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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두 단계로 설명하는 경전들

0 174 2023.03.06 21:38

Ⅱ.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두 단계로 설명하는 경전들


1. sāraṇīyasuttaṃ (AN 3.12-기억해야 하는 것 경)


“tīṇimāni, bhikkhave, rañño khattiyassa muddhāvasittassa yāvajīvaṃ sāraṇīyāni bhavanti. katamāni tīṇi? yasmiṃ, bhikkhave, padese rājā khattiyo muddhāvasitto jāto hoti. idaṃ, bhikkhave, paṭhamaṃ rañño khattiyassa muddhāvasitta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비구들이여,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에게는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이런 세 가지가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태어난 곳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smiṃ padese rājā khattiyo muddhāvasitto hoti. idaṃ, bhikkhave, dutiyaṃ rañño khattiyassa muddhāvasitta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다시 비구들이여, 끄샤뜨리야 왕이 머리에 의식을 치른 곳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두 번째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smiṃ padese rājā khattiyo muddhāvasitto saṅgāmaṃ abhivijinitvā vijitasaṅgāmo tameva saṅgāmasīsaṃ ajjhāvasati. idaṃ, bhikkhave, tatiyaṃ rañño khattiyassa muddhāvasitta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imāni kho, bhikkhave, tīṇi rañño khattiyassa muddhāvasittassa yāvajīvaṃ sāraṇīyāni bhavanti.


다시 비구들이여,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쟁의 승리자로서 그 전쟁의 정상에 선 곳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세 번째이다.


“evamevaṃ kho, bhikkhave, tīṇimāni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āni bhavanti. katamāni tīṇi? yasmiṃ, bhikkhave, padese bhikkhu kesamassuṃ ohāretvā kāsāyāni vatthāni acchādetvā agārasmā anagāriyaṃ pabbajito hoti. idaṃ, bhikkhave, paṭhamaṃ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이런 세 가지가 있다. 어떤 세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비구가 머리와 수염을 깎고, 노란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곳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가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첫 번째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smiṃ padese bhikkhu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idaṃ, bhikkhave, dutiyaṃ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도(苦滅道)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 곳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가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두 번째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smiṃ padese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idaṃ, bhikkhave, tatiyaṃ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aṃ hoti. imāni kho, bhikkhave, tīṇi bhikkhussa yāvajīvaṃ sāraṇīyāni bhavantī”ti. dutiyaṃ.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 곳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비구가 목숨이 있는 한 기억해야 하는 세 번째이다.


2. bahukārasuttaṃ (AN 3.24-아주 유용함 경)


“tayome, bhikkhave, puggalā puggalassa bahukārā. katame tayo? yaṃ, bhikkhave, puggalaṃ āgamma puggalo buddhaṃ saraṇaṃ gato hoti, dhammaṃ saraṇaṃ gato hoti, saṅghaṃ saraṇaṃ gato hoti; ayaṃ, bhikkhave, puggalo imassa puggalassa bahukāro.


비구들이여,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세 가지 이런 사람이 있다. 어떤 셋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 덕분에 어떤 사람이 부처님에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하고, 상가에 귀의한다. 이 사람[덕분이 되는 사람]은, 비구들이여, 이 사람[귀의한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사람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ṃ puggalaṃ āgamma puggal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bhikkhave, puggalo imassa puggalassa bahukāro.


다시,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 덕분에 어떤 사람이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고,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 사람[덕분이 되는 사람]은, 비구들이여, 이 사람[꿰뚫어 안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사람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aṃ puggalaṃ āgamma puggalo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ayaṃ, bhikkhave, puggalo imassa puggalassa bahukāro. ime kho, bhikkhave, tayo puggalā puggalassa bahukārā.


다시,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 덕분에 어떤 사람이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이 사람[덕분이 되는 사람]은, 비구들이여, 이 사람[성취하여 머무는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사람이다.


“imehi ca pana, bhikkhave, tīhi puggalehi imassa puggalassa natthañño puggalo bahukāroti vadāmi. imesaṃ pana, bhikkhave, tiṇṇaṃ puggalānaṃ iminā puggalena na suppatikāraṃ vadāmi, yadidaṃ abhivādanapaccuṭṭhānāñjalikammasāmīcikamma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accayabhesajjaparikkhārānuppadānenā”ti. catutthaṃ.


