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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두 번째 이야기 - 종교에 대한 접근

0 1,275 2017.09.26 07:21

해피스님의 마음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마음!」의 조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자고 하였습니다.


종교! 종교란 무엇일까요? 


얼마 전에 제가 출가 전에 가까이 지내던 벗님을 만났습니다. 이 벗님은 오랫동안 교회를 잘 다니는 훌륭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출가하고 나서 벗님을 처음 만났는데,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스님, 이제 스님이 되셨네요.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차이점을 보이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면 목표점이 같지 않겠습니까? 저기를 가면 목사님이 계시고, 여기 앞에는 스님이 계시지만, 서로간의 종교가 이름을 달리 할 뿐. 결국 스님이 가고자 하는 그 길과 우리가 목사님을 따라서 가고자 하는 그 길이 한 가지 길이 아니겠습니까?” 


법우님 생각엔 어떠세요, 이런 이야기가 타당한가요? 예. 저도 사실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가 벗님한테 ‘벗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ㅡ 불교, 기독교, 천주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과 같은 세계적인 종교들은 대부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만약 절에서 ‘그대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지는 것이 최고입니다. 다른 생명을 해쳐서라도, 또는 도둑질을 해서라도 그대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십시오.’라고 가르친다면, 아마도 이런 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이것은 절에 다니는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대가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쳐도 됩니다, 도둑질을 해도 됩니다.’라고 가르친다면 기독교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화된 종교라고 하면 공통점이 있다고 해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의 기준’이라고 말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몸으로든 말로든 마음으로든 행위할 때 이런 행위는 하고 저런 행위는 하지 말라는 기준의 제시인 거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그대가 행복하고 싶다면, 그대와 함께 하는 다른 존재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마십시오. 다른 생명들의 안전과 행복 위에서 그들과 함께하는 내가 더불어 안전하고 더불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등인 겁니다.


그럴 때 행위하는 나도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지 않고, 행위의 대상인 남들도 나 때문에 괴롭게 되지 않는 것이고, 이런 가르침이 우리 사회에 보편되면 나와 남 즉 우리들의 관계에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이겠지요.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지옥 경>에 나타나는 오계(五戒)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배경 음악]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마치 하인처럼 지옥에 데려다 놓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그는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삿된 음행을 하고, 거짓말을 하고, 방일의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섭취한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마치 하인처럼 지옥에 데려다 놓는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마치 하인처럼 천상에 데려다 놓는다. 무엇이 다섯인가? 그는 생명을 해치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방일의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읜다. 비구들이여, 이런 다섯 가지 법을 갖추면 마치 하인처럼 천상에 데려다 놓는다.


아마도 표현은 달라도 세계화된 종교들은 이런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이런 점에서 기준을 달리한다면, 그런 가르침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세계화된 종교로 성장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거겠지요.


그래서 벗님이 말하는 ‘기독교도 그렇고 불교도 그렇고 차이점을 보이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가면 목표점이 같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씀은 일견 타당성을 가지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지향점을 가진다는 벗님의 말씀에 대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삶 즉 산다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삶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 영역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이전에 존재하는 자기의 내면, 스스로의 내적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의 영역보다는 내적 영역이 훨씬 더 심오한 영역이어서 삶을 지배하고, 내가 괴로울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때, 각각의 종교는 자기의 내면, 스스로의 내적 영역에 대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각각의 종교가 심오한 교리를 제시하고 거기에 맞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일 텐데요, 이 심오함의 영역에서 차이가 있을 때 종교는 이름을 달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같은 뿌리를 가진 종교가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종교로 나누어지는 것도 보게 되는 데요, 이렇게 심오함의 영역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삶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식의 선에서 말해보면, 기독교는 생겨나지 않았으면서 모든 것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으로의 신을 전제합니다. 그 신이 세상을 창조했고 모든 존재를 창조했고 인간도 창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창조된 것인 나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인 그분의 것입니다. 그분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 잘 사는 것이고, 그렇게 잘 살면 죽은 후에는 천국에 태어나서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에는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착하게 살아가야 하는 표면적인 삶의 영역보다는 기독교를 대표하는 훨씬 더 중요하고 심오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 심오함의 영역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내고, 죽은 후에는 하나님 곁에 태어나서 영생을 누리는 것이 아마도 그분들이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일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불교도 삶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제시합니다. 상식의 선에서 말해보면, 불교는 생겨나지 않은 것을 부정합니다. 무아(無我)인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를 포함한 모든 것은 생겨난 것이고, 생겨나는 과정에 참여하는 조건들에 의해 그 상태가 결정됩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인 나의 삶은 생겨난 그대로 나의 삶입니다. 생겨나는 과정이 잘 제어되지 않으면 불만족 즉 괴로움의 상태를 만들 것이고, 잘 제어되면 만족 즉 행복의 상태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무아상경>에 나타나는 무아(無我)의 선언입니다. [배경 음악] 


비구들이여! 오온(五蘊)은 무아(無我)다. 만일 오온(五蘊)이 아(我)라면 병(病)으로 인도되지 않을 것이고, 이 오온(五蘊)에 대해 ‘나의 오온(五蘊)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오온(五蘊)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오온(五蘊)이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오온(五蘊)은 병으로 인도되고, 오온(五蘊)에 대해 ‘나의 오온(五蘊)이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오온(五蘊)이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도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착하게 살아가야 하는 표면적인 삶의 영역보다는 불교를 대표하는 훨씬 더 중요하고 심오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 심오함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과정이 잘 제어되는 삶을 살아냄으로써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이 이어지게 하다가 끝내는 모든 불만족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마도 우리가 불교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일 겁니다.


어떤가요? 상식적인 선에서 기독교와 불교를 비교해 보았는데요. 두 세계적 종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보이시나요? 그렇습니다. 표면적인 삶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의 기준’에서는 공통점을 볼 수 있겠구요, 심오한 영역에서 제시하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이유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거지요.


그래서 제가 벗님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ㅡ “벗님이 모든 종교가 다 목표점이 같으니까 우리가 남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사실은 그 차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기독교대로 표면적인 삶과 심오한 영역에서 지향하는 바가 있고, 불교는 불교대로 표면적인 삶과 심오한 영역에서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 각각에 대해서 서로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고 서로를 인정해주고, 그러는 가운데 표면에 드러나는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 기준이 같다고 함으로써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다르다고 하여 서로가 다투거나 욕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표면적인 삶에서는 나 이외의 존재들과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착한 일을 해야 하는 점이 서로 같으니까요.”


다행이 벗님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의 차이를 제가 압니다.”라면서 저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주었습니다. 참 건전한 대화를 나눈 거지요. 음악 듣겠습니다. 돌아와서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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