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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십악업(十惡業)과 십선업(十善業) & 청취자 의견[1)몸은 지수화풍으로 돌아가고, 2)아뢰야식]

0 961 2017.12.02 17:28

[ … ] 들으셨습니다. 일요일 밤, 삶에 대한 깊은 사색이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함께하고 계십니다. 업(業)의 선악(善惡)의 구체적 기준으로 제시된 십악업(十惡業)과 십선업(十善業)에 대한 <살라의 바라문들 경>의 설명입니다.


1. 십악업(十惡業)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행위가 있고, 말로 짓는 네 가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행위가 있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행위가 있다.


[신업(身業)] 무엇이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행위인가? 여기 어떤 자는 


①[살생(殺生)] 살아있는 생명을 해친다, 그는 잔인하고 손에 피를 묻히고 죽이고 폭력을 휘두르는 데에 익숙하며 생명들에게 동정심이 없다.

 

②[투도(偸盜)] 주지 않는 것을 가진다, 그는 마을에서나 숲 속에서 남의 재산과 재물을 보이지 않게 훔쳐서 가진다.


③[사음(邪淫)] 삿된 음행(淫行)을 한다. 어머니가 보호하고 아버지가 보호하고 형제가 보호하고 자매가 보호하고 친지들이 보호하고 법으로 보호하고 남편이 있고 몽둥이로 보호하고 심지어 [혼약의 징표로] 화환을 두른 그러한 여인들과 성행위를 한다.


[구업(口業)] 무엇이 말로 짓는 네 가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행위인가? 장자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④[망어(妄語)] 거짓말을 한다. 그는 법정에서나 회의에서나 친척들 사이에서나 조합원들 사이에서나 왕실 앞에서 증인으로 출두하여, ‘오시오, 선남자여, 그대가 아는 것을 말해 주시오.’라고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그는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압니다.’라고 말하고, 알면서 ‘나는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보지 못하면서 ‘나는 봅니다.’라고 말하고, 보면서 ‘나는 보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자기의 목적을 위해서나 남의 목적을 위해서나 어떤 세속적인 이득을 위해 고의로 거짓말을 한다.


⑤[양설(兩舌)] 그는 이간질을 한다. 그는 여기서 듣고 이들을 이간시키려고 저기서 말한다. 저기서 듣고 저들을 이간시키려고 여기서 말한다. 이처럼 화합하는 자들을 이간시키고 이간을 조장한다. 그는 불화를 좋아하고 불화를 기뻐하고 불화를 즐기며 불화를 일으키는 말을 한다.


⑥[악구(惡口)] 그는 욕설을 한다. 그는 거칠고 험하고 남을 언짢게 하고 남을 모욕하고 분노에 휩싸이고, 삼매로 이끌지 못하는 그런 말을 한다.


⑦[기어(綺語)] 그는 잡담을 한다. 그는 부적절한 시기에 말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무익한 것을 말하고, 법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율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고, 가슴에 새겨둘 필요가 없는 말을 한다. 그는 이치에 맞지 않고 무절제하며 유익하지 못한 말을 부적절한 시기에 말한다.


[의업(意業)] 무엇이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그릇된 행위인가? 장자들이여, 여기 어떤 자는 


⑧[간탐(慳貪)] 간탐한다. 그는 ‘오, 저 사람의 것이 내 것이라면.’하고 남의 재산과 재물을 간탐한다.


⑨[진에(瞋恚)] ‘이 중생들이 죽어버리기를, 파멸되기를, 파괴되기를, 멸망해 버리기를, 없어져버리기를.’이라고 분노하는 마음과 폭력적 사유를 가진다.


⑩[사견(邪見)] 삿된 견해를 가진다. ‘보시도 없고 공물도 없고 제사(헌공)도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과(果)도 없고 보(報)도 없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여 선언하는, 덕스럽고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다.'라는 삿된 견해를 가진다. 


2. 십선업(十善業)


몸으로 짓는 세 가지 법에 부합하는 올바른 행위가 있고, 말로 짓는 네 가지 법에 부합하는 올바른 행위가 있고,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법에 부합하는 올바른 행위가 있다.


<살라의 바라문들 경>은 이렇게 시작하여 십악업(十惡業)을 버리고 멀리 여의는 것으로의 십선업(十善業)을 설명합니다. 중요도를 생각하면 십선업도 다 소개해 드려야 하겠지만, 시간 관계상 십악업(十惡業)을 버리고 멀리 여읜 것으로의 십선업(十善業)이 법에 부합하는 올바른 행위여서 행복한 곳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는 정도로만 요약해 드립니다.


자! 이제 남은 시간 동안에 지난 주 윤회를 주제로 한 이야기에 참여해주신 의견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청취자 게시판에 의견 주신 분들입니다.


