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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 확장

Ⅱ. 니간타 나따뿟따의 죽음 이후와 관련된 세 개의 경

Ⅱ. 니간타 나따뿟따의 죽음 이후와 관련된 세 개의 경 ― (DN 29-정신경)/(DN 33-합송경)/(MN 104-사마가마 경)


니간타(지금의 자이나교)의 교주 나따뿟따가 죽자 그의 제자들은 서로 다투며 혼란해집니다. 서로 간에 오직 처벌만이 있는 듯하였고, 재가 제자들도 싫증 내고 불쾌해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 상황과 관련해서 설해진 경이 세 개가 있는데, (DN 29-정신경)과 (DN 33-합송경) 그리고 (MN 104-사마가마 경)입니다. 경들은 그 원인으로 법(法)과 율(律)이 잘못 설해지고 잘못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지 않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않고 바르게 깨달은 자[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선언되지 않고 탑이 부서지고 귀의처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런 전제 위에서 (DN 29-정신(淨信) 경)은 정등각이 아닌 스승이 설한 법(法)과 율(律) 그리고 정등각이 설한 법과 율에서의 제자들의 바른 처신을 설명하는데, 정등각이 아닌 스승이 설한 법과 율에서는 자신이 실천하지도, 남을 부추기지도 말고 그 법에서 벗어나야 하고, 정등각이 설한 법과 율에서는 자신도 실천하고, 남도 부추겨서 그 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 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설해진 법(法)의 특징 ― 「보면서 보지 못한다(‘passaṃ na passatī’ti)」 


그리고 (DN 33-합송(合誦) 경)은 잘 설해지고 잘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고 가라앉음으로 이끌고 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선언된 우리의 법을 모두 합송하고, 분쟁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때 이 범행이 오래 유지되고 오래 머물게 되는데, 그것이 많은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번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경은 하나로 구성된 법들로부터 열로 구성된 법들까지의 구성으로 법을 정리하여 합송을 이끕니다. 


이어서 (MN 104-사마가마 경)은 스승이신 부처님의 사후에도 길과 실천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참으로 길과 실천은, 시공을 넘어서서, 불교인 한 흔들림 없이 지켜내야 하는 중심입니다.


1. 공통된 상황 


tena kho pana samayena nigaṇṭho nāṭaputto pāvāyaṃ adhunākālaṅkato hoti. tassa kālaṅkiriyāya bhinnā nigaṇṭhā dvedhikajātā bhaṇḍanajātā kalahajātā vivādāpannā aññamaññaṃ mukhasattīhi vitudantā viharanti — “na tvaṃ imaṃ dhammavinayaṃ ājānāsi, ahaṃ imaṃ dhammavinayaṃ ājānāmi. kiṃ tvaṃ imaṃ dhammavinayaṃ ājānissasi! micchāpaṭipanno tvamasi, ahamasmi sammāpaṭipanno. sahitaṃ me, asahitaṃ te. purevacanīyaṃ pacchā avaca, pacchāvacanīyaṃ pure avaca. adhiciṇṇaṃ te viparāvattaṃ. āropito te vādo. niggahitosi, cara vādappamokkhāya; nibbeṭhehi vā sace pahosī”ti. vadhoyeva kho maññe nigaṇṭhesu nāṭaputtiyesu vattati. yepi nigaṇṭhassa nāṭaputtassa sāvakā gihī odātavasanā tepi nigaṇṭhesu nāṭaputtiyesu nibbinnarūpā virattarūpā paṭivānarūpā yathā taṃ durakkhāte dhammavinaye duppavedite aniyyānike anupasamasaṃvattanike asammāsambuddhappavedite bhinnathūpe appaṭisaraṇe.


그때 니간타 나따뿟다가 빠와에서 죽은 뒤의 무렵이었다. 그가 죽자 분열된 니간타들은 둘로 갈라져서 다툼을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키고 논쟁에 빠지고 서로 간에 입의 칼로 찌르며 머물렀다. — ‘그대는 이 법(法)과 율(律)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잘못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 ‘나는 일관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한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다. 말을 취소하라.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명해 보라.’라고. 


