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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승(佛法僧)

부처님-불(佛)-BUDDHA

1 1,422 2017.08.14 13:59

부처님/불(佛)/BUDDHA


불교(佛敎)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 제시하는 가르침에 의지해 삶을 향상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누구입니까? 그는 누구이기에 우리는 그를 의지해 삶을 향상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정의합니다.
 
‘iti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ti.
 
이띠삐 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짜라나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 뿌리사 담마사-라티 삿타- 데-와마눗사-낭 붓도- 바가와-띠 
 
그분, 부처님은, 모든 번뇌 떠나신 분, 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밝음과 실천 함께 갖추신 분, 진리의 길  보이신 분, 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존귀하신 분입니다.
 
여래십호(如來十號)로 잘 알려져 있지만,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의 측면에서 붓다구덕(九德)으로 불리는 이 아홉 가지는 부처님 스스로 제자들에게 알려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의입니다. 

즉 ①번뇌를 떠난 자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자이고 지혜와 덕행을 갖춘 자이어서, ②앞서 가 닿은 진리의 자리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길을 제시하였고, ③그럼으로써 세상일을 잘 알고 모두를 잘 이끌어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라고 찬탄 받는 자, ④그가 곧 깨달은 자[불(佛)-부처]이고 존귀한 존재[세존(世尊)]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붓다구덕(九德) 또는 여래십호(如來十號)】
 
ㆍ모든 번뇌 떠나신 분                     - 아라한(阿羅漢)․응공(應供)
ㆍ스스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 정자각(正自覺)․정등각(正等覺)
ㆍ밝음과 실천 함께 갖추신 분            - 명행족(明行足)
ㆍ진리의 길 보이신 분                    - 선서(善逝)
ㆍ세상일을 모두 훤히 아시는 분         - 세간해(世間解) 
ㆍ어리석은 이도 잘 이끄시는 위없는 분 -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
                    [여래십호 → 무상사(無上士) & 조어장부(調御丈夫)]
ㆍ모든 천상과 인간의 스승              - 천인사(天人師)
ㆍ깨달으신 분                           - 불(佛)
ㆍ존귀하신 분                           - 세존(世尊)
 
1. 깨달은 자[불(佛)-부처] -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

- 그렇다면 부처의 본질은 번뇌를 떠난 자[아라한(阿羅漢)]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자[정등각(正等覺)]이고 지혜와 덕행을 갖춘 자[명행족(明行足)]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부처 또는 불교의 본질은 번뇌-깨달음-밝음-덕행[실천]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괴로움[고(苦)]의 근원이 되는 번뇌를 소멸하는 밝음과 밝음을 갖추는 과정으로의 실천행, 그럼으로써 번뇌의 소멸에 따라 괴로움이 소멸[고멸(苦滅)]하는 것으로의 깨달음이라고 하겠습니다.

1) 아라한(阿羅漢)

번뇌(煩惱)[누(漏)-āsava]는 삶의 메커니즘에 의하면 2차 인식에 간섭하는 내적 경향성[상(想)]의 병듦 상태입니다. 오온(五蘊)이 아(我)라면 병으로 인도되지 않을 것인데,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병이 들게 됩니다<무아상경(S22:59)>. 이때, 상(想)이 병들면 번뇌라고 불린다는 것이 우리 법회의 이해입니다.

<마하삿짜까 경(M36)>은 

「악기웻사나여, 누구든지 그가 부패된 것이고 다시 존재가 되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제거하지 못했다면, 그를 나는 미혹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악기웻사나여, 번뇌를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혹한 사람이 된다.
 
악기웻사나여, 누구든지 그가 부패된 것이고 다시 존재가 되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들을 제거했다면, 그를 나는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악기웻사나여, 번뇌를 제거했기 때문에 미혹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yassa kassaci, aggivessana, ye āsav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appahīnā, tamahaṃ ‘sammūḷho’ti vadāmi. āsavānañhi, aggivessana, appahānā sammūḷho hoti. yassa kassaci, aggivessana, ye āsav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pahīnā, tamahaṃ ‘asammūḷho’ti vadāmi. āsavānañhi, aggivessana, pahānā asammūḷho hoti.」
 
라고 하여,

부패된 것인 번뇌가 ①다시 존재가 되고 ②두렵고 ③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④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한다
 
는 것을 알려줍니다.

