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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나교와의 비교 - 업장이 구체적인 괴로움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겪어내는 과정의 제어[소금덩이 경]

0 1,130 2017.12.02 17:36

[ … ] 들으셨습니다. 토요일 밤, 편안함과 함께하는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함께하고 계십니다.


업장소멸(業障消滅)! 앞에서 보았듯이 업장은 경험 즉 겪어내지 않는 한 다른 방법으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험을 하기는 하지만 그 경험이 나에게 구체적인 괴로움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겪어내는 과정을 잘 제어하는 방법이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업장소멸의 방법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반면에 업장소멸(業障消滅)에 대한 외도의 주장을 한 가지 볼 수 있는데요, 지금은 자이나교라고 불리고 부처님 시대에는 니간타라고 부르던 종교입니다. 니간타는 「이전의 업(業)들은 고행(苦行)으로 끝을 내고 새로운 업들은 [더 이상] 짓지 않기 때문에 조건을 제거한다. 이와 같이 업을 소멸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소멸하고, 괴로움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도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일체 괴로움이 멸절할 것이다.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오염원들을] 부수는 청정을 통해서 [윤회를] 건너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업(業)의 원인인 심(心)의 조건이 탐진치(貪瞋癡)에서 무탐(無貪)-무진(無嗔)-무치(無癡)가 되어서 번뇌와 무명과 갈애가 소멸하는 것을 업(業)의 소멸이라고 합니다. 이전의 업(業) 즉 업장은 구체적인 괴로움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겪어내는 과정을 잘 제어하고, 수행을 통해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십선업(十善業)을 짓는 것이 삶의 완성이라는 것인데, 갈애의 부숨을 통한 업의 부숨, 그리고 업의 부숨을 통한 괴로움의 부숨으로 해탈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이전의 업(業)들은 고행(苦行)으로 끝을 낸다고 니간타는 말하지만 업장(業障)은 경험 즉 겪어내지 않는 한 다른 방법으로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고 니간타는 말하지만 완성된 삶은 그런 것이 아니라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십선업(十善業)을 짓는 삶입니다. 업의 소멸로부터 괴로움이 소멸한 해탈된 삶, 윤회에서 벗어남의 실현을 말하지만, 업의 소멸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부처님과 니간타 사이에 이렇게 명확한 것입니다.


참 다행입니다! 업장소멸의 길이 니간타의 주장대로 고행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업장에 의한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 고행이라는 다른 괴로움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현실은 참으로 가혹할 것입니다. <괴로움 덩어리 작은 경(M14)>에서 니간타들은 「즐거움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가 없지만 괴로움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라고 고행의 변을 말하지만 부처님은 깨달음의 과정을 설명하는 경전들에서 「나는 소유적 사유들과도 다르고 불선법(不善法)들과도 다른 그런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행복으로 더 큰 행복을 일구는 불교적인 삶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전의 업(業) 즉 업장이 구체적인 괴로움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겪어내는 과정을 잘 제어하는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소금덩이 경(A3:99)>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ㅡ ‘이 사람이 어떤 업을 지었든 바로 그것이 경험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방법으로는 범행(梵行)의 머묾이 없고, 바른 괴로움의 끝을 선언할 여지가 없다. 비구들이여, 다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ㅡ ‘이 사람이 어떻게 경험해야할 업을 지었든 바로 그 보(報)가 경험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런 방법으로는 범행(梵行)의 머묾이 있고, 바른 괴로움의 끝을 선언할 여지가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하물며 작은 악업을 짓고도 어두운 지옥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다시 여기 어떤 사람은 그런 작은 악업을 짓고 지금여기에서 경험한다. 하물며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어찌 많겠는가!


비구들이여, 무슨 이유 때문에 사람은 하물며 작은 악업을 짓고도 어두운 지옥에 태어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몸을 닦지 않고 계를 닦지 않고 심(心)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서 하찮고 작은 존재가 되어 작은 괴로움에 머무는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람은 하물며 작은 악업을 짓고도 어두운 지옥에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무슨 이유 때문에 사람은 그런 작은 악업을 짓고 지금여기에서 경험하고, 하물며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어찌 많겠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몸을 닦고 계를 닦고 심(心)을 닦고 지혜를 닦아서 하찮지 않고 커다랗고 무량하게 머무는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이런 사람은 그런 작은 악업을 짓고 지금여기에서 경험하고, 하물며 아주 조금도 보이지 않는데 어찌 많겠는가!」