비구들이여, 이런 세 사람[덕분이 되는 사람]보다 더 이 사람[귀의하고 꿰뚫어 알고 성취하여 머무는 사람]에게 유용한 다른 사람은 없다고 나는 말한다. 또한, 비구들이여, 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합장하고, 여법하게 행하고, 가사와 탁발 음식과 거처와 병(病)의 조건으로부터 필요한 약품을 보시함에 의해서도 이 사람은 이런 세 사람을 위해 잘 보답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한다.


3. vajirūpamasuttaṃ (AN 3.25-금강석 같음 경)


“tayome, bhikkhave,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ṃ. katame tayo? arukūpamacitto puggalo, vijjūpamacitto puggalo, vajirūpamacitto puggalo. katamo ca, bhikkhave, arukūpamacitto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kodhano hoti upāyāsabahulo appampi vutto samāno abhisajjati kuppati byāpajjati patitthīya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seyyathāpi, bhikkhave, duṭṭhāruko kaṭṭhena vā kaṭhalāya vā ghaṭṭito bhiyyosomattāya āsavaṃ deti; evamevaṃ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kodhano hoti upāyāsabahulo appampi vutto samāno abhisajjati kuppati byāpajjati patitthīyati kopañca dosañca appaccayañca pātukaroti. ayaṃ vuccati, bhikkhave, arukūpamacitto puggalo.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이런 세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어떤 셋인가? 오래된 상처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 번갯불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 금강석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오래된 상처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내고 절망한다. 말해진 것이 조금 있어도 화를 내고, 동요하고, 짜증내고, 저항한다.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낸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부정한 오래된 상처는 막대기나 질그릇 조각에 의해 긁혀지면 반복적으로 피고름을 흘린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자주 화를 내고 절망한다. 말해진 것이 조금 있어도 화를 내고, 동요하고, 짜증내고, 저항한다. 성급함과 진(嗔)과 의혹을 드러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오래된 상처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린다.


“katamo ca, bhikkhave, vijjūpamacitto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samuday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o’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seyyathāpi bhikkhave, cakkhumā puriso rattandhakāratimisāyaṃ vijjantarikāya rūpāni passeyya; evamevaṃ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idaṃ dukkhan’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 pe ...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yathābhūtaṃ pajānāti. ayaṃ vuccati, bhikkhave, vijjūpamacitto puggalo.

 

비구들이여, 무엇이 번갯불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집(苦集)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눈 있는 사람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번갯불이 번쩍이는 사이에 형상들을 볼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이것이 고(苦)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 ‘이것이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번갯불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린다.


“katamo ca, bhikkhave, vajirūpamacitto puggal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seyyathāpi, bhikkhave, vajirassa natthi kiñci abhejjaṃ maṇi vā pāsāṇo vā; evamevaṃ kho, bhikkhave, idhekacco puggalo āsavānaṃ khayā ... pe ... upasampajja viharati. ayaṃ vuccati, bhikkhave, vajirūpamacitto puggalo. ‘ime kho, bhikkhave, tayo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n’”ti. pañcamaṃ.

 

비구들이여, 무엇이 금강석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금강석을 자르기 위한 보석이나 돌은 어떤 것도 없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금강석 같은 심(心)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는 세 부류의 사람이다. 


4. āsaṃsasuttaṃ (AN 3.13-꿈꾸는 사람 경)


