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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해피스님의 새출발법회 2-1)[가르침의 토대]업 - 지음 있음 & 부처님들의 공통된 가르침 = 업(業)-지음 있음-정진(精進)

1 1,117 2017.08.10 19:43
이 수업은 업(業)의 두 번째 주제로 연결되었습니다. ㅡ>
 
▣ 해피스님의 새출발법회 2-1)[토대]업 - 지음 있음
   [동영상] https://youtu.be/AXXuy5e2ENk

1. 새출발법회2015 첫 주차 수업의 인사말씀을 읽어드렸습니다.

2. 부처님 가르침의 토대가 되는 것으로의 업(業)과 지음 있음을 설명하였습니다. 가르침은 모두 이 두 가지 토대 위에서 설해졌으므로 이 토대의 영역 밖에서 설해진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닙니다.

새출발법회 2회 1주차 수업 주제(2016.3.4.)

부처님 가르침의 토대 - [kammavādī kiriyavādī] 업(業)을 설하고 지음 있음을 설함

- 다양한 가르침은 산만하게 설해진 것이 아니라 업(業)과 지음 있음이라는 두 가지 공통된 토대 위에서 설해진 것임. → 토대를 벗어나지 않아야 함.

; 업(業)과 지음 있음을 설함이라는 두 가지로 부처님을 소개함으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을 업과 지음 있음으로 설하는 경전들

1. DN 1, 4. soṇadaṇḍasuttaṃ, buddhaguṇakathā (DN 4), DN 1, 5. kūṭadantasuttaṃ, buddhaguṇakathā (DN 5), MN 2, 5. brāhmaṇavaggo, 5. caṅkīsuttaṃ (MN 95)

“samaṇo khalu, bho, gotamo kammavādī kiriyavādī apāpapurekkhāro brahmaññāya pajāya . pe . 

사문 고따마께서는 업을 설하시고 지음 있음을 설하시고 바라문들에게 아무런 해악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2. MN 2, 3. paribbājakavaggo, 1. tevijjavacchasuttaṃ (MN 71)

“atthi pana, bho gotama, koci ājīvako kāyassa bhedā saggūpago”ti? “ito kho so, vaccha, ekanavuto kappo yamahaṃ anussarāmi, nābhijānāmi kañci ājīvakaṃ saggūpagaṃ aññatra ekena; sopāsi kammavādī kiriyavādī””ti.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아지와까로서 몸이 무너진 뒤에 천상에 태어난 자가 있습니까?" "왓차여, 내가 지금부터 91겁을 회상해보더라도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지와까로서 몸이 무너진 뒤에 천상에 태어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업을 말하고 지음 있음을 말하는 자였다.

● 업(業)-지음 있음-정진(精進) :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된 가르침

머리칼로 만든 옷감 경(A3:135)[kesakambalasuttaṃ(AN 3.138)]

“seyyathāpi, bhikkhave, yāni kānici tantāvutānaṃ vatthānaṃ, kesakambalo tesaṃ paṭikiṭṭho akkhāyati. kesakambalo, bhikkhave, sīte sīto, uṇhe uṇho, dubbaṇṇo, duggandho, dukkhasamphasso. evamevaṃ kho, bhikkhave, yāni kānici puthusamaṇabrāhmaṇavādānaṃ makkhalivādo tesaṃ paṭikiṭṭho akkhāyati.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머리칼로 만든 옷이 짜서 만든 옷감 가운데서 가장 저열한 것이라고 불린다. 머리칼로 만든 옷감은 추울 때 추우며 더울 때 덥고 색깔이 나쁘고 냄새가 나쁘고 촉감이 불쾌하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보통 사문들의 가르침 가운데서 막칼리의 교설이 저열한 것이라고 불린다. 

“makkhali, bhikkhave, moghapuriso evaṃvādī evaṃdiṭṭhi — ‘natthi kammaṃ, natthi kiriyaṃ, natthi vīriyan’ti.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이렇게 말한다. ㅡ ‘업(業)이란 것도 없고, 지음도 없고, 정진(精進)이란 것도 없다.

yepi te, bhikkhave, ahesuṃ atītamaddhānaṃ arahanto sammāsambuddhā, tepi bhagavanto kammavādā ceva ahesuṃ kiriyavādā ca vīriyavādā ca. tepi, bhikkhave, makkhali moghapuriso paṭibāhati — ‘natthi kammaṃ, natthi kiriyaṃ, natthi vīriyan’ti. 

비구들이여, 과거세의 아라한·정등각들인 그분 세존들께서는 업을 설하셨고 지음을 설하셨고 정진을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그분들께도 그의 교설로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업이란 것도 없고, 지음도 없고, 정진이란 것도 없다.'라고.

