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불교입문 > 불법승(佛法僧) > 법 [法]

불법승(佛法僧)

법의 정형구에 대한 두 단계의 해석 ㅡ [2단계 해석 - 해피법당의 해석-번역]

0 1,554 2017.09.30 20:41
[2단계 해석 - 해피법당의 해석-번역]
 
경전에서 법은 이렇게 정형구로 나타납니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이 정형구는 또한 이렇게 해석되었습니다.

ㅇ 한국테라와다불교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담마는, 즉시 확인할 수 있고, 결과 바로 나타나니, 와서 보라는 것이며, 닙바나[열반]으로 이끌고, 지혜로운 이 스스로 보아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ㅇ 초기불전연구원

이런 [이유로]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ㅇ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세존께서 선설(善說)하신 법은 현실적인 것으로 무시간적이고 와서 보라고 할만한 것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발행 「初期佛敎의 緣起思想」 102쪽 [연기의 존재상의 계기성] 참조.

한편, 이 정형구는 대화에 따라서 

evampi kho, upavāṇa, sandiṭṭhiko dhammo hoti,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

또는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

라고 하여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이라는 수식을 생략하고 [①즉시 확인할 수 있는 법. ②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법, ③현실적인 법]은 이러이러하다라는 형태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법회에서는 그 동안 [1단계 해석]에서와 같이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담마는,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들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해석에 주목하려 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들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현상들도 법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인데, 법의 정형구에 포함된 두 개의 단어에 대한 심화된 이해라고 할 것입니다.

1) sandiṭṭhiko - ①즉시 확인할 수 있고, ②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③현실적인 것
; 법은 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연결되는 해석입니다. 우리 법회에서 말하는 「4부 니까야를 꿰뚫는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이라는 이해와 잘 부합한다고 하겠습니다. 
 
2) akāliko - ①결과 바로 나타나니, ②시간이 걸리지 않고, ③무시간적
; 결과가 바로 나타난다는 것과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무시간적이라는 것은 이 단어가 주는 의미에 대한 심화된 이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결과가 바로 나타난다는 것과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의 개념 위에서 동시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지만, 무시간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개념을 벗어나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삶의 메커니즘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오온과 욕탐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는 오취온(五取蘊)인 나는 감각주관인 육내입처가 되어 감각객관인 육외입처를 인식합니다. 그러면 식(識)을 새끼치고, 새끼쳐진 식은 지금 이 순간 삶의 주체가 되어 심(心)과 의(意)의 과정을 거쳐 식(識)을 머물고 증장하게 하여, 명색의 출현과 함께 오온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지금 이 순간의 삶이고, 매 순간 변화하는 나[오취온]의 존재성을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길고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계기성(繼起性)], 시간적으로는 동시입니다[구기성(俱起性)]. [①결과 바로 나타나니, ②시간이 걸리지 않고]가 말하는 대로의 동시적인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상들은 시간의 개념 위에서 동시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경전은 이러한 삶의 과정 가운데 시간적 동시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경우를 설명합니다.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의 경(M123)>은 「아난다여, 여기 여래에게는 수(受)가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지속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진다. 상(想)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지속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진다. vitakka[심(尋)]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지속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진다[idhānanda, tathāgatassa viditā vedan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saññ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 viditā vitakkā uppajjanti, viditā upaṭṭhahanti, viditā abbhatthaṃ gacchanti].」라고 하는데, 동시적인 한 순간의 삶에 포함된 과정으로의 수(受)-상(想)-vitakka의 지속을 자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 안에 지속되는 과정이 포함되는 어긋난 상황의 발생을 경전이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경의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분석 경(A4:173)-무애해 경(A7:37)-<삼매 경(A4:41)-합송경(D33) >에도 나타나고, <차례차례의 경(M111)>에서는 더 많은 법들에 대해서 반복되기도 하는데, 깨달음을 향하여 접근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긋난 상황의 발생을 경전이 설하는 것[교리적 불일치 또는 오류]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접근하면 중생들의 삶의 과정과는 다른 삶이 전개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시간적 동시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초선으로부터 많은 경우 많은 것들에 대해서 설해지는 것입니다.

한편, akāliko는 a-kālika입니다. 

