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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확장

의지처를 가진 자(saraṇo)와 무위의 앎(aññā)이 생긴 자 - (출가한 자와 의지처를 가진 자의 구분)

의지처를 가진 자(saraṇo)와 무위의 앎(aññā)이 생긴 자

(출가한 자와 의지처를 가진 자의 구분)


삼귀의(三歸依)의 중심 개념인 saraṇa(의지처)에 연결된 saraṇo는 의지처를 가진 자입니다. 무위의 앎(aññā)을 가진 자와 대비되어 나타남으로써 아라한을 성취하기 이전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자들을 의지한 부처님의 제자 상태를 지시한다고 하겠습니다.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ṃ saraṇaṃ gacchāmi. saṅghaṃ saraṇaṃ gacchāmi. 의지처인 부처님에게로 나는 갑니다. 의지처인 가르침에게로 나는 갑니다. 의지처인 성자들에게로 나는 갑니다.


그런데 saraṇo(의지처를 가진 자)는 pabbajita: a monk. (m.)(출가자)와 구분해야 합니다. pabbajita는 재가의 삶을 버리고 출가한 다양한 종교의 출가자를 의미한다면, saraṇo는 불(佛)-법(法)-승(僧) 삼보(三寶)를 의지처로 가진 자 즉 불교에서 출가한 비구를 지시하기 때문입니다. 


(SN 16.11-의복 경)에서 툴라난다 비구니는 마하깟사빠 존자를 전에 외도였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마하깟사빠 존자는 부처님의 출가의 변과 같은 이유로 출가하였는데, 출가한 이후 어느 때에 부처님을 만나 이렇게 생각하고 말합니다. ―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참으로 내가 스승을 보게 된다면, 오직 세존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선서를 보게 된다면, 오직 세존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정등각을 보게 된다면, 오직 세존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도반이여, 그런 나는 거기서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절한 뒤 세존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저의 스승이시고 저는 제자입니다.'라고」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5&wr_id=4 

 

심(心)으로 모든 것을 갖춘 제자라고 그를 찬탄하면서 부처님은 법을 설합니다. 그리고 마하깟사빠 존자는 단지 칠 일 동안 의지처를 가진 자로서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었고, 팔 일째에 무위(無爲)의 앎이 생깁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출가와 의지처를 가진 자가 되는 것이 같은 사건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 출가한 자와 의지처를 가진 자는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saraṇo(의지처를 가진 자)는 (SN 16.11-의복 경) 외에 (MN 124-바꿀라 경)에도 나타납니다. 출가 이후 80년의 삶을 설명하는 가운데 (SN 16.11-의복 경)과 같은 서술을 통해 단지 칠 일 동안 의지처를 가진 자로서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었고, 팔 일째에 무위(無爲)의 앎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3_04&wr_id=1 

 

그래서 바꿀라 존자의 경우에도 나체 수행자 깟사빠와 대화하는 시점이 출가한 지 80년이라는 것과 saraṇo(의지처를 가진 자)가 된 시점을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이 두 시점을 하나로 이해하면 이 경은 바꿀라 존자가 부처님의 깨달음과 동시에 saraṇo(의지처를 가진 자)가 되었다고 가정해도 최소 부처님 사후 35년 뒤에 설해진 경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초기불전연구원의 맛지마 니까야(대림 스님 옮김) 제4권 주해 296이 소개하듯이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MA.iv.197)는 이 경을 제2차 결집에서 합송되었다고 주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석은 4부 니까야가 1차 결집에서 합송된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는 큰 원칙을 훼손합니다. 2차 결집에서 합송된 경을 담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경이 이 원칙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경이 최소 부처님 사후 35년 뒤에 설해졌다는 이해를 타파해야 하는데, 바로 출가자와 saraṇo(의지처를 가진 자)가 된 시점을 구분해서 이해할 때 가능합니다.