부처님은요, 업을 지으면 지은 그대로 즉 업의 결실인 과(果)를 경험하는 게 아니고 보(報)를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과(果)와는 다른 어떤 것인 보(報)를 경험한다고 하는 건데요, 그래서 보(報)를 과(果)에 대한 현실적 경험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지은 그대로의 과(果)가 어떻게든 달라진 상태로 경험되는 것을 보(報)라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달라진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난 주 공부한 내용에 의하면, 과(果)도 보(報)도 고(苦) 또는 락(樂)으로 분류됩니다. 십악업(十惡業)은 과(果)도 보(報)도 괴로움이고, 십선업(十善業)은 과(果)도 보(報)도 행복인 것이지요. 예를 들어, 과(果)와 보(報)가 이 행위를 통해 얼마나 큰돈을 벌었을까, 아니면 작은 돈을 벌었을까의 측면이 아니라 [지음 있음의 측면에서] 크든 작든 벌어온 돈이 나에게 괴로움을 주었을까 행복을 주었을까의 측면에서 과(果)와 보(報)가 함께 정의된다는 것입니다. 또는 과(果)는 돈을 벌어온 양의 측면이고 보(報)는 고(苦)-락(樂)의 측면으로 성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과(果)와 보(報) 모두가 고(苦)-락(樂)의 측면에서 정의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달라지는 것은 고(苦)거나 락(樂)의 크기입니다. 업(業)을 지어 지은 그대로 생겨난 과(果)가 커지거나 작아지거나 그 크기가 달라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십악업(十惡業)을 지어서 생겨난 고(苦)의 과(果)를 크기를 키워서 더 큰 괴로움으로 경험하거나 크기를 줄여서 더 작은 괴로움으로 경험하는 것이 과(果)의 달라진 상태인 보(報)라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십선업(十善業)을 지어서 생겨난 락(樂)의 과(果)를 크기를 키워서 더 큰 행복으로 경험하거나 크기를 줄여서 더 작은 행복으로 경험하는 것이 과(果)의 달라진 상태인 보(報)라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과(果)와 보(報)가 크기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무엇이 그 크기를 바꾸는 원인-조건일까요? 


경은 동일한 작은 악업을 짓고도 죽어서 그 영향으로 지옥에 태어나는 사람과 죽음 이후에 그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을 설명하면서, 그 이유를 몸과 계와 마음과 지혜를 닦았는지, 닦지 않았는지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닦지 않은 사람은 닦지 않음을 이유로 지옥에 태어나고, 닦은 사람은 죽음 이후에 그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몸-계-마음-지혜를 닦지 않은 삶과 닦은 삶 즉 그런 업(業)의 차이가 바로 과(果)와 보(報)의 크기를 변화시키는 원인-조건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이때, 보(報)는 지금여기와 살아서의 미래 그리고 죽은 뒤 다음 생들의 미래라는 세 가지 시점에서 경험된다는 것을 지난주에 공부하였습니다. 업(業)에 의해 과(果)가 생겨나는 시점과 보(報)의 시점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와 동시에 그 과(果)를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고, 미래에 그 과(果)를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앞의 경우는 몸-계-마음-지혜를 닦는지 닦지 않는지의 하나의 행위에 의해 과(果)와 보(報)가 함께 결정될 것이고, 뒤의 경우는 앞선 행위에 의해 생겨난 과(果)를 경험하는 시점의 행위가 몸-계-마음-지혜를 닦는지 닦지 않는지에 따라 보(報)가 달라지게될 것입니다.


업장소멸(業障消滅)은 이런 것입니다. 앞선 행위 즉 전생들에 지었거나 금생의 과거에 지은 악업(惡業)에 의해 생겨난 고(苦)의 과(果)를 지금 경험해야 할 때, 몸-계-마음-지혜를 잘 닦아서 지금 나의 삶을 하찮지 않고 커다랗고 무량하게 살아냄으로써 고(苦)의 크기가 최소한으로 작아져서 경험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로 인해 구체적인 괴로움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업(業)에 의한 장애 즉 업장(業障)인 고(苦)를 소멸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겪어내는 과정을 잘 제어하는 방법이어서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업장소멸의 방법인 것입니다.


<소금덩이 경>은 이어서 몇 가지 비유를 통해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데요, 음악 듣고 와서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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