“tayome, bhikkhave,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ṃ. katame tayo? nirāso, āsaṃso, vigatāso. katamo ca, bhikkhave puggalo nirās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nīce kule paccājāto hoti, caṇḍālakule vā venakule vā nesādakule vā rathakārakule vā pukkusakule vā dalidde appannapānabhojane kasiravuttike, yattha kasirena ghāsacchādo labbhati. so ca hoti dubbaṇṇo duddasiko okoṭimako bavhābādho kāṇo vā kuṇī vā khañjo vā pakkhahato vā, na lābhī annassa pānassa vatthassa yānassa mālāgandhavilepanassa seyyāvasathapadīpeyyassa. so suṇāti — ‘itthannāmo kira khattiyo khattiyehi khattiyābhisekena abhisitto’ti. tassa na evaṃ hoti — ‘kudāssu nāma mampi khattiyā khattiyābhisekena abhisiñcissantī’ti!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nirāso.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셋인가? 꿈이 없는 사람과 꿈꾸는 사람과 꿈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꿈이 없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낮은 집안에 태어난 자이다. 가난하고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없고 생계가 힘든 불가촉천민, 바구니 만드는 자, 사냥꾼, 수레 공, 청소부의 집안이다. 그곳에는 음식과 옷이 어렵게 얻어진다. 그리고 그는 안색이 나쁘고, 용모가 추하고, 키가 작고, 병이 잦고, 외눈이거나, 기형이거나, 절름발이거나, 반신불수이고,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과 탈 것과 꽃과 향과 바를 것 그리고 침상과 거처와 밝힐 것을 충분히 얻지 못한다. 그는 ‘끄샤뜨리야들 가운데 이런 이름의 끄샤뜨리야가 끄샤뜨리야의 신성한 의식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라고 듣는다. 그에게 ‘끄샤뜨리야들은 언제 나를 신성한 의식에 의해 왕위에 올릴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꿈이 없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katamo ca, bhikkhave, puggalo āsaṃso? idha, bhikkhave, rañño khattiyassa muddhāvasittassa jeṭṭho putto hoti ābhiseko anabhisitto acalappatto. so suṇāti — ‘itthannāmo kira khattiyo khattiyehi khattiyābhisekena abhisitto’ti. tassa evaṃ hoti — ‘kudāssu nāma mampi khattiyā khattiyābhisekena abhisiñcissantī’ti!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āsaṃso.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꿈꾸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에게 아직 신성한 의식을 치르지 않은 그러나 확정된 첫째 왕자가 있다. 그는 ‘끄샤뜨리야들 가운데 이런 이름의 끄샤뜨리야가 끄샤뜨리야의 신성한 의식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라고 듣는다. 그에게 ‘끄샤뜨리야들은 언제 나를 신성한 의식에 의해 왕위에 올릴까?’라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꿈꾸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katamo ca, bhikkhave, puggalo vigatāso? idha, bhikkhave, rājā hoti khattiyo muddhāvasitto. so suṇāti — ‘itthannāmo kira khattiyo khattiyehi khattiyābhisekena abhisitto’ti. tassa na evaṃ hoti — ‘kudāssu nāma mampi khattiyā khattiyābhisekena abhisiñcissantī’ti! taṃ kissa hetu? yā hissa, bhikkhave, pubbe anabhisittassa abhisekāsā sā paṭippassaddhā.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vigatāso. ime kho, bhikkhave, tayo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lokasmiṃ.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꿈에서 벗어난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머리에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이 있다. 그는 ‘끄샤뜨리야들 가운데 이런 이름의 끄샤뜨리야가 끄샤뜨리야의 신성한 의식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라고 듣는다. 그에게 ‘끄샤뜨리야들은 언제 나를 신성한 의식에 의해 왕위에 올릴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전에 왕위에 오르지 않은 자의 신성한 의식에 대한 꿈이 가라앉았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이것이 꿈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이, 비구들이여,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 


“evamevaṃ kho, bhikkhave, tayo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bhikkhūsu. katame tayo? nirāso, āsaṃso, vigatāso. katamo ca, bhikkhave, puggalo nirāso?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dussīlo hoti pāpadhammo asuci saṅkassarasamācāro paṭicchannakammanto assamaṇo samaṇapaṭiñño abrahmacārī brahmacāripaṭiñño antopūti avassuto kasambujāto. so suṇāti — ‘itthannāmo kira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ī’ti. tassa na evaṃ hoti — ‘kudāssu nāma ahampi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āmī’ti!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nirāso.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는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어떤 셋인가? 꿈이 없는 사람과 꿈꾸는 사람과 꿈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꿈이 없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계(戒)를 경시하고, 성품이 악하고, 불결하고, 의심하는 습관이 있고, 행위를 숨기고, 거짓된 비구이고, 사문을 사칭하고, 범행(梵行)을 닦는 자가 아니고, 범행을 닦는 자를 사칭하고, 안이 썩었고, 욕망이 가득하고, 오염된 자이다. 그는 ‘이런 이름의 비구가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듣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나는 언제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까!’라고. 비구들이여, 이 사람이 꿈이 없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katamo ca, bhikkhave, puggalo āsaṃso? idha, bhikkhave, bhikkhu sīlavā hoti kalyāṇadhammo. so suṇāti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ī’ti. tassa evaṃ hoti — ‘kudāssu nāma ahampi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āmī’ti!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āsaṃso.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꿈꾸는 사람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계(戒)를 중시하고. 선한 성품을 가졌다. 그는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듣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 ‘나는 언제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까!’라고. 비구들이여, 이 사람이 꿈꾸는 사람이라고 불린다.


