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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宗敎)는 무엇인가?

「부산불교방송 주말특집 해피스님의 마음 이야기(2016년 7월 방송)」 중에서


1. 종교(宗敎) ㅡ 공통점과 차이점


해피스님의 마음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마음!」의 조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종교! 종교란 무엇일까요? 


얼마 전에 제가 출가 전에 가까이 지내던 벗님을 만났습니다. 이 벗님은 오랫동안 교회를 잘 다니는 훌륭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출가하고 나서 벗님을 처음 만났는데,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스님, 이제 스님이 되셨네요.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차이점을 보이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면 목적 점이 같지 않겠습니까? 저기에는 목사님이 계시고, 여기 내 앞에는 스님이 계시지만, 서로 간의 종교가 이름을 달리할 뿐. 스님이 가고자 하는 그 길과 우리가 목사님을 따라서 가고자 하는 그 길이 결국 한 가지 길이 아니겠습니까?” 


법우님 생각엔 어떠세요, 이런 이야기가 타당한가요? 예. 저도 사실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벗님한테 ‘벗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ㅡ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들은 대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만약 절에서 ‘그대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는 것이 최고입니다. 다른 생명을 해쳐서라도, 또는 도둑질을 해서라도 그대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십시오.’라고 가르친다면, 아마도 이런 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것은 절에 다니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대가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쳐도 됩니다, 도둑질을 해도 됩니다.’라고 가르친다면 기독교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화된 종교라고 하면 공통점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 기준’이라고 말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몸으로든 말로든 마음으로든 행위 할 때 이런 행위는 하고 저런 행위는 하지 말라는 기준의 제시인 거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그대가 행복하고 싶다면, 그대와 함께 하는 다른 존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다른 생명의 안전과 행복 위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내가 더불어 안전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등인 겁니다.


그럴 때 행위 하는 나도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지 않고, 행위의 대상인 남들도 나 때문에 괴롭게 되지 않는 것이고, 이런 가르침이 우리 사회에 보편 되면 나와 남 즉 우리들의 관계에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요.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AN 5.145-지옥 경)에 나타나는 오계(五戒)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무엇이 다섯인가? 그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음행(淫行)에 대한 삿된 행위를 하고, 거짓을 말하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해 방일하게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운반되듯 하늘에 놓인다. 무엇이 다섯인가? 그는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음행(淫行)에 대한 삿된 행위로부터 피하고, 거짓을 말하는 행위로부터 피하고, 술과 발효액 등 취하게 하는 것으로 인한 방일한 머묾으로부터 피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운반되듯 하늘에 놓인다. 


아마도 표현은 달라도 세계화된 종교들은 이런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기준을 달리한다면, 그런 가르침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세계화된 종교로 성장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거겠지요.


그래서 벗님이 말하는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차이점을 보이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면 목적 점이 같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씀은 일견 타당성을 가지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지향점을 가진다는 벗님의 말씀에 대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 즉 산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삶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영역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자기의 내면, 자신의 내적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의 영역보다는 내적 영역이 훨씬 더 심오한 영역이어서 삶을 지배하고, 내가 괴로울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각각의 종교는 자기의 내면, 자신의 내적 영역에 대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각각의 종교가 심오한 교리를 제시하고 거기에 맞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일 텐데요, 이 심오함의 영역에서 차이가 있을 때 종교는 이름을 달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가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종교로 나누어지는 것도 보게 되는데요, 이렇게 심오함의 영역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삶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식의 선에서 말해보면, 기독교는 생겨나지 않았으면서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으로의 신을 전제합니다. 그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모든 존재를 창조했고 인간도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조된 것인 나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인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 잘 사는 것이고, 그렇게 잘 살면 죽은 후에는 천국에 태어나서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에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착하게 살아가야 하는 표면적인 삶의 영역보다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훨씬 더 중요하고 심오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 심오함의 영역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내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 곁에 태어나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마도 그분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일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불교도 삶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상식의 선에서 말해보면, 불교는 생겨나지 않은 것을 부정합니다. 무아(無我)인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은 생겨난 것이고, 생겨나는 과정에 참여하는 조건들에 의해 그 상태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인 나의 삶은 생겨난 그대로 나의 삶입니다. 생겨나는 과정이 잘 제어되지 않으면 불만족 즉 괴로움의 상태를 만들 것이고, 잘 제어되면 만족 즉 행복의 상태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에 나타나는 무아(無我)의 선언입니다. 