생각건대, 니간타 나따뿟따의 제자들에게는 오직 처벌만이 있는 듯하였다. 니간타 나따뿟따의 흰옷을 입은 재가 제자들도 니간타 나따뿟따의 제자들에게 싫증 내는 모습이었고 불쾌해하는[좋아하지 않는, 싫어하는, 바랜] 모습이었고 배척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법(法)과 율(律)이 잘못 설해지고 잘못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지 않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않고 바르게 깨달은 자[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선언되지 않고 탑이 부서지고 귀의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2. 개별적 상황


1) pāsādikasuttaṃ(DN 29-정신경) → 설자(說者) - 부처님


정등각이 아닌 스승이 선언한 법과 율 그리고 정등각이 선언한 법과 율의 차이를 설명하는 가운데 부처님[불(佛)]과 비구 승가[승(僧)]의 우월함, 그리고 「‘passaṃ na passatī’ti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는 문구를 통해 정등각에 의해 잘 설해지고 잘 드러내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범행(梵行)[법(法)]을 특징(●)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부처님이 실다운 지혜로 지시하여 설한 법들을 모두가 함께 모이고 평등하게 모여서 서로서로 뜻과 뜻을 합치하고 문장과 문장을 합치하여 합송 해야 하며 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범행(梵行)이 길이 전해지고 오래 머물게 해야 하며, 이것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번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부처님이 실다운 지혜로 지시하여 설한 법들로는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의 일곱 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입니다. 


(*) 중생구제 즉 포교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 - 「스승은 법을 설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길을 걷는다.」(AN 3.61-상가라와 경)


● ‘passaṃ na passatī’ti 보면서 보지 못한다. ― 『나는 불교를 믿는다』 156쪽 참조


“yāvatā kho, cunda, etarahi satthāro loke uppannā, nāhaṃ, cunda, aññaṃ ekasatthārampi samanupassāmi evaṃlābhaggayasaggappattaṃ yatharivāhaṃ. yāvatā kho pana, cunda, etarahi saṅgho vā gaṇo vā loke uppanno; nāhaṃ, cunda, aññaṃ ekaṃ saṃghampi samanupassāmi evaṃlābhaggayasaggappattaṃ yatharivāyaṃ, cunda, bhikkhusaṅgho. yaṃ kho taṃ, cunda, sammā vadamāno vadeyya — ‘sabbākārasampannaṃ sabbākāraparipūraṃ anūnamanadhikaṃ svākkhātaṃ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idameva taṃ sammā vadamāno vadeyya — ‘sabbākārasampannaṃ ... pe ... suppakāsitan’ti.