이때 번뇌의 소멸은 누진(漏盡)이라는 용어로 나타납니다. 육신통(六神通)에서는 누진통(漏盡通)이고 삼명(三明)에서는 누진명(漏盡明)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당시 제자들의 보편적 깨달음을 나타내는 혜해탈자(慧解脫者)는 다른 성취의 길 없이 사마타-위빳사나에 의해 직접 번뇌를 소멸한 경우입니다. 고멸(苦滅)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향해 직접 나아가 성취한 자를 일컫는 말인데, 고(苦)-집멸도集滅道)와 루(漏)-집멸도集滅道)로 설명됩니다. 고(苦)의 근본이 번뇌이므로 현상으로 드러나는 고의 집멸도는 근본원인인 번뇌의 집멸도와 함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번뇌를 소멸한 자를 아라한이라고 하며, 이것이 부처님을 정의하는 첫 번째 특성입니다.

※ 이때 번뇌의 소멸이란 상(想)의 병듦의 치유[healing]이고, ①다시 존재가 됨, ②두려움, ③괴로운 보(報), ④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2) 불(佛)-정등각자(正等覺者)-여래(如來)
                            
한편, 부처님은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한다.’고 선언하는데, 불만족한 삶에 대한 자각과 만족한 삶의 실현이라는 불교의 두 가지 명제(命題)가 됩니다.

이때, 부처님은 같은 맥락에서 깨달은 자[불(佛)-부처]를 정의해 줍니다. ‘그래서 나는 부처입니다[tasmā buddhosmi]’라는 말로써 부처를 설명하는데,

첫째, 「나는 실(實)답게 알아야 할 것을 실답게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Buddha-불(佛)-부처]]입니다.<브라흐마유의 경(M91) 등>」인데, 알아야 할 것-닦아야 할 것-버려야 할 것의 완결 상태로서의 깨달음을 정의하는 것입니다.

불만족한 삶에 대한 자각[알아야 할 것]과 대응과정을 통해 만족한 삶을 실현함 즉 고(苦)와 고멸(苦滅)을 그 조건관계로 확장한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때, 알아야 하는 것의 궁극은 오취온(五取蘊)으로, 버려야 하는 것의 궁극은 무명(無明)과 유애(有愛), 실현해야 하는 것의 궁극은 명(明)과 해탈(解脫), 닦아야 하는 것의 궁극은 사마타-위빳사나로 제시됩니다<객사(客舍) 경(S45:159)>. 오취온(五取蘊) 즉 존재의 측면에서 깨달은 자[불(佛)-부처]는 정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아름다운 백련이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나는 세상에 젖지 않나니,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부처입니다.」인데, 「그와 같이 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세상에서 자랐지만 세상을 지배한 뒤 세상에 젖지 않고 머문다. 바라문이여, 그런 나를 부처라고 호지하라.」는 말씀 뒤에 게송으로 설해집니다<세상 경(A4:36)>.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중생들과 같은 세상에 있어도 집착을 소멸함으로써 해탈된 삶을 산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또한, 「여래·아라한·정등각자는 오온(五蘊)을 염오(厭惡)하고 이탐(離貪)하고 소멸(消滅)하기 때문에 집착 없이 해탈한 정등각자라 불린다.<정등각자 경(S22:58)>」는 말로 정등각자도 정의해 줍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나듯이 부처님은 붓다구덕 또는 여래십호 외에 여래(如來)[tathāgata]라고도 불리는데, ‘그래서 여래(如來)라 부른다[tasmā ‘tathāgato’ti vuccati]’는 말로 이렇게 나타납니다<정신경(D29)>.

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법들에 대해서 여래는 시기에 맞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유익한 것을 말하고, 법을 말하고, 율을 말하는 자이다. 그래서 여래라 부른다.

ⅱ) 신들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얻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여래는 모두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았다. 그래서 여래라 부른다.

ⅲ)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철저하고 바르게 깨달은 그 밤으로부터 무여열반의 요소로 반열반에 드는 그 밤 사이에 설하고 말하고 가르친 그 모든 것은 여여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여래라 부른다.

ⅳ) 설한 그대로 행하는 자이고 행하는 그대로 설하는 자이다. 이처럼 설한 그대로 행하는 자이고 행하는 그대로 설하는 자라고 해서 여래라 부른다.

ⅴ) 신들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바라문들을 포함하고 신과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들 가운데서,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오류가 없이 보는 자요 자재자이다. 그래서 여래라 부른다."

그런데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을 바르게 깨달았으며 여래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났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의 일어남을 바르게 깨달았으며 여래는 세상의 일어남을 버렸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의 소멸을 바르게 깨달았으며 여래는 세상의 소멸을 실현하였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바르게 깨달았으며 여래는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수행하였다.<세상 경(A4:23)>」라고 합니다. 