비구들이여, 오온(五蘊)은 무아(無我)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 오온(五蘊)이 아(我)라면 이 오온(五蘊)은 병(病)으로 이끌리지 않을 것이고, 오온(五蘊)에 대해 ‘나의 오온(五蘊)은 이렇게 되어라. 나의 오온(五蘊)은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의도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오온(五蘊)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오온(五蘊)은 병(病)으로 이끌리고, 오온(五蘊)에 대해 ‘나의 오온(五蘊)은 이렇게 되어라. 나의 오온(五蘊)은 이렇게 되지 마라.’라고 의도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도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착하게 살아가야 하는 표면적인 삶의 영역보다는 불교를 대표하는 훨씬 더 중요하고 심오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 심오함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과정이 잘 제어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이 이어지게 하다가 끝내는 모든 불만족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마도 우리가 불교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일 겁니다.


어떤가요? 상식적인 선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해 보았는데요. 두 세계적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그렇습니다. 표면적인 삶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 기준’에서는 공통점을 볼 수 있겠고요, 심오한 영역에서 제시하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이유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벗님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ㅡ “벗님이 모든 종교가 다 목적 점이 같으니까 우리가 남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사실은 그 차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표면적인 삶과 심오한 영역에서 지향하는 바가 있고, 불교는 불교대로 표면적인 삶과 심오한 영역에서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각각에 대해서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서로를 인정해주고, 그러는 가운데 표면에 드러나는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 기준이 같다고 함으로써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다르다고 하여 서로가 다투거나 욕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표면적인 삶에서는 나 이외의 존재들과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착한 일을 해야 하는 점이 서로 같으니까요.”


다행히 벗님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의 차이를 제가 압니다.”라면서 저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주었습니다. 참 건전한 대화를 나눈 거지요. 잠시 쉬겠습니다. 돌아와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 종교(宗敎)의 정의(定意)


해피스님의 마음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마음!」의 조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는 중인데요, 표면적인 삶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 기준’에서는 공통점을 볼 수 있었고요, 심오한 영역에서 제시하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이유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일까요? 무엇이기에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여러 종교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걸까요?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서구 중심의 물질문명이 세계를 지배한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종교는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었습니다. ‘종교는 신에 대한 의존’이란 개념을 앞세우고, 그런 점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해석까지도 공공연히 주창되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스승이시고, 우리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한 삶, 그런 세상을 실현해 가는 우리의 종교인 불교가 아예 종교도 아니라는 편견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 신자로서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는 현상인 거지요. 오늘 그런 편견을 벗겨내고 진정한 의미의 종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표면적인 삶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 기준’에서의 공통점과 심오한 영역에서 제시하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이유에서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왜 종교인 걸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이라는 기독교의 교주가 당신 나름으로 나라는 존재를 해석하고, 그의 삶의 방법 그리고 삶의 토대인 세상을 이해하였겠지요. 그래서 당신대로 ‘아, 존재는 이러한 것이구나.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구나.’라고 보았을 테고, ‘이러한 존재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 결과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보았을 테지요. 그리고 이런 삶의 토대가 되는 세상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이라고 보셨겠지요. 


즉, 예수님이라는 한 분의 스승이 당신대로의 공부를 통해 ‘존재란 무엇일까? 존재들의 삶은 무엇일까? 이러한 삶의 토대인 세상은 무엇일까?’라는 심오하고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해석을 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여보시오. 내가 존재를, 삶을, 세상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스승이 해석해서 선언한 이 내용을 많은 사람이 듣게 됩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 정말로 그렇다! 참으로, 저분의 말씀대로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내가 있게 된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살아가야 하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삶의 토대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옳겠다.’라고 공감하고 동의하였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가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분을 닮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해석해서 선언한 ‘존재, 삶, 세상’이라는 내용에 대해, 누군가가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분을 닮아야겠다.’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을 예수님의 신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런 분들이 기독교 또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기독교 또는 천주교라고 부른다고 하면 기독교 또는 천주교라는 종교에 대한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2600년 전에 고따마 싯다르타라는 한 사람이 당신대로,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야 하고 늙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 것일까? 또한, 그 삶의 과정에서 다양한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라고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해 아주 힘들게 공부를 하고, 그 끝에 깨달음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특별한 측면에서, ‘존재란 무엇일까? 존재들의 삶은 무엇일까? 이러한 삶의 토대인 세상은 무엇일까?’에 대해 해석해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보시오. 내가 존재를, 삶을, 세상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선언을 통해 그는 자신을 부처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이라는 이 스승이 해석해서 선언한 내용을 많은 사람이 듣게 됩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거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 정말로 그렇다! 참으로, 저분의 말씀대로 나는 생겨난 것이다. 생겨나는 과정의 조건들에 의해 상태가 결정되는 것이고, 생겨난 그대로 나의 삶이다. 생겨나는 과정이 잘 제어되지 않으면 불만족 즉 괴로움의 상태를 만들 것이고, 잘 제어되면 만족 즉 행복의 상태를 만들 것이다. 그러니 생겨난 것인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안내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 옳겠다.’라고 공감하고 동의하였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의 말씀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 중에는 부처님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가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분을 닮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AN 3.61-상가라와 경)에 나타나는 중생구제(衆生救濟)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입니다. 