최한식 님께서 ‘해피스님의 올바른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라는 제목으로 「불교 안에서도 전혀 다른 목소리들이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심지어 힌두교의 교리로 오염되기까지 한 우리나라에서 올바르고 정확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설법 중간 중간에 경전의 말씀과 음악이 어우러져 마치 부처님께서 직접 우리들에게 법을 전하시는 듯이 장엄하고 경이로웠습니다. 계속 빛나는 부처님의 원음을 들려주시기 소원합니다.」라고 의견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승봉 님께서 ‘해피스님 감사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부처님 원음말씀 니까야 경전에 의거하여 부처님 법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시며 헌신적으로 노력하시는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항상 귀하신 부처님 원음말씀인 니까야 경전을 쉽게 알려주시는 해피스님 감사드립니다. 수행의 지도에 따라 수행해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씀 항상 사띠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라고 하셨습니다. 홍승봉 법우님, 이름은 낯익지만 아직 저와 만난 적은 없으시지요? 과한 격려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지만, 저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광희 님께서 ‘부처님 가르침의 원음이 울리는 듯한 해피스님의 법문에 감명을 받으며’라는 제목으로 「주주동안 밖의 일에 끄달려 시끄러웠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고요하고 상쾌한 음악사이로 흘러나오는 해피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마치 2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부처님을 친견이라도 하듯 부처님의 가르침이 마음 깊숙한 곳 까지 가까이 와 닿는 그런 드믄 감동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이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러한 좋은 법문을 들을 수 있게 하신 해피스님과 부산불교방송에 감사합니다.」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산불교방송에 감사하다는 인사 말씀 대신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어서 문자 메세지로 의견주신 분입니다. (9943)님입니다. 「몸은 지수화풍으로 사라지고 영혼은 아뢰야식으로 남아서 전생을 기억한다 ... 전생에 사람이었는데 또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스님이 그러는데요 ..... 여기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고..」라고 하셨습니다.


(9943)님의 질문은 좀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간단히 답변 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몸은 지수화풍으로 사라지고’라고 하셨는데요, 근본경전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몸에 대해서는 「물질이라서 네 가지 근본물질 즉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인 것」이라고 하고, 죽으면 「까마귀 떼가 쪼아 먹고, 독수리 떼가 쪼아 먹고, 솔개무리가 쪼아 먹고, 개떼가 뜯어먹고, 자칼들이 뜯어먹고, 별의별 벌레들이 다 달려들어 파먹는다.」라고 합니다. 몸이 지수화풍으로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말은 오히려 육사외도(六師外道) 중 아지따 께사깜발리의 이론에서 나타난다고 해야 합니다. 「이 인간이란 것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임종하면 땅은 땅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물은 물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불은 불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바람은 바람의 몸으로 들어가고 돌아가고, 감각기능들은 허공으로 건너갑니다.」라는 설명이지요. 


어쩌면 ‘몸은 지수화풍으로 사라지고’라는 말씀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 외도의 가르침일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셔서,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배워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영혼은 아뢰야식으로 남아서 전생을 기억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부처님 가르침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영혼’이란 개념은 무아(無我)에 의해 부정된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는데요, 표현의 차이일 수 있겠지만 변치 않는 내 마음의 실체 정도의 의미인 자아(自我)의 개념으로 사용하셨다면 옳지 않습니다. ‘아뢰야식’이란 용어도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에는 없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육식(六識) 너머 존재하는 집착된 식인 아뢰야식이라는 개념은 유식학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유식학파가 이 식을 발견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요가의 체험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불교신문 152호 〈하룻밤에 읽는 불교〉 저자]


주목해야 합니다. 아뢰야식은 유식학파의 스님들에 의해 경험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경험이 마음에 대한 바른 경험인지는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제가 설명한 마음이야기는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인 근본경전의 내용입니다. 저의 해석이 경전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면, 이것은 부처님이 경험한 마음입니다. 부처님이 경험하고 알려주신 마음이야기는 마음에 대한 바른 경험입니다. 부처님의 경험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9943)님께서 진지한 의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영혼은 아뢰야식으로 남아서 전생을 기억한다.’는 이 의견이 가르침에 부합하는 가의 측면에서 답변을 드립니다.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앎을 기준으로 가르침을 접하면 의문만 남기 마련입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렸는데요, 「이러한 연기와 연기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잘 보기 때문에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나의 존재와 관련한 어떤 의문에도 빠지지 않는다.」라고 부처님은 알려줍니다. 그러니 경전을 바르게 공부하셔서 바른 앎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 앎 때문에 생겨나는 많은 의문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입니다.


(9943)님, 진지한 의견 주셔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저의 답변이 도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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