1. sattāhameva … saraṇo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iṃ의 용례 ― (MN 124-바꿀라 경)/(SN 16.11-의복 경)


sattāhameva kho ahaṃ, āvuso, saraṇo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iṃ; atha aṭṭhamiyaṃ aññā udapādi 도반이여, 단지 칠 일 동안 나는 의지처를 가진 자로서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먹었소. 팔 일째에 무위(無爲)의 앎이 생겼소.”


※ ayaṃ vuccati, bhikkhave — ‘bhikkhu arittajjhāno viharati satthusāsanakaro ovādapatikaro, amoghaṃ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ati’ 이 사람은, 비구들이여, ‘비구는 방향타를 가지고[옳은 방향으로] 선(禪)을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배운 대로 행하면서 머문다. 사람들의 탁발 음식을 유용하게 먹는다.’라고 불린다. 


2. saraṇo(의지처)의 용례


1) attadīpo viharati attasaraṇo anaññasaraṇo, dhammadīpo dhammasaraṇo anaññasaraṇo 스스로 섬이 되어 머물고, 스스로 의지처가 되어 머물고, 남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하여 머물고, 법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고, 다른 것을 의지처로 하여 머물지 말라.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2&wr_id=13참조


2) saraṇo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iṃ의 용례 ― (MN 124-바꿀라 경)/(SN 16.11-의복 경)


3) micchāpaṭipadā. tasmā eso dhammo saraṇo. … sammāpaṭipadā. tasmā eso dhammo araṇo 삿된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화의 법이다. … 바른 실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평화의 법이다. ― (MN 139-평화의 분석 경)


• raṇa: war; battle; sin; fault. (nt.) → saraṇa = with raṇa = 불화 → araṇa = 평화


4) (AN 4.160-선서의 율 경)/(AN 5.156-정법을 혼란스럽게 함 경3)


“puna caparaṃ, bhikkhave, ye te bhikkhū bahussutā āgatāgamā dhammadharā vinayadharā mātikādharā, te na sakkaccaṃ suttantaṃ paraṃ vācenti. tesaṃ accayena chinnamūlako suttanto hoti appaṭisaraṇo. ayaṃ, bhikkhave, tatiyo dhammo saddhammassa sammosāya antaradhānāya saṃvattati.


다시, 비구들이여, 많이 배웠고, 가르침을 계승하고, 법(法)을 명심하고, 율(律)을 명심하고, 논모(論母)를 명심하는 그 비구들은 진지하게 경을 남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이 죽은 뒤에 경들은 뿌리가 잘리어 귀의처가 되지 못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正法)을 혼란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세 번째 법이다. 


“puna caparaṃ, bhikkhave, ye te bhikkhū bahussutā āgatāgamā dhammadharā vinayadharā mātikādharā, te sakkaccaṃ suttantaṃ paraṃ vācenti. tesaṃ accayena nacchinnamūlako suttanto hoti sappaṭisaraṇo. ayaṃ, bhikkhave, tatiyo dhammo saddhammassa ṭhitiyā asammosāya anantaradhānāya saṃvattati.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들은 많이 배웠고, 가르침을 계승하고, 법(法)을 명심하고, 율(律)을 명심하고, 논모(論母)를 명심하는 그 비구들은 진지하게 경을 남에게 가르친다. 그들이 죽은 뒤에도 경들은 뿌리가 잘리지 않아 귀의처가 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정법(正法)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혼란하지 않게 하고 사라지지 않게 하는 세 번째 법이다. 


5) kammassakomhi, kammadāyā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ṭisaraṇo/kammappaṭisaraṇo 


『나는 불교를 믿는다』 제2부 Ⅴ.업장소멸(業障消滅) 중에서


업에 대한 이런 이해 위에서 중생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 「kammassakā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중생들은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MN 135-업 분석의 짧은 경)/(AN 5.57-반복 숙고해야 하는 경우 경)/(AN 10.216-기어감의 경)


마찬가지로 중생에 속한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정의됩니다. ― 「kammassakomhi kammadāyā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aṭisaraṇo 나는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AN 5.57-반복 숙고해야 하는 경우 경)/(AN 10.48-출가자에 의한 반복 경)


그리고 중생에 속한 다른 사람 역시 같은 방법으로 정의됩니다. ― 「kammassako ayamāyasmā kammadāyādo kammayoni kammabandhu kammappaṭisaraṇo 이 존자는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AN 5.161-노여움의 제거 경1)


이때, 주제에 따라 (MN 135-업 분석의 짧은 경)은 ‘업이 중생들을 저열함과 뛰어남으로 구분한다.’라고 이어지고, 다른 경들은 모두 ‘(나는-남은-중생은) 선(善)하거나 악(惡)한 업을 짓고 그것을 잇는다.’라고 이어집니다.