깨달은 자[불(佛)-부처]가 오취온(五取蘊) 즉 존재의 측면에서 정의되는 것에 반해 여래(如來)는 세상의 측면에서 정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부처님은 오취온(五取蘊)이라는 자기존재의 문제와 삶의 터전으로서의 세상이 가지는 문제를 모두 해결한 자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명행족(明行足)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명(明)과 행(行)을 구족한 자라고 불립니다. 이때 명(明)과 행(行)은 「귀의불 양족존(歸依佛兩足尊)[한문으로 하는 삼귀의 - 두 가지를 구족하여 귀하신 부처님께 돌아가 의지합니다.]」에서 말하는 두 가지로서 수행의 과정에 대한 구분입니다.

사선(四禪)-삼명(三明)의 수행체계에서는 사선(四禪)은 행(行)이고 삼명(三明)은 명(明)입니다. 반면에 사문과경 등 포괄적인 수행 체계에서는 제4선의 성취 이전의 수행자의 삶은 행(行)이고, 제4선 이후의 과정은 명(明)입니다.

그렇다면 명행(明行)은 깨달음 즉 번뇌의 소멸을 실현하기 위한 수행의 전체 과정이어서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고, 명행족(明行足)은 고멸도(苦滅道)인 팔정도를 완성해서 고멸(苦滅)인 열반(涅槃)[명(明)-해탈(解脫)]을 실현한 자라는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명행(明行)은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그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부처님의 제자인 불교신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2. 선서(善逝)

‘잘 가신 분’이라는 원어[sugata]의 의미를 가지지만, 앞서 가 닿은 진리의 자리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길을 제시하였다는 의미에서 ‘진리의 길 보이신 분’으로 이해하는 부처님의 덕성(德性)입니다.

한편, <선서의 율 경(A4:160)>은 부처님의 역할을 알려주는데, 「그는 법을 설한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게,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선서의 율이다.」합니다. 부처님의 역할을 정의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때 부처님의 제자인 비구들의 역할도 같이 정해지는데, 「①단어와 문장들이 바르게 구성되어 잘 파악한 경을 가르친다. ②훈계하기 쉽다. ③경을 남에게 열심히 설해준다. ④열심히 정진한다.」입니다.

3. 세간해(世間解)

부처님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벗어난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해탈된 삶만을 가르치는 스승은 아닙니다. 해탈하지 못하고 자기존재로서 살아가는 중생들의 삶에 대해 잘 알아서, 세간살이에서의 행복을 안내하는 가운데 그 위에서 더 높은 삶으로의 향상을 안내해 줍니다. 그리고 그 끝에 세간살이에서의 벗어남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4.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

무상사(無上士)와 조어장부(調御丈夫)로 나누어 이해하기도 하지만 <께시 경(A4:111)>은 「세존이시여, 그런데 세존께서는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이십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세존께서는 어떻게 인간을 길들이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1) 온화하게 길들이는 방법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신이고, 이것이 인간이다.」
 
2) 혹독하게 길들이는 방법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말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지옥이고, 이것이 축생계이고, 이것이 아귀계이다.」

3)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 길들이는 방법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좋은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이고, 이것이 마음으로 짓는 나쁜 행위의 보(報)이고, 이것이 신이고, 이것이 인간이고, 이것이 지옥이고, 이것이 축생계이고, 이것이 아귀계이다.」

4)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을 때는 '죽여 버림'

「께시여, 여래가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만일 사람을 길들일 때 그 사람이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여래는 그를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범행을 닦는 지혜로운 동료수행자들도 그를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께시여, 여래가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범행을 닦는 동료 수행자들이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이 성스러운 율에서 살해된 자이니라.」

라고 답합니다.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 이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5. 천인사(天人師)
 부처님은 스스로를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아귀-축생-지옥 중생들의 스승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부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른 법을 배워 알고 실천해 실현하기에는 그들의 인지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강제하지 않습니다. ‘다만, 길을 가리킬 뿐!<가나까목갈라나 경(M107)>’이라고 말하는 부처님에게 가리키는 길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귀-축생-지옥 중생들을 위한 스승이 되는 일은 현실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은 맹구우목(盲龜遇木)의 비유를 들어 한 번 악처에 떨어지면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6. 세존(世尊)

이렇게 여덟 가지의 덕성을 갖춘 부처님은 참으로 세상에서 귀한 분입니다. 경전에서는 세존을 포함한 부처님의 아홉 가지 덕성 가운데 가장 많은 경우에 세존(世尊)[bhagavā]이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을 호칭합니다. 

Comments

2017.08.14 14:00
이 주제로 설법한 이전의 동영상 3편을 다음 글로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