“katamo ca, bhikkhave, puggalo vigatāso? idha, bhikkhave, bhikkhu arahaṃ hoti khīṇāsavo. so suṇāti — ‘itthannāmo kira bhikkhu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ī’ti. tassa na evaṃ hoti — ‘kudāssu nāma ahampi āsavānaṃ khayā ... pe ...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issāmī’ti! taṃ kissa hetu? yā hissa, bhikkhave, pubbe avimuttassa vimuttāsā sā paṭippassaddhā.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vigatāso. ime kho, bhikkhave, tayo puggalā santo saṃvijjamānā bhikkhūsū”ti. 


그러면 비구들이여, 누가 꿈에서 벗어난 사람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번뇌 다한 아라한이다. 그는 ‘이런 이름의 비구가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라고 듣는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나는 언제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까!’라고. 그 원인은 무엇인가? 참으로 이전에 해탈하지 않은 자의 해탈에 대한 꿈이 가라앉았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꿈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불린다. 이런 세 부류의 사람들이, 비구들이여, 비구들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 (AN 3.12-기억해야 하는 것 경)과 (AN 3.24-아주 유용함 경)은 세 가지를 비교하게 해줍니다.


• 크샤뜨리야 왕이 기억할 곳 - ①태어난 곳, ②왕이 된 곳, ③최고 지도자가 된 곳

• 비구가 기억할 곳 - ①출가한 곳, ②사성제를 꿰뚫어 안 곳, ③아라한 된 곳


• 어떤 사람에게 크게 도움 되는 것 - ①삼보에 귀의한 것, ②사성제를 꿰뚫어 안 것, 

                                   ③아라한 된 것


⇒ 삶의 향상의 두 단계 - ①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 ②아라한 되는 것

                      & ①꿈꾸는 사람, ②꿈에서 벗어난 사람

 

이때 각각의 세 가지를 재배열하면 「태어난 곳-출가한 곳-귀의한 것, 왕이 된 곳-사성제를 꿰뚫어 안 곳-사성제를 꿰뚫어 안 것, 최고 지도자가 된 곳-아라한 된 곳-아라한 된 것」의 연결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구가 출가한 곳과 어떤 사람이 삼보에 귀의한 것은 크샤뜨리야 왕의 태어난 곳과 견주어집니다. 그렇다면 출가 또는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자(佛子)로서의 새로운 태어남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어서 왕이 되는 것과 견주어지는 것은 사성제를 꿰뚫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라한을 성취하는 것은 완결이므로 논의 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사성제를 꿰뚫음'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어디에 해당하는지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관식을 거쳐 왕이 되는 것에 비유되는 의미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yathābhūtaṃ pajānāti)」과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의 용례 분석은 '사성제를 꿰뚫음'이 예류자(預流者)인 것을 알려줍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AN 3.25-금강석 같음 경)은 


1) 두 단계의 깨달음을 말해줍니다. 사성제를 꿰뚫은 자로서의 예류자와 번뇌를 소멸한 아라한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의 경전들과 같은 주제의 경입니다. 


2) [예류자] — 사성제를 꿰뚫음을 ‘마치 눈을 가진 자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번갯불로 형상을 보듯이’라고 비유함으로써 법안(法眼)을 얻음을 말해주는데, 무엇보다도 바른 삼매에 들어있는 제한된 시간 동안의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는 점을 확인해 줍니다.


3) [아라한] — 심해탈-혜해탈의 실현을 ‘보석이건 돌이건 금강석으로 부수지 못할 것이 없듯이’라고 비유함으로써 완성된 깨달음을 나타냅니다. 


(*) 대승불교의 금강(金剛) 즉 금강경 등에서 쓰이는 금강의 근거가 되는 경전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또한, (AN 3.13-꿈꾸는 사람 경)은 꿈꾸는 사람과 꿈에서 벗어난 사람의 비유로써 이러한 깨달음의 과정을 다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 그러면 부처님은 왜 사쌍(四雙)의 성자(聖者) 가운데 예류자(預流者)와 아라한(阿羅漢)만을 언급하는 것입니까? 예류자가 가지는 두 가지 특징을 통해 이해해 보았습니다.