이렇게 나는 나의 업을 잇는 존재입니다. 어떤 업들을 짓고 그 업들을 이어서 지금 이런 존재 상태를 만들고, 이런 내가 지금 다시 업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지난 삶의 누적 위에 지금 삶의 결과를 쌓으며 변해가는 것이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3. raṭṭhapiṇḍaṃ의 용례


1)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iṃ ― (MN 124-바꿀라 경)/(SN 16.11-의복 경)


2)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ati ― (AN 1.51-60-손가락을 튕길 만큼의 품)/(AN 1.382-493-562-다른 손가락 튕김 품)


※ ayaṃ vuccati, bhikkhave — ‘bhikkhu arittajjhāno viharati satthusāsanakaro ovādapatikaro, amoghaṃ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ati’ 이 사람은, 비구들이여, ‘비구는 방향타를 가지고[옳은 방향으로] 선(禪)을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배운 대로 행하면서 머문다. 사람들의 탁발 음식을 유용하게 먹는다.’라고 불린다. 


• (AN 1.51-60-손가락을 튕길 만큼의 품) ―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ṃ. taṃ sutavā ariyasāvako yathābhūtaṃ pajānāti. tasmā ‘sutavato ariyasāvakassa cittabhāvanā atthī’ti vadāmī”ti. 비구들이여, 이 심(心)은 빛난다. 그리고 그것은 손님인 오염원에서 벗어났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래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심(心)을 닦는다.’라고 나는 말한다.


; 손가락을 튕길 만큼의 시간이라도 자애의 마음[자심(慈心)]을 추구한다면(āsevati)-닦는다면(bhāveti)-사고한다면(manasi karoti), 이 비구는 방향타를 가지고[옳은 방향으로] 선(禪)을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배운 대로 행하면서 머문다. 사람들의 탁발 음식을 유용하게 먹는다고 불림.


• (AN 1.382-493-562-다른 손가락 튕김 품) ― “accharāsaṅghātamattampi ce, bhikkhave, bhikkhu paṭhamaṃ jhānaṃ bhāveti, ayaṃ vuccati, bhikkhave — ‘bhikkhu arittajjhāno viharati, satthusāsanakaro ovādapatikaro, amoghaṃ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ati’. ko pana vādo ye naṃ bahulīkarontī”ti!


만약, 비구들이여, 비구가 손가락을 튕길 만큼이라도 초선(初禪)(*)을 닦으면, 이 사람은, 비구들이여, ‘비구는 방향타를 가지고[옳은 방향으로] 선(禪)을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배운 대로 행하면서 머문다. 사람들의 탁발 음식을 유용하게 먹는다.’라고 불린다. 그러니 그것을 많이 행하는 자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 사선(四禪)-사심해탈(四心解脫)-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팔승처(八勝處-여덟 가지 정복의 경지)-팔해탈(八解脫-여덟 가지 해탈)-열 가지 까시나-부정(不淨)의 상(想)~소멸의 상(想)-무상(無常)의 상(想)~부푼 상(想)-계속해서 기억해야 하는 여섯 가지-입출식념(入出息念)-죽음에 대한 사띠-몸에 속한 사띠-가라앉음을 계속해서 기억함-초선~제사선이 함께한 오근/오력을 닦음에 반복


Comments

대원행 01.26 20:30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3_04&wr_id=2 참조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24. 바꿀라 경[출가한 자와 의지처를 가진 자 & 경의 서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