Kālika (adj.) [fr. kāla 2] belonging to time, in time, as sabba -- kālika always in time; usually neg. akālika 1. not delayed, immediate, in this world, comb. with sandiṭṭhika

이때 akālika는 [belonging to time, in time]의 부정어입니다. → 시간에 속하지 않는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not delayed, immediate]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시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무시간적(無時間的)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법은 무시간적 즉 시간의 개념에 매이지 않은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삶의 과정에서 소유[욕계]와 존재[색계-무색계]에 묶여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시간에 지배받으며 살아가는데, 그 경우에 부처님이 설한 법은  동시성[①결과 바로 나타나니, ②시간이 걸리지 않고]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수행을 통해 해탈된 삶으로 나아가면 시간의 개념을 초월하여 설하신 바 그대로 무시간적 즉 시간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상태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런 무시간적 상황은 꼭 해탈된 삶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어 몸이 버려지고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시간의 개념 위에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고 다시 태어남의 과정에 대해 설해진 부처님의 법은 시간의 개념 위에서 동시성으로 적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시간의 개념을 벗어난 법으로 적용되어야 설명되는 상황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서로 조건 되는 몸과 마음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에 걸쳐 끊어지지 않는 식의 흐름]. 죽는 순간 이미 새로운 태어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무시간적입니다. 시간이 걸리지 않는 그 순간에 포함되는 많은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룽꺄뿟따 경(S35:95)-찬나를 교계한 경(M144)-찬나 경(S35:87)-우다나 바히야 경-우다나 열반의 경4>는 「여기[이 세상]도 없고 저기[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가운데도 없다[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라고 하여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 과정을 말합니다. 그래서 자칫 이 세상에서 죽어서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날 때까지 중간의 존재[중유(中有)-중음(中陰)]이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문제가 우선입니다. 몸과 마음 또는 명색과 식으로 구성되는 오취온인 자기존재는 서로 조건됨에 의해 몸 따로 마음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몸이 죽어도 마음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 걸쳐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흐릅니다<확신경(D28)>. 그리고 그 순간의 과정은 무시간적입니다. 

무시간적이라는 것은 그 순간을 순서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으면 업의 힘이 작용하여 다시 태어날 자리가 선택됩니다. 그리고 식(識)은 그 태어날 자리로 이동하여 태(胎) 등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기에 명색(名色)이 있어서 오온을 구성합니다. 대략 이 정도가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식(識)이 이 세상과 저 세상에 걸쳐 끊어짐 없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식(識)이 서로 조건 되는 몸 없이 있을 수 있으려면 식의 흐름의 정지가 필요하다고 해야 할 텐데, 식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경은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길게 설명되는 까닭에 그 사이에 시간을 끼워 넣고, 그 시간을 사는 어떤 존재를 설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법은 무시간적입니다. 시간을 넘어선 가르침이기 때문에 시간을 소요하지 않는 순서적 설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간의 존재[중유(中有)-중음(中陰)]은 없습니다. 중간의 존재를 설정하여 그 존재를 위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토끼의 뿔이고 거북의 털을 찾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3) 해피법당의 해석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①sandiṭṭhiko ②akāliko ③ehipassiko ④opaneyyiko ⑤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위의 검토를 반영해서 법의 정형구에 대한 2단계의 해석을 이렇게 하였습니다.

①sandiṭṭhiko-②akāliko-③ehipassiko는 법 자체의 성품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때, ②akāliko는 ‘시간을 넘어선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에 대해 현실적인 것으로의 ①sandiṭṭhiko는 대상의 측면에서 ‘스스로 보여지는 것’으로 해석하고, ③ehipassiko는 보는 자의 측면에서 ‘와서 보라는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즉 시간을 넘어선 것인 법은 조건이 갖추어지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어서, 가서 보려는 자에게는 감춤 없이 보여지는 것이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④opaneyyiko는 이러한 법 즉 가르침의 역할의 측면에서 향상의 끝인 ‘열반으로 이끌고’라고 해석하고, 
 
⑤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는 열반이 개별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법의 정형구에 대한 해피법당의 해석-번역은 이렇습니다. - 「부처님에 의해 잘 설해진 법은 ①스스로 보여지는 것이고, ②시간을 넘어선 것이고. ③와서 보라는 것이며, ④열반으로 이끌고, ⑤지혜로운 이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