쭌다여, 참으로 현재 세상에 나타난 스승들에 관한 한, 쭌다여, 나만큼 최상의 얻음과 최상의 명성을 성취한 다른 어떤 스승도 나는 보지 못한다. 또한, 쭌다여, 참으로 이 시대의 상가(僧伽)와 수도자 집단이 생겨있지만 나는 이 비구 상가(僧伽)와 같이 최상의 얻음과 최상의 명성을 성취한 다른 어떤 상가와 수도자 집단을 나는 보지 못한다. 쭌다여, 참으로 바르게 말하는 자가 ‘모든 조건을 구족하고, 모든 조건을 완성하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지고, 오로지 완성된 범행(梵行)을 잘 드러내었다.’라고 말한다면, 바로 이것을 ‘모든 조건을 구족하고, 모든 조건을 완성하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지고, 오로지 완성된 범행(梵行)을 잘 드러내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udako sudaṃ, cunda, rāmaputto evaṃ vācaṃ bhāsati — ‘passaṃ na passatī’ti. kiñca passaṃ na passatīti? khurassa sādhunisitassa talamassa passati, dhārañca khvassa na passati. idaṃ vuccati — ‘passaṃ na passatī’ti. yaṃ kho panetaṃ, cunda, udakena rāmaputtena bhāsitaṃ hīnaṃ gammaṃ pothujjanikaṃ anariyaṃ anatthasaṃhitaṃ khurameva sandhāya. yañca taṃ, cunda, sammā vadamāno vadeyya — ‘passaṃ na passatī’ti, idameva taṃ sammā vadamāno vadeyya — ‘passaṃ na passatī’ti. kiñca passaṃ na passatīti? evaṃ sabbākārasampannaṃ sabbākāraparipūraṃ anūnamanadhikaṃ svākkhātaṃ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iti hetaṃ passati. idamettha apakaḍḍheyya, evaṃ taṃ parisuddhataraṃ assāti, iti hetaṃ na passati. idamettha upakaḍḍheyya, evaṃ taṃ paripūraṃ assāti, iti hetaṃ na passati. idaṃ vuccati cunda — ‘passaṃ na passatī’ti. yaṃ kho taṃ, cunda, sammā vadamāno vadeyya — ‘sabbākārasampannaṃ ... pe ...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idameva taṃ sammā vadamāno vadeyya — ‘sabbākārasampannaṃ sabbākāraparipūraṃ anūnamanadhikaṃ svākkhātaṃ kevalaṃ paripūraṃ brahmacariyaṃ suppakāsitan’ti. 


쭌다여, 웃다까 라마뿟따는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고 지시(指示)적으로 말한다.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잘 벼려진 날카로운 칼날을 보면서 그 경계를 보지 못한다. 이것이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저열하고 세간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칼에 관한 말일 뿐이다. 쭌다여,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고 바르게 말하는 자는 바로 이것을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모든 조건을 구족하고, 모든 조건을 완성하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지고, 오로지 완성된 범행(梵行)을 잘 드러내었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본다. 여기, ‘이것을 제거해야 이렇게 그것이 더 청정해질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 ‘이것을 더해야 그것이 완성될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보지 못한다. 쭌다여, 이것이 ‘보면서 보지 못한다.’라고 불린다. 쭌다여, 참으로 바르게 말하는 자가 ‘모든 조건을 구족하고, 모든 조건을 완성하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지고, 오로지 완성된 범행(梵行)을 잘 드러내었다.’라고 말한다면, 바로 이것을 ‘모든 조건을 구족하고, 모든 조건을 완성하고,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고, 잘 설해지고, 오로지 완성된 범행(梵行)을 잘 드러내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2) saṅgītisuttaṃ (DN 33-합송경) → 설자(說者) - 사리뿟따 존자


교리 요약집과도 같은 합송경은 ‘한 가지로 구성된 법들 ~ 열 가지로 구성된 법들’의 구조로 가르침을 정리하는데, 이 범행이 오래 유지되고 오래 머물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잘 합송하고, 분쟁하지 않아야 합니다.


evañhetaṃ, āvuso, hoti durakkhāte dhammavinaye duppavedite aniyyānike anupasamasaṃvattanike asammāsambuddhappavedite. ayaṃ kho panāvuso amhākaṃ bhagavatā dhammo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tattha sabbeheva saṅgāyitabbaṃ, na vivaditabbaṃ, yatha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도반들이여, 잘못 설해지고 잘못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지 않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않고 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선언되지 않은 법(法)과 율(律)에서 그것은 그렇습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나 세존에 의해 설해진 우리들의 법은 잘 설해지고 잘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고 가라앉음으로 이끌고 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선언된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 모두로부터 합송되어야 하며, 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이 범행이 오래 유지되고 오래 머물 것입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번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입니다.


“katamo cāvuso, amhākaṃ bhagavatā dhammo svākkhāto suppavedito niyyāniko upasamasaṃvattaniko sammāsambuddhappavedito; yattha sabbeheva saṅgāyitabbaṃ, na vivaditabbaṃ, yatha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도반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잘 설해지고 잘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고 가라앉음으로 이끌고 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선언된 세존에 의해 설해진 우리들의 법입니까? 어디서 우리 모두로부터 합송 되어야 하며, 분쟁을 해서는 안 됩니까? 그래야 이 범행이 오래 유지되고 오래 머물 것이고, 이것이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고, 신과 인간의 번영과 이익과 행복을 위하는 것입니까? 


