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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법회 2 - (27-32)[명(明)과 연결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11202)

3 506 2021.12.04 10:42

▣ 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법회 2 - (27-32)[명(明)과 연결되는 사마타와 위빳사나](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11202)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mWaah-eWts

 

행위를 숨기는 자/삿된 견해를 가진 자/계를 경시하는 자는 지옥과 축생으로 가고, 행위를 숨기지 않는 자/바른 견해를 가진 자/계를 중시하는 자는 신과 인간으로 갑니다. 깊은 숲속 외딴 거처를 수용하는 두 가지 이유는 나 자신의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보는 것과 후대의 사람들을 연민하는 것입니다. ()으로 연결되는 두 가지 법은 사마타와 위빳사나인데, 1)불교의 수행체계[사념처(四念處) 사마타-위빳사나], 2)수행의 중심 개념, 3)takka의 안팎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의미를 개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경에는 6차 결집본과 PTS본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명에 오염된 지혜가 닦아질 수 있는지의 여부인데, PTS본이 틀렸고, 6차 결집본이 맞습니다.

 

27~30. 두 가지 갈 곳 


• 행위를 숨기는 자 → 지옥과 축생

• 행위를 숨기지 않는 자 → 신과 인간


• 삿된 견해를 가진 자 → 지옥과 축생

• 바른 견해를 가진 자 → 신과 인간


• 계(戒)를 경시하는 자 → 지옥과 축생

• 계(戒)를 중시하는 자 → 신과 인간


31. 깊은 숲속 외딴 거처를 수용하는 두 가지 이유 ― ①나 자신의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을 보는 것, ②후대의 사람들을 연민하는 것


• 용례① (MN 4-두려움과 무시무시함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01_04&wr_id=2

 

• 용례② (SN 16.5-늙은이 경)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2_05&wr_id=7

 

32. 명(明)으로 연결되는 두 가지 법 ― 사마타와 위빳사나 ―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은 명(明)과 연결된다. 무엇이 둘인가? 사마타와 위빳사나이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을 때 어떤 이익을 경험하는가? 심(心)이 닦아진다. 심(心)을 닦을 때 어떤 이익을 경험하는가? 탐(貪)이 버려진다. 비구들이여, 위빳사나를 닦을 때 어떤 이익을 경험하는가? 지혜가 닦아진다. 지혜를 닦을 때 어떤 이익을 경험하는가? 무명(無明)이 버려진다. 비구들이여, 탐(貪)에 오염된 심(心)은 해탈하지 못한다. 또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지혜는 닦아진다[닦아지지 못한다(PTS)]. 이렇게, 비구들이여, 탐(貪)의 바램으로부터 심해탈(心解脫)이 있고, 무명(無明)의 바램으로부터 혜해탈(慧解脫)이 있다.」


이 경은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정의하는 중요한 경입니다. 수업에서는 


1) 불교의 수행체계 ―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

2) 수행의 중심 개념

3) takka[애(愛)의 형성 과정]의 안팎에 대한 설명


을 통해 사마타(그침)[염오(厭惡)-이탐(離貪)]과 위빳사나(관찰)[소멸(消滅)-해탈(解脫)]의 의미를 개괄하였습니다.


이때, 사념처는 사띠, 사마타는 삼매, 위빳사나는 지혜의 완성과정입니다. 사념처로 여실지견하여 딱까에 접근한 뒤 사마타로 ①염오[기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음]하여 소망의 문제를 해소하고, ②이탐하여 탐(貪)의 문제를 해소하면 심(心)이 애(愛)로부터 해탈합니다[심해탈(心解脫)]. 그리고 위빳사나로 ③소멸[번뇌의 부서짐으로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생겨남]하여 무명의 문제를 해소합니다[혜해탈(慧解脫)]. 심해탈은 혜해탈에 의해 탐의 근저에서 작용하는 무명의 문제가 해소되어야 흔들리지 않게 되는데, 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입니다. 


이렇게 삼매의 완성과정인 사마타에 의해 성취되는 심해탈은 지혜의 완성과정인 위빳사나에 의해 혜해탈이 성취되어야 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로 완성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이고, 아라한입니다.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여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의 삶에서 사마타로 애를 해소하고, 위빳사나로 무명을 해소할 때 벗어나[해탈(解脫)] 불사(不死)와 열반(涅槃)을 실현하는 깨달음으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에는 6차 결집본과 PTS본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습니다. ‘탐(貪)에 오염된 심(心)은 해탈하지 못한다.’에 이어 무명(無明)에 오염된 지혜가 닦아질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 6차 결집본 ― 「rāgupakkiliṭṭhaṃ vā, bhikkhave, cittaṃ na vimuccati, avijjupakkiliṭṭhā vā paññā bhāvīyati. 비구들이여, 탐(貪)에 오염된 심(心)은 해탈하지 못한다. 또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지혜는 닦아진다.」


• PTS본 ― 「Rāgupakkiliṭṭhaṃ vā bhikkhave cittaṃ na vimuccati. Avijjupakkiliṭṭhā vā paññā na bhāvīyati. 비구들이여, 탐(貪)에 오염된 심(心)은 해탈하지 못한다. 또는 무명(無明)에 오염된 지혜는 닦아지지 못한다.」


이 문제는 (MN 43-교리문답의 큰 경)의 「paññā bhāvetabbā, viññāṇaṃ pariññeyyaṃ 혜(慧)는 닦아야 하는 것이고, 식(識)은 완전히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기능인 혜의 닦음에 의해 식은 완전히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심은 해탈해야 하는 것[심해탈(心解脫)]인데, 혜의 닦음에 의해 식이 완전히 알려지듯이, 혜의 닦음에 의해 심은 완전히 해탈하게 된다는 이해입니다[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 혜를 닦아가는 수행의 결과로 식이 완전히 알려지듯이, 혜를 닦아가는 수행의 결과로 심은 완전히 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탐이 남아있으면 애가 해소되지 않아 심이 해탈할 수 없는 문제를 혜를 닦아 무명을 해소하는 수행을 통해 탐을 완전히 부수면 애의 부서짐에 의해 심은 해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명에 오염된 지혜는 닦아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즉 무명의 오염이 남아있는 지혜를 위빳사나로 닦아서 완성함으로써 무명이 부서지고, 그때, 탐도 완전히 부서져 심의 해탈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명에 오염된 혜를 닦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만약 무명에 오염된 혜가 닦아지지 못한다면 무명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깨달음도 성취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차이는 PTS본이 틀렸고, 6차 결집본이 맞습니다.

Comments

대원행 2022.04.25 21:47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8_03_03 참조( AN 2.22-32-어리석은 자 품) ㅡ 전체
대원행 2022.04.27 14:14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2&wr_id=40&&sca=%EB%91%98%EC%9D%98+%EB%AA%A8%EC%9D%8C&#c_97 참조 (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법회 2 - (88-98)[법 품 - 심해탈과 혜해탈, 유견과 유신견, 히리와 옷땁빠]
대원행 2023.08.25 21:35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3&wr_id=375 참조 (초기불교 백일법문(독송 및 개론) - (6-14)bālavaggo (AN 2.22-32–어리석은 자 품) 32[사마타와 위빳사나 ― 부동의 심해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