한 곁에 앉은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에게 이렇게 말했다. ㅡ “고따마 존자여, 우리 바라문은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지내게 하기도 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거기서 지내는 것과 지내게 하는 것은 모두 많은 사람에 대한 공덕을 실천하는 것이니 곧 제사(祭祀)로 인한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여, 그러나 어떤 또는 그 가문의 집으로부터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자는 자기 하나만을 길들이고, 자기 하나만을 가라앉히고, 자기 하나만을 완전히 꺼지게 합니다. 이렇게 이것은 한 사람에 대한 공덕을 실천하는 것이니 곧 출가로 인한 것입니다.”라고.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그것을 되물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좋아 보이는 대로 그것을 설명하십시오. 바라문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 아라한(阿羅漢)-정등각(正等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인 여래(如來)가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ㅡ ‘오라! 이것이 길이고 이것이 실천이다. 이렇게 실천한 나는 위 없는 범행(梵行)에 속한 것을 스스로 실다운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여 선언한다. 오라! 그대들도 그와 같이 실천하라. 이렇게 실천하면, 그대들도 위 없는 범행(梵行)에 속한 것을 스스로 실다운 지혜로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이렇게 이 스승은 법을 설하고 다른 사람들은 진실을 얻기 위해 실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수백, 수천, 수십만 명입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러한 것 곧 출가로 인한 것은 한 사람에 대한 공덕의 실천입니까. 또는 많은 사람에 대한 공덕의 실천입니까?” 


“고따마 존자여, 이러한 것 곧 출가로 인한 것은 많은 사람에 대한 공덕의 실천입니다.”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해석해서 선언한 ‘존재, 삶, 세상’이라는 내용에 대해, 누군가가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분을 닮아야겠다.’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을 부처님의 신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런 분들이 불교 신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불교라고 부른다고 하면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구체적으로 질문해 보겠습니다. 종교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각각의 스승들이 당신들대로 ‘존재와 삶과 세상’을 해석하여 선언하고, 공감과 동의와 신뢰로써 그를 뒤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고, 거기에 천년, 이천 년, 삼천 년을 유지되어 내려오면, 이것을 종교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는 이렇게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때, 더 이상 불교 신자인 우리가 ‘신에 대한 의존’이란 개념을 배제한다는 이유로 종교를 상실하는 어처구니없음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심오한 영역을 ‘신에 대한 의존’으로 해석하는 기독교와 ‘생겨남의 제어’로 해석하는 불교로 대표되는 두 부류를 모두 아우르는 확장된 종교의 개념이 정립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부처님의 선언을 <전법륜경(轉法輪經)(S56:11)>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3회전한 12형태[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의 이런 방법으로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知)와 견(見)의 아주 청정함이 없었던 때까지는,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나에게 3회전한 12형태[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의 이런 방법으로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知)와 견(見)의 아주 청정함이 있었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에게 지(知)와 견(見)이 생겼다. ㅡ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다[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 이것이 태어남의 끝이다. 이제 다시 존재로 이끌리지 않는다.’라고. 



‘해피스님의 마음이야기’ 첫 번째 시간은  「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이것, 마음!」의 조건 관계를 알아보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종교를 정의해 본 시간이었습니다.


마음, 정확하게 알 때 사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법우님들께서도 부처님의 선언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를 일으켜 바른 불교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힘찬 일요일 보내시기 바랍니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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