⇒ 한 가지로 구성된 법들 ~ 열 가지로 구성된 법들


3) sāmagāmasuttaṃ (MN 104-사마가마 경) → 설자(說者) - 부처님


비구들 간의 갈등에 대한 대처를 주제로 설해진 이 경은 특히 부처님 사후에 제자들의 삶에 대한 부처님의 안내를 담고 있습니다.


니간타 나따뿟따(현재 자이나교 교주)의 죽음 이후 발생한 그의 제자들 사이의 갈등과 관련하여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 사후 교단에 갈등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걱정을 하는 것에 대하여 「아난다여, 생활에 관계되거나 계목(戒目)에 관계된 갈등은 사소한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상가에 도(道)나 실천에 관한 (일어나지는 것인)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 갈등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신과 인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오직 경(經)과 율(律)에 의지한 일관된 공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등각인 스승께서 설하신 가르침은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경은 이어서 여섯 가지 갈등의 뿌리, 상가에서 발생하는 네 가지 사건, 일곱 가지 이런 사건의 그침을 설명하고, 끝으로 사랑을 만드는 것이고, 공경을 만드는 것이고, 섭수(攝受)로, 갈등하지 않음으로, 함께함으로, 일치로 이끄는 기억해야 하는 법 여섯 가지도 함께 설합니다.


atha kho cundo samaṇuddeso pāvāyaṃ vassaṃvuṭṭho yena sāmagāmo yenāyasmā ānand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ntaṃ ānand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cundo samaṇuddeso āyasmantaṃ ānandaṃ etadavoca — “nigaṇṭho, bhante, nāṭaputto pāvāyaṃ adhunākālaṅkato. tassa kālaṅkiriyāya bhinnā nigaṇṭhā dvedhikajātā ... pe ... bhinnathūpe appaṭisaraṇe”ti. evaṃ vutte, āyasmā ānando cundaṃ samaṇuddesaṃ etadavoca — “atthi kho idaṃ, āvuso cunda, kathāpābhataṃ bhagavantaṃ dassanāya. āyāma, āvuso cunda,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ssāma; upasaṅkamitvā etamatthaṃ bhagavato ārocessāmā”ti. “evaṃ, bhante”ti kho cundo samaṇuddeso āyasmato ānandassa paccassosi.


그때, 빠와에서 안거를 마친 초심자 쭌다가 사마가마에 와서, 아난다 존자에게 왔다. 와서는 아난다 존자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초심자 쭌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니간타 나따뿟다가 빠와에서 죽은 뒤의 무렵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분열된 니간타들은 둘로 갈라져서 다툼을 일으키고 갈등을 일으키고 논쟁에 빠지고 서로 간에 입의 칼로 찌르며 머물렀습니다. — ‘그대는 이 법(法)과 율(律)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그대가 이 법과 율에 대해 알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대는 잘못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르게 실천하는 자이다.’, ‘나는 일관되지만 그대는 일관되지 않다.’, ‘그대는 앞에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하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앞에 말한다.’, ‘그대가 성취한 것은 파기되었다.’, ‘그대가 준비한 말은 비난되었다. 말을 취소하라. 아니면 할 수 있다면 설명해 보라.’라고. 생각건대, 니간타 나따뿟따의 제자들에게는 오직 처벌만이 있는 듯하였습니다. 니간타 나따뿟따의 흰 옷을 입은 재가 제자들도 니간타 나따뿟따의 제자들에게 싫증내는 모습이었고 관심이 떨어진 모습이었고 배척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법(法)과 율(律)이 잘못 설해지고 잘못 선언되고 구원으로 이끌지 않고 가라앉음으로 이끌지 않고 바르게 깨달은 자[정등각(正等覺)]에 의해 선언되지 않고 탑이 부서지고 귀의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아난다 존자는 초심자 쭌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도반 쭌다여, 이것은 세존께서 아셔야 하는 주제입니다. 갑시다, 도반 쭌다여. 세존에게 가서 이 의미를 세존에게 알려드립시다.”라고. “알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초심자 쭌다는 아난다 존자에게 대답했다.


