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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법회 20주차 - 교계싱갈라경(D31)[부모-자식 관계]

0 1,247 2017.09.06 08:42

[동영상] ☞ https://youtu.be/0tS0njpX3tQ

 

쉽지만 어긋남이 없는 공부를 위해 해피법당이 개설하는 새출발법회 스무 번째 시간입니다. 교계싱갈라경(D31)을 공부하는 중인데요, 지난주까지 네 가지 업의 오염원-네 가지 사악한 업-여섯 가지 타락의 입구에 이어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공부하였습니다. 이어서 오늘부터는 경의 본 주제인 육방(六方)을 감싸는 자를 공부할 텐데요, 경은 장자의 아들이여, 어떻게 해서 성스러운 제자는 육방을 감싸는 자가 되는가? 장자의 아들이여, 이들 여섯 방향을 알아야 한다. 동쪽 방향은 부모라고 알아야 한다. 남쪽 방향은 스승이라고 알아야 한다. 서쪽 방향은 자식과 아내라고 알아야 한다. 북쪽 방향은 친구와 동료라고 알아야 한다. 아래 방향은 하인과 고용인들이라고 알아야 한다. 위 방향은 사문과 바라문이라고 알아야 한다.라고 하는데, ‘는 각각의 방향이 제시하는 관계에 대하여 다섯 가지 경우로 섬겨야 하고, 그러면 각각의 상대방 또한 다섯 가지 경우로 를 사랑으로 돌본다고 말합니다. 

 

먼저, 첫 번째 방향인 동쪽은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주제입니다. 

 

경은 

 

장자의 아들이여, 아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 경우로 동쪽 방향인 부모를 섬겨야 한다. ‘나는 하인처럼 잘 받들 것이다. 의무를 행할 것이다. 가문의 대를 확고하게 할 것이다. 계승해야 할 것을 잘 실천할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분들을 위해서 보시를 잘할 것이다.’라고. 장자의 아들이여, 이와 같이 아들은 동쪽 방향인 부모를 섬긴다.

 

그러면 부모는 다시 다음의 다섯 가지 경우로 아들을 사랑으로 돌본다. 사악함으로부터 멀리하게 한다. ()에 들어가게 한다. 기술을 배우게 한다. 어울리는 아내와 맺어준다. 적당한 때 유산을 물려준다. 

 

장자의 아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경우로 아들은 동쪽 방향인 부모를 섬기고 부모는 다시 이러한 다섯 가지 경우로 아들을 사랑으로 돌본다. 이렇게 해서 동쪽 방향은 감싸지게 되고 안전하게 되고 두려움이 없게 된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경전은 조금 다른 측면의 접근을 필요로 합니다. <질문 경(A4:42)>을 참고하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설명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비구들이여, 되물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비구들이여, 분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비구들이여, 제쳐두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설명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질문' 등에 대해서 [그 뜻은 다음과 같다.] '눈은 무상합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물론입니다. 무상합니다.'라고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단언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다.

 

'무상한 것은 눈을 말합니까?'라고 질문을 받으면 '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귀도 무상하고 코도 무상합니다.'라고 분석한 뒤에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분석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다.

 

'눈처럼 귀도 그러하고 귀처럼 눈도 그러하지요?'라고 물으면 '무슨 뜻으로 물은 것입니까?'라고 되물은 뒤에 '본다는 의미로 물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무상하다는 뜻으로 물은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렇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것이 되물어서 설명해야 하는 질문이다.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라는 등의 질문에 대해서는 '세존께서는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제쳐두어야 한다. 이것이 제쳐두어야 하는 질문이다."(AA..308~309)

 

[첨언] 질문에 따라 그 속함을 구분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잘 공부해서 신중하게 답하는 자세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가지 '제쳐두어야 하는 질문'은 때로 저를 곤란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 '부처님께 직접 여쭈어 보십시오. 부처님께서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제가 답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답을 하곤 하는데, 그럴 때 질문하신 분들의 어이없어함이 저를 곤란케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이 경에서 말씀하시듯이 그러한 답변은 어이없는 답변이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 답변인 것입니다. 오히려 부처님께서 설명하지 않은 부분을 문명의 발달 등을 핑계로 하여 자기의 견해를 답변으로 제시하거나, 그런 답변을 제공해 줄 것을 요구하는 질문자의 태도가 어이없는 왜곡의 시도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법우님들께서도 합당한 질문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혹시 제쳐두어야 하는 답변이 제공되었다고 해도 어이없어 하지 마시고, ', 이 질문은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 되지 않아서 부처님께서 설명하지 않으신 범주에 속하는구나!'하고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우님의 공부가 필요할 것이니 열심히 공부에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는 경우는 아니겠지만, 질문의 경우처럼 부처님의 설법에도 차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설법은 소유의 영역에서 삶을 향상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설법은 존재의 영역으로 올라서기 위한 설법입니다. 또 어떤 설법은 존재의 영역에서 더 향상하기 위한 설법입니다. 그리고 어떤 설법은 벗어나 해탈된 삶을 실현하기 위한 설법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설법은 그 당시 사회가 가지는 문화 현상 위에서의 삶의 향상을 설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설법의 경우는 오랜 세월이 지난 현재 사회의 문화 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눈을 가져야 하는데, 이 경에서도 그런 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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