• 업(業) - 행위 →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 → 십악업(十惡業)-십선업(十善業), 
• 지음 있음 – 행위에는 과(果)[결실]과 보(報)[현실적 경험]이 따름, 
• 정진(精進) - 과(果)와 보(報)의 획득을 위한 노력.

[비유] 농사를 짓는 행위[업(業)]에는 풍작이든 흉작이든 결실이 있고[지음 있음-kiriya] 풍작을 거두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함[정진(精進)].

yepi te, bhikkhave, bhavissanti anāgatamaddhānaṃ arahanto sammāsambuddhā, tepi bhagavanto kammavādā ceva bhavissanti kiriyavādā ca vīriyavādā ca. tepi, bhikkhave, makkhali moghapuriso paṭibāhati — ‘natthi kammaṃ, natthi kiriyaṃ, natthi vīriyan’ti. ahampi, bhikkhave, etarahi arahaṃ sammāsambuddho kammavādo ceva kiriyavādo ca vīriyavādo ca. mampi, bhikkhave, makkhali moghapuriso paṭibāhati — ‘natthi kammaṃ, natthi kiriyaṃ, natthi vīriyan’”ti.

비구들이여, 미래세의 아라한·정등각들인 그분 세존들께서는 업을 설하고 지음을 설하고 정진을 설하실 것이다.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그분들께도 그의 교설로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업이란 것도 없고, 지음도 없고, 정진이란 것도 없다.'라고. 비구들이여, 지금의 아라한·정등각인 나도 업을 설하고 지음을 설하고 정진을 설한다.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나에게도 그의 교설로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업이란 것도 없고, 지음도 없고, 정진이란 것도 없다.'라고.

“seyyathāpi, bhikkhave, nadīmukhe khippaṃ uḍḍeyya bahūnaṃ macchānaṃ ahitāya dukkhāya anayāya byasanāya; evamevaṃ kho, bhikkhave, makkhali moghapuriso manussakhippaṃ maññe loke uppanno bahūnaṃ sattānaṃ ahitāya dukkhāya anayāya byasanāyā”ti.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강어귀에서 그물을 치면 많은 물고기들을 불편과 괴로움과 재난과 파멸로 몰아넣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사람을 낚는 그물로 세상에 태어나 많은 중생들을 손해와 괴로움과 재난과 파멸로 인도한다.

<외도(外道)의 주장 경(A3:61)[titthāyatanādisuttaṃ(AN 3.62)]>은 삼종외도(三種外道)를 설하는데,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①전생(前生)의 행위-②신(神)의 창조-③무인무연(無因無緣)을 원인으로 한다고 하면서, 현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묻고 반복해서 질문하면 그것은 계보에는 이르겠지만 결국에는 지음 없음에 도달하고 만다고 하여, 삼종외도(三種外道)와 지음 없음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tīṇimāni, bhikkhave, titthāyatanāni yāni paṇḍitehi samanuyuñjiyamānāni {samanuggāhiyamānāni (syā. kaṃ. ka.)} samanugāhiyamānāni samanubhāsiyamānāni parampi gantvā akiriyāya saṇṭhahanti. katamāni tīṇi? santi, bhikkhave,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yaṃ kiñcāyaṃ purisapuggalo paṭisaṃvedeti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abbaṃ taṃ pubbekatahetū’ti. santi, bhikkhave,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yaṃ kiñcāyaṃ purisapuggalo paṭisaṃvedeti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abbaṃ taṃ issaranimmānahetū’ti. santi, bhikkhave,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vādino evaṃdiṭṭhino — ‘yaṃ kiñcāyaṃ purisapuggalo paṭisaṃvedeti sukhaṃ vā dukkhaṃ vā adukkhamasukhaṃ vā sabbaṃ taṃ ahetuappaccayā’”ti.

비구들이여, 세 가지 외도의 주장이 있다. 현자들이 그것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집요하게 이유를 묻고 반복해서 질문하면 그것은 [스승 등의] 계보에는 이르겠지만 결국에는 지음 없음에 도달하고 만다. 어떤 것이 셋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바라문은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다.” 

; 1주차 수업에서는 여기까지 설명하였습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삼종외도를 진심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열의와 노력이 없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진실함과 확고함을 얻지 못하고 사띠를 놓아버리고 보호하지 않고 머물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정당하게 사문이라고 주장하지 못한다[na hoti chando vā vāyāmo vā idaṃ vā karaṇīyaṃ idaṃ vā akaraṇīyanti. iti karaṇīyākaraṇīye kho pana saccato thetato anupalabbhiyamāne muṭṭhassatīnaṃ anārakkhānaṃ viharataṃ na hoti paccattaṃ sahadhammiko samaṇavādo]’라고 반박합니다.