atha kho āyasmā ca ānando cundo ca samaṇuddes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ṃsu;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ṃsu.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bhagavantaṃ etadavoca — “ayaṃ, bhante, cundo samaṇuddeso evamāha — ‘nigaṇṭho, bhante, nāṭaputto pāvāyaṃ adhunākālaṅkato. tassa kālaṅkiriyāya bhinnā nigaṇṭhā dvedhikajātā ... pe ... bhinnathūpe appaṭisaraṇe’ti. tassa mayhaṃ, bhante, evaṃ hoti — ‘māheva bhagavato accayena saṅghe vivādo uppajji; svāssa vivādo bahujanāhitāya bahujanāsukhāya bahuno janassa anatthāya ahitāya dukkhāya devamanussānan’”ti.


그래서 아난다 존자와 초심자 쭌다는 세존에게 왔다. 와서는 세존에게 절한 뒤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난다 존자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 “대덕이시여, 이 초심자 쭌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대덕이시여, 니간타 나따뿟다가 빠와에서 죽은 뒤의 무렵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분열된 니간타들은 둘로 갈라져서 … 탑이 부서지고 귀의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런 저에게, 대덕이시여,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세존께서 돌아가신 뒤에 상가에 갈등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 그 갈등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신과 인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위한 것이다.’라고.”


“taṃ kiṃ maññasi, ānanda, ye vo mayā dhammā abhiññā desitā, seyyathidaṃ —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 balāni satta bojjhaṅgā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passasi no tvaṃ, ānanda, imesu dhammesu dvepi bhikkhū nānāvāde”ti? “ye me, bhante, dhammā bhagavatā abhiññā desitā, seyyathidaṃ —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 balāni satta bojjhaṅgā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nāhaṃ passāmi imesu dhammesu dvepi bhikkhū nānāvāde. ye ca kho, bhante, puggalā bhagavantaṃ patissayamānarūpā viharanti tepi bhagavato accayena saṅghe vivādaṃ janeyyuṃ ajjhājīve vā adhipātimokkhe vā. svāssa vivādo bahujanāhitāya bahujanāsukhāya bahuno janassa anatthāya ahitāya dukkhāya devamanussānan”ti. appamattako so, ānanda, vivādo yadidaṃ — ajjhājīve vā adhipātimokkhe vā. magge vā hi, ānanda, paṭipadāya vā saṅghe vivādo uppajjamāno uppajjeyya; svāssa vivādo bahujanāhitāya bahujanāsukhāya bahuno janassa anatthāya ahitāya dukkhāya devamanussānaṃ.


“아난다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실다운 지혜에 의해 내가 그대들에게 설한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의 법(法)들에서, 아난다여, 그대는 다른 말을 하는 비구를 두 명이라도 보는가?”


“대덕이시여, 실다운 지혜에 의해 세존께서 저에게 설한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의 법(法)들에서 저는 다른 말을 하는 비구를 두 명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덕이시여, 세존을 우러르며 머무는 사람들도 세존의 죽음 이후에는 상가에서 생활에 관계되거나 계목(戒目)에 관계되어 갈등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 갈등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신과 인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위한 것입니다.”



"아난다여, 생활에 관계되거나 계목(戒目)에 관계된 갈등은 사소한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상가에 도(道)나 실천에 관한 (일어나지는 것인)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 갈등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신과 인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위한 것이다.

Comments

대원행 03.23 21:52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6&wr_id=140 참조 (나는 불교를 믿는다(240319) ― 제4장 제자들[길과 실천에 관한 갈등은 큰 것 - 니간타 나따뿟따의 사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