성취하여 머무는 방법을 받아들여야 이익과 행복으로 이끕니다(AN 3.66-께사뭇띠 경)/(AN 3.67-살하 경)/(AN 4.193-밧디야 경).
1. (SN 35.136-방법이 있는가 경)
(SN 35.136-방법이 있는가 경)은 (MN 95-짱끼 경)의 다섯 가지를 제시하면서 이들과 다른 방법으로 무위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을 알려주는데, 내입처(內入處)로 외입처(外入處)를 인식하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을 때 ‘나의 안에 탐진치(貪瞋痴)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탐진치(貪瞋痴)가 없을 때 ‘나의 안에 탐진치(貪瞋痴)가 없다.’라고 분명히 아는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이 다섯 가지는 무위의 앎 즉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법이 못되고, 지혜로써 보아서 아는 것이 무위의 앎 즉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법이라는 의미입니다.
takkī-vīmaṃsī의 용례 경들은 takkī-vīmaṃsī 등 몇 가지 방법에 대해 부처님에 대한 비난이거나, 안락을 주지 못하는 범행이어서 부처님의 깨달음에 미치지 못하는 차이를 설명합니다. 이때, 지혜로써 보아 아는 것이 차별적 지(知)와 견(見)을 완성하는 바른 방법이라는 것이고, 그 완성의 과정이 부처님의 방법입니다.
비구들이여,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으로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 있다.
…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에 의해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안(眼)으로 색(色)을 보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안으로 색을 보면서 안으로 탐진치(貪瞋痴)가 있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탐진치가 없으면 ‘나의 안에 탐진치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런 법들이, 비구들이여, 믿음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경향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전승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알아야 하거나,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알아야 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이런 법들은, 비구들이여, 지혜로써 보면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대덕이시여.” “비구들이여, 이것이 믿음과 다른 방법, 경향과 다른 방법, 전승과 다른 방법,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과 다른 방법, 견해와 통찰의 지속과 다른 방법에 의해 비구가 ‘나는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고 무위(無爲)의 앎을 선언하는 방법이다. … (육내입처-육외입처에 반복)」
2. (AN 3.66-께사뭇띠 경)/(AN 3.67-살하 경)/(AN 4.193-밧디야 경)
한편, (AN 3.66-께사뭇띠 경)/(AN 3.67-살하 경)/(AN 4.193-밧디야 경)은 anussava(전승)-paramparā(계승)-itikira(들음)-takka-naya(문법적 의미)-ākāraparivitakka(온전한 떠오름의 출현)-diṭṭhinijjhānakkhanti(견해와 통찰의 지속)-bhabbarūpatā(가능성)-samaṇo no garūti(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 등에 의해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보다는 불선(不善)-결점이 있는 것-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 되는 것-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과 고통으로 이끄는 것인 망(望)-진(嗔)-치(癡)의 법(法)은 버리고, 선(善)-결점이 없는 것-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온전히 받아 지니면 이익과 행복으로 이끄는 것인 무망(無望)-무진(無嗔)-무치(無癡)의 법(法)은 성취하여 머물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깔라마들이여, 전승에 의해, 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성전의 자료라고 해서, takka를 원인으로, 문법적 의미를 원인으로,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그대들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법들은 불선(不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있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질책되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불익과 고통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버려야 합니다.
…
깔라마들이여, ‘전승에 의해, 계승에 의해, 내가 들었다고 해서, 성전의 자료라고해서, takka를 원인으로, 문법적 의미를 원인으로, 온전한 떠오름의 출현에 의해, 견해와 통찰의 지속에 의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 해서 그대들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스스로 ‘이 법들은 선(善)이고, 이 법들은 결점이 없는 것이고, 이 법들은 현명한 자에 의해 찬양되는 것이고, 이 법들은 온전히 받아 지니면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될 때,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성취하여 머물러야 합니다.」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