더 나아가 <확실한 가르침 경(M60)[apaṇṇakasuttaṃ]>은 실제로 지음이 있기 때문에 ‘지음 없음’은 삿된 견해-삿된 사유-삿된 말을 하는 것이고, 지음 있음을 말하는 아라한에게 저항하는 것이라고 단언적으로 말합니다. 외도(外道)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santaṃyeva kho pana kiriyaṃ ‘natthi kiriyā’ tissa diṭṭhi hoti; sāssa hoti micchādiṭṭhi. santaṃyeva kho pana kiriyaṃ ‘natthi kiriyā’ti saṅkappeti; svāssa hoti micchāsaṅkappo. santaṃyeva kho pana kiriyaṃ ‘natthi kiriyā’ti vācaṃ bhāsati; sāssa hoti micchāvācā. santaṃyeva kho pana kiriyaṃ ‘natthi kiriyā’ti āha, ye te arahanto kiriyavādā tesamayaṃ paccanīkaṃ karoti. santaṃyeva kho pana kiriyaṃ ‘natthi kiriyā’ti paraṃ saññāpeti; sāssa hoti asaddhammasaññatti. tāya ca pana asaddhammasaññattiyā attānukkaṃseti, paraṃ vambheti. iti pubbeva kho panassa susīlyaṃ pahīnaṃ hoti, dussīlyaṃ paccupaṭṭhitaṃ — ayañca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ṅkappo micchāvācā ariyānaṃ paccanīkatā asaddhammasaññatti attukkaṃsanā paravambhanā. evamassime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micchādiṭṭhipaccayā.

세 가지 공덕행(功德行)의 토대 ㅡ 보시로 만들어진 공덕행의 토대, 계로 만들어진 공덕행의 토대, 수행으로 만들어진 공덕행의 토대 <합송경(D33)>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음 있음은 행위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는 의미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부처님에 대한 비난에 대한 대응의 경우에는 단순히 행위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역설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 소원이 있으세요?

소원이 있으세요? 원하는 어떤 결과가 생겨나기를 바라시나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과(果)[phala]를 얻기에는 소원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청정한 삶[범행(梵行)의 실천]이 필요하다.'고 설하시는데, <부미자의 경[Bhūmijasutta](M126)>입니다.

1-① 소원을 세웠지만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없다.
1-② 소원을 세우지 않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없다. 
1-③ 소원을 세우기도 하고 소원을 세우지 않기도 하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없다.
1-④ 소원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소원을 세우지 않는 것도 아니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없다. 

그러나

2-① 소원을 세우고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있다. 
2-② 소원을 세우지 않았지만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있다. 
2-③ 소원을 세우기도 하고 소원을 세우지 않기도 하지만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있다. 
2-④ 소원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소원을 세우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이치에 맞게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과(果)를 얻을 수 있다.

결국 과(果)[phala]란 소원(所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는 청정한 삶의 영위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과(果)를 얻기 위한 이치에 맞는 청정한 삶은 무엇입니까? 

같은 경에서 부처님은 원하는 과(果)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이치에 맞지 않는 삶을 ①잘못된 견해, ②잘못된 사유, ③잘못된 언어, ④잘못된 행위, ⑤잘못된 생활, ⑥잘못된 정진, ⑦잘못된 알아차림, ⑧잘못된 삼매로써 영위하는 삶이라고 설명하는데, 이런 비유를 곁들여줍니다.

(1)기름이 필요한 사람이 모래를 통에 채우고 압착하는 것과 같음.
(2)우유가 필요한 사람이 암소의 뿔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음.
(3)버터가 필요한 사람이 물을 항아리에 붓고 교반막대로 젓는 것과 같음.
(4)불이 필요한 사람이 젖은 나무 조각을 부싯목으로 문지르는 것과 같음.

마찬가지로 같은 경에서 부처님은 원하는 과(果)를 얻게 하는 이치에 맞는 청정한 삶으로 ①바른 견해, ②바른 사유, ③바른 언어, ④바른 행위, ⑤바른 생활, ⑥바른 정진, ⑦바른 알아차림, ⑧바른 삼매를 제시하는데,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즉 팔정도는 원하는 과(果)를 얻게 해주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인데, 이런 비유로써 설명해줍니다.

(1)기름이 필요한 사람이 참깨를 통에 채우고 압착하는 것과 같음.
(2)우유가 필요한 사람이 암소의 젖통을 잡아당기는 것과 같음.
(3)버터가 필요한 사람이 응유를 항아리에 붓고 교반막대로 젓는 것과 같음.
(4)불이 필요한 사람이 마른 나무 조각을 부싯목으로 문지르는 것과 같음.

그러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라고 있지만 말고 바른 삶을 통해 실현해야 할 것입니다.

(*) 당연한 이야기의 힘 – 당연한 것이 사실[실(實)다움]입니다. 사실에 괴리된 삶은 고(苦)를 만들고, 사실에 부합한 삶은 고멸(苦滅) 즉 락(樂)을 만듭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당연함에 근거해서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Comments

2017.08.11 20:57
이 글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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