• 특징1. 예류자 – 대 부분의 괴로움은 멸진-해소되어 남아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음


(SN 56.49-산의 왕 시네루 경1)은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산의 왕 시네루에 7개의 완두콩만한 자갈을 올려놓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비구들이여, 올려놓은 7개의 완두콩만한 자갈들과 산의 왕 시네루 중에 어떤 것이 더 많은가?」


라는 비유를 통해 견해를 갖추고 실현한 성스러운 제자 즉 예류자에게는 대부분의 괴로움이 다하고 소진되어 남아있는 괴로움은 아주 적다고 말합니다. 예류자의 삶이 얼마나 행복[불만족의 해소]인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진리 상윳따의 이어지는 11개의 경(SN 56.50~60)은 비유를 달리하면서 동일한 내용을 설하고 있는데, 예류자의 경지에 대한 강조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SN 13-관통 상윳따)도 동일한 내용을 다른 비유로써 설명하는데, 11개 경전 중 10개(SN 13.1~10)은 「법의 관통은 이렇게 큰 이익이고, 법안을 얻음은 이렇게 큰 이익이다.」고 합니다(*). 


(*) 이어지는 1개의 경전(SN 13.11-산 경3)은 「견해를 갖춘 사람은 이렇게 큰 성취가 있고, 이렇게 큰 실다운 지혜를 가졌다.」라고 설합니다.


• 특징2. 예류자 - 깨달음이 보장된 자리


(SN 13.1-손톱 끝 경)~(SN 13.11-산 경3)은 


evameva kho, bhikkhave, ariyasāvakassa diṭṭhisampannassa puggalassa abhisametāvino etadeva bahutaraṃ dukkhaṃ yadidaṃ parikkhīṇaṃ pariyādiṇṇaṃ; appamattakaṃ avasiṭṭhaṃ. neva satimaṃ kalaṃ upeti na sahassimaṃ kalaṃ upeti na satasahassimaṃ kalaṃ upeti purimaṃ dukkhakkhandhaṃ parikkhīṇaṃ pariyādiṇṇaṃ upanidhāya yadidaṃ sattakkhattuṃparamatā.


이처럼, 비구들이여, 견해를 갖추고 실현한 성스러운 제자에게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괴로움이 더 많고, 남아있는 것은 적다. 최대 일곱 번의 태어남은 완전히 다하고 완전히 소진된 이전의 괴로움 무더기와 비교하여 16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160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160만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 하고, (SN 15.10-사람 경)은 


“yato ca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ukkhaṃ dukkhasamuppādaṃ, dukkhassa ca atikkamaṃ.

ariyaṃ caṭṭhaṅgikaṃ maggaṃ, dukkhūpasamagāminaṃ.


고(苦)와 고의 자라남과 고의 극복

그리고 고의 가라앉음으로 이끄는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의

성스러운 진리를 바른 지혜로 볼 때


“sa sattakkhattuṃparamaṃ, sandhāvitvāna puggalo.

dukkhassantakaro hoti, sabbasaṃyojanakkhayā”ti. dasamaṃ.


그 사람은 최대 일곱 번을 옮겨간 뒤에

모든 족쇄가 부서져 괴로움을 끝낸다.


라고 하여, 예류자에게는 최대 일곱 번의 태어남만이 남아있다고 알려줍니다. 즉 일곱 번의 윤회하는 삶 이내에 아라한을 성취하여 여덟 번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류자를 성취하였다는 것은 이렇게 아라한을 보장받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일래자(一來者)나 불환자(不還者)에 비해 예류자(預流者)를 특히 더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두 단계의 깨달음을 말합니다. 일단 예류자까지만 도달하면 아라한은 보장되기 때문입니다. 


(SN 56.3-좋은 가문의 아들 경1)은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사성제(四聖諦)의 있는 그대로의 관통을 위해서였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할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사성제의 있는 그대로의 관통을 위해서일 것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현재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사성제의 있는 그대로의 관통을 위해서이다.


라고 하여 출가의 목적을 예류자의 성취로 제시하는데, (SN 56.4-좋은 가문의 아들 경2), (SN 56.5-사문바라문 경1), (SN 56.6-사문바라문 경2) 등에서도 유사하게 설명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예류자가 되면 아라한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우선 예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는 퇴보하지 않음에 의해 보장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깨달음을 두 단계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 1단계의 깨달음 : 예류자 – 해탈된 삶을 향해 벗어남의 길에 오른 수행자

                   ; 사념처(四念處) → 여실지견(如實知見)


    2단계의 깨달음 : 아라한 – 해탈된 삶의 실현 

                   ; 사마타-위빳사나 → 해탈지견(解脫知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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