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불교입문 > 불법승(佛法僧)

불법승(佛法僧)

관점 5] 무위(無爲) - 노자의 완성과 부처의 완성

1 1,435 2017.10.01 11:43

관점 5] 무위(無爲) - 노자의 완성과 부처의 완성


   [참고] 「공부의 시작 - ‘나는 누구입니까?’」중에서.


오온 밖에 있는 집착이 찾아와 오온과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으로 전개되는 삶의 과정에서 오온의 병듦을 조건으로 내 안에서 생겨나고 자라나서 인식과정에 참여하는 욕탐(欲貪)[chandarāga]이 집착이란 이름으로 오온과 결합하여 오취온인 ‘나’를 형성한다는 것은 주목해야 합니다.


※ 그래서 삶의 문제는 내면의 불완전성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내면의 불완전성을 해소할 때 해결되는 것입니다. 결코 내면의 문제를 배격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서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사마타-위빳사나의 불교 수행을 이해해야 합니다.

 


노자는 내면의 불완전성을 배제하고 자연에 근거한 도를 세웁니다. 그리고 그 완성의 자리를 무위(無爲)라고 부릅니다. 표현하자면, 2차적 존재인 마음의 불완전성 때문에 생겨나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음의 작위(作爲)적인 개입이 배제된 자연을 근거로 하는 도를 세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물질[1차적 존재]인 유(有)와 무(無)의 관계성[유무상생(有無相生)]을 도(道)로 하여 삶의 완성을 추구하였고, 이런 가르침이 진리 즉 명(明)입니다. 그리고 그 도와 진리의 완성점 즉 더 이상 마음의 작위(作爲)적인 개입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삶을 무위(無爲)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는 과정에서 탐진치(貪嗔癡)의 멸진 상태를 말하고, 열반(涅槃)[nibbāna]과 동의어인 asaṅkhata를 무위(無爲)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자연에 근거한 도를 세우지 않습니다.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삶의 현실인 물질과 마음 모두를 근거로 하는 도를 세웁니다. 표현하자면, 물질도 마음도 대등한 1차적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을 제외한 도는 삶의 문제 전반에 적용되는 완전한 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차적 존재인 마음이 1차적 존재인 물질에 대해 작용하는 것[작위(作爲)]는 존재하는 한 배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닙니다. 


부처님은 존재의 문제를 안고 있는 당사자인 ‘나’라는 존재부터 다시 정의합니다.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 상태 즉 오취온(五取蘊)이 나라는 사실을 찾아냅니다. 이때, 색수상행(色受想行)은 명색(名色)이라고 부르고, 이 몸으로의 삶 즉 금생(今生) 동안 나를 구성하는 한시적 요소인 몸[의미 부여된 색(色)]입니다. 반면에 명색(名色)과 함께 나[오취온(五取蘊)]을 구성하는 식(識)은 마음이고, 몸인 명색이 죽으면 새로운 몸 즉 명색과 함께 새로운 삶[내생(來生)]을 살아가야 하는 한시적이지 않은 요소입니다. 그래서 윤회하는 주체는 바로 식(識)인 마음입니다.


삶의 문제는 오취온(五取蘊) 즉 내가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취(取)] 가운데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그리고 집착은 내면의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노자가 배제하고자 한 내면의 불완전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불완전성의 문제는 밖에서 그 해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생겨난 그 자리에서 해법을 찾아내야 그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념처경(D22)>은 삶의 과정[육내입처(六內入處)-육외입처(六外入處)-육식(六識)-육촉(六觸)-육촉생수(六觸生受)-육상(六想)-육사(六思)-육애(六愛)-육심(六尋)-육사(六伺)]에서 생겨나 자리 잡는 문제[갈애-애(愛)-taṇhā]는 생겨난 자리에서 버려지고 소멸한다고 말합니다.  


삶의 문제에 대한 이런 접근은 문제의 본질이 내면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취온인 나를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인 상(想)은 인식과정[2차 인식]에 간섭합니다. 식(識)이 수(受)를 인식하여 앎[지(知)-ñāṇa]을 생겨나게 하는 과정에 제3의 요소로 간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想) 또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인 것이고 병들 조건 아래 있으면 병이 듭니다. 이때, 병든 상(想)을 번뇌[루(漏) -āsava]라고 부릅니다. 번뇌의 간섭은 인식과정의 결과로 생겨나는 앎을 왜곡시키는데, 무명(無明)-탐(貪)-진(嗔)입니다. 또한, 무명과 번뇌를 합하여 치(癡)라고 하는데, 함께 말하면 탐진치(貪嗔癡)입니다.


탐진치는 마음의 활동에 간섭하여 오염시킵니다. 오염된 마음으로 오염된 행위를 하게 하여 삶의 문제[고(苦)-불만족]을 생겨나게 합니다. 삶의 문제[고(苦)-불만족]가 생겨나는 조건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고집(苦集)]. 이때, 마음의 활동을 작위(作爲)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작위에 오염원으로 간섭하는 탐진치 있음의 상태를 유위(有爲)[saṅkhata]라고 하고, 탐진치에 의해 오염된 작위를 행(行)[saṅkhārā]라고 합니다.


조건적으로 생겨난 문제는 조건을 해소하면 해결됩니다[고멸(苦滅)] 부처님은 해결 방법을 이런 삶의 현실 위에서 제시합니다. 내면의 불완전성 때문에 생긴 문제에 대해 내면의 불완전성을 직접 해소하는 실현 가능한 방법입니다. 팔정도(八正道)이고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입니다[고멸도(苦滅道)]. 또한, 삶의 문제[고(苦)]와 그 해소[고멸(苦滅)] 그리고 그 조건 관계[고집(苦集)-고멸도(苦滅道)]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로 정리되는데, 불교에서는 이것이 진리[명(明)]입니다.


이제 팔정도(八正道) 즉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는 궁극적으로 내면의 불완전성의 근본자리인 번뇌를 치유합니다. 번뇌가 치유되면 2차 인식의 과정에서 앎의 왜곡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탐진치(貪嗔癡)있음[유위(有爲)]의 상태를 소멸하고 탐진치 없음 즉 무탐(無貪)-무진(無嗔)-무치(無癡)의 상태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탐진치(貪嗔癡)의 멸진 즉 무탐(無貪)-무진(無嗔)-무치(無癡)를 asaṅkhata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의 번역과정에서 무위(無爲)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무위(無爲)는 작위(作爲) 않음이 아닙니다. 작위의 과정에 탐진치가 함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탐(貪)을 실은 욕(欲) 즉 욕탐(欲貪)[chandarāga]으로 정의되는 집착의 소멸이어서 오취온(五取蘊)인 자기존재에 내재한 문제를 해결하고 해탈하는 것 즉 해탈된 삶의 실현입니다. 이것이 내면의 불완전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현 가능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면의 불완전성의 문제를 밖에서 찾으려 한 노자의 방법도 실현될 수 없고, 존재의 실상[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과 나[오취온(五取蘊)]에 대해 바르게 보지 못한 웃다까 라마뿟따의 방법도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현실 위에서 현실이 주는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부처님의 방법만이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위(無爲)! 노자에게는 작위(作爲) 없음으로의 무위(無爲)이고, 부처에게는 탐진치(貪嗔癡)를 해소한 무탐(無貪)-무진(無嗔)-무치(無癡)의 작위(作爲)인 asaṅkhata입니다. 

Comments

대원행 2022.09.05 14:17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2&wr_id=140 참조 [바라문교의 삼명 & 바라문교는 왜 삼명이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