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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법회 2 - (22-26)여래를 비난하는 자 & (DN 5-꾸따단따 경)[보시와 오계의 공덕 차이](근본…

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법회 2 - (22-26)여래를 비난하는 자 & (DN 5-꾸따단따 경)[보시와 오계의 공덕 차이](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11125)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s_trPZjcMD0

 

지난 수업에서 공덕행은 보시 < 오계 < 수행의 순서로 공덕이 더 크다고 설명하였는데, 원전에 근거하여 타당함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향하는 행위 안으로 향하는 행위 내면의 문제 해소의 순서로 삶은 더 큰 향상을 이끕니다. 이어서 앙굿따라 니까야 둘의 모음(AN 2.22-32-어리석은 자 품)에 속한 다섯 개의 경을 공부하였는데, 어리석은 사람과 현명한 사람, 여래를 비난하는 사람과 비난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래가 설한 것은 설했다고,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았다고 설명해야 하고, 뜻으로 이끌려야 하는 경[: 행위는 있되 행위자는 없다]과 뜻으로 이끌린 경[: 제법무아]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1] 까티나 가사 공양과 관련한 지난 수업에서 보시-오계-수행의 세 가지 공덕행의 토대는 보시(布施) < 오계(五戒) < 수행(修行)의 순서로 공덕이 더 크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밖으로 향하는 행위의 제어[보시(布施)]보다는 안으로 향하는 행위의 제어[오계(五戒)]가 더 큰 향상을 이끌고, 행위의 제어보다는 내면의 문제요소들을 해소하는 행위[수행(修行)]가 더 큰 향상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적 제사 방법을 설명하는 (DN 5-꾸따단따 경)은 보시-사원 건립-귀의-오계를 대등하게 서술하기 때문에 이런 설명이 타당성을 가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었는데, 원전과 번역본을 통해 번역의 오류를 확인함으로써 타당성을 확보하였습니다. 원전은 보시보다 사원 건립이, 사원 건립보다 귀의가, 귀의보다 오계를 지닌 삶이 수고로움은 더 적고 성과는 더 크다고 알려줍니다. 번역본은 초기불전연구원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번역에서 대등하게 서술되고, 영역본에서는 순차적 확장을 서술합니다. (DN 5-꾸따단따 경) 요약 첨부

 

그래서 원전에 근거한 해석으로 공덕의 크기가 보시(布施) < 오계(五戒) < 수행(修行)의 순서로 커진다는 설명은 타당합니다. 그래서 밖으로 향하는 행위 안으로 향하는 행위 내면의 문제 해소의 순서로 삶은 더 큰 향상을 이끕니다.

 

[2] 앙굿따라 니까야 둘의 모음 세 번째 품 bālavaggo (AN 2.22-32-어리석은 자 품)

 

발음 : bala 발라, bāla -ㄹ라

 

22. 어리석은 두 사람과 현명한 두 사람

 

어리석은 두 사람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보지 못하는 자와 잘못을 고백하는 자를 법에 따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

 

현명한 두 사람 잘못을 잘못으로부터 보는 자와 잘못을 고백하는 자를 법에 따라 받아들이는 자

 

23. 여래를 비난하는 두 사람 내면의 진()[저항-거부]에 의해 불쾌해하는 사람과 잘못 붙잡은 믿음을 가진 사람

 

24. 여래를 비난하는 두 사람과 여래를 비난하지 않는 두 사람

 

여래를 비난하는 두 사람 여래가 설하지 않고 말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설하고 말했다고 설명하는 사람과 여래가 설하고 말한 것을 여래가 설하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사람

 

여래를 비난하지 않는 두 사람 여래가 설하지 않고 말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설하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사람과 여래가 설하고 말한 것을 여래가 설하고 말했다고 설명하는 사람

 

25. 여래를 비난하는 두 사람 뜻으로 이끌려야 하는 경[의미를 밝혀야 하는 경]을 뜻으로 이끌린 경[의미를 드러낸 경]이라고 설명하는 사람과 뜻으로 이끌린 경을 뜻으로 이끌려야 하는 경이라고 설명하는 사람

 

26. 여래를 비난하지 않는 두 사람 뜻으로 이끌려야 하는 경[의미를 밝혀야 하는 경]을 뜻으로 이끌려야 하는 경이라고 설명하는 사람. 뜻으로 이끌린 경[의미를 드러낸 경]을 뜻으로 이끌린 경이라고 설명하는 사람

 

행위는 있되 행위자는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아마도 잡아합경13권 제335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有業報而無作者(업보는 있고 작자는 없다)라는 구절의 응용일 것입니다. 니까야의 가르침은 아니지만, 이 구절을 예를 들면, ‘작자는 없다.’는 행위자 자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행위[()] 시점의 행위자가 보()를 경험하는 시점에는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여 행위 시점의 나를 유지하지 않는다[연기(緣起)-무아(無我)]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有業報而無作者(업보는 있고 작자는 없다)라는 말씀은 뜻으로 이끌려야 하는 경 즉 의미를 밝혀야 하는 경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존재하는 것은 모두 아(-attan/atman)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자체로서 의미를 드러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을 현상계에 적용되는 가르침이라고 오해하여 무아(無我)의 이면에 어떤 개념이든지 아()를 세움으로써 뜻으로 이끌려는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

 

이렇게 뜻으로 이끌려야 하는 경[의미를 밝혀야 하는 경]과 뜻으로 이끌린 경[의미를 드러낸 경]을 바르게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르침의 불완전을 지적하며 부처님을 비난하게 되고, 바르게 구분하는 사람은 가르침의 완전에 공감하여 부처님을 비난하지 않게 됩니다.

Comments

대원행 2022.04.25 21:42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3_0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