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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여실지견(如實知見) → 염오(厭惡)-이탐(離貪)-소멸(消滅)[해탈(解脫)]

0 206 2023.03.06 21:39

Ⅲ. 여실지견(如實知見) → 염오(厭惡)-이탐(離貪)-소멸(消滅)[해탈(解脫)]


이렇게 예류자(預流者)의 경지를 지시하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것(yathābhūtaṃ pajānāti)」는 (SN 22-온(蘊) 상윳따)의 여러 경들을 중심으로 다시 서술됩니다. 


(SN 22:59-무아상 경) 등은 오온(五蘊) 각각에 대해 ①무아(無我)를 선언하고, ②무상(無常)과 고(苦)에 대한 동의에 이어 ③「‘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라고 하여 여실지견(如實知見)을 이끕니다. 그리고 경은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ṅ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에 대해서도 염오(厭惡)하고, 수(受)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상(想)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행(行)들에 대해서도 염오하고, 식(識)에 대해서도 염오한다. 염오하는 자는 이탐(離貪)한다. 이탐으로부터 해탈(解脫)한다. 해탈했을 때 ‘나는 해탈했다.’라는 앎이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고 하여 깨달음의 과정을 이어서 말해줍니다.


경은 이렇게


• 예류자(預流者) -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자(yathābhūtaṃ pajānāti)

• 아라한(阿羅漢) -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한 자

                  (yathābhūtaṃ viditvā anupādāvimutto hoti)


의 구체적 의미를 알려줍니다. 즉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예류자는 오온(五蘊)의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는 자이고, 있는 그대로 안 뒤 집착 없이 해탈한 아라한은 염오-이탐-소멸[해탈]의 과정을 통해 집착없는 삶을 완성한 자인 것입니다.



[참고] dhammacakkhu[법안(法眼)]의 두 가지 용례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예류자를 설명하는 용어로는 법안(法眼-dhammacakkhu)도 있습니다. 그런데 법안(法眼)은 두 가지 동사와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1. dhammacakkhuṃ uppajjati


이때 uppajjati는 to be born; arises인데, '법안이 생기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에서 대부분의 경우는 udapādi로 나타나는데 arose; originated. (aor. of udapajjati)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특별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유형의 dhammacakkhu는


dhammacakkhuṃ udapādi —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ṃ taṃ nirodhadhamman”ti.


‘자라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법안(法眼)이 생겼다.


의 형태로 16번 나타납니다. 가르침이 설해지면 가르침에 의해 법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2. dhammacakkhupaṭilābho


이때 paṭilābho는 attainment; acquisition; obtaining.인데, '법안을 얻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공부 기준에 모두 열 번 나타나는데, (SN 13-관통 상윳따)의 열 개 경전입니다.(SN 13:1~SN 13:10)


evaṃ mahatthiyo kho, bhikkhave, dhammābhisamayo; evaṃ mahatthiyo dhammacakkhupaṭilābho””ti.


비구들이여, 법의 관통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고, 법안을 얻음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다.


3. 두 표현의 차이에 대한 이해


dhammacakkhuṃ udapādi는 꼰단냐 존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라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법안(法眼)이 생겼다.」라는 말은 고멸(苦滅)의 가능성에 대한 공감 즉 믿음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dhammacakkhupaṭilābho(법안을 얻음)은 (SN 13-관통 상윳따)의 경들에서 ‘이제 최대 일곱 생만이 남아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예류자인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법안이 생김(dhammacakkhuṃ udapādi)과 법안을 얻음(dhammacakkhupaṭilābho)은 다릅니다. 가르침을 통해 고멸(苦滅)의 가능성에 대한 공감 즉 믿음이 생긴 것으로의 법안(法眼)이 생기면 이어지는 공부를 통해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꿰뚫음으로써 법(法)을 관통하고 여실지견(如實知見)한 예류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법안이 열림(dhammacakkhuṃ udapādi)을 예류도(預流道)를 얻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비교 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4. 예외적으로 dhammacakkhuṃ uppajjati가 나타나는 경은 (AN 3.95-사라다 경)인데, 법안이 생기는 것이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의 성취여서 법을 드러나게 하여 법의 위빳사나로 연결되는 과정의 경지인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에 의해 법안이 생기면 법의 위빳사나에 의해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법안(法眼)을 얻어 예류자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법안(法眼)]이 생김 → 함께 견(見)이 생김 → 유신견(有身見)과 의심과 계금취(戒禁取)의 세 가지 족쇄가 버려짐 → 간탐과 진에의 두 가지 법을 제거하고 죽는다면, 이 세상으로 다시 오게 묶는 족쇄가 없음


• 법안(法眼)의 생김 =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 = 법(法)의 드러남

→ 견(見)이 생김 = 법(法)의 위빳사나 = 무상(無常)의 관찰 

→ 여실지견(如實知見) =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가 버려짐 = 예류자(預流者)

→ 욕탐(慾貪)-간탐-소유의 관심과 진에의 제거 = 불환자(不還者) = 이 세상으로 다시 오게 묶는 족쇄가 없음


; 이런 과정을 진행하는 그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무는 상태인데, 상수멸까지의 단계적 과정을 포함해서 이해하면, 삼매를 닦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성과를 법안(法眼)의 생김~불환자의 과정에 걸쳐 설명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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