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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출발 법회

세 번째 이야기 - 종교의 정의

0 1,280 2017.09.26 07:26

해피스님의 마음 이야기를 듣고 계십니다. 「조건에 따라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마음!」의 조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는 중인데요, 표면적인 삶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의 기준’에서는 공통점을 볼 수 있었구요, 심오한 영역에서 제시하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이유에서는 종교 간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일까요? 무엇이기에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여러 종교가 함께 존재하고 있는 걸까요?


산업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서구 중심의 물질문명이 세계를 지배한 수 백 년의 세월 동안 종교는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해석되었습니다. ‘종교는 신에 대한 의존’이란 개념을 앞세우고, 그런 점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는 해석까지도 공공연히 주창되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스승이시고, 우리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통해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한 삶, 그런 세상을 실현해 가는 우리의 종교인 불교가 아예 종교도 아니라는 편견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불교신자로서 정말이지 자존심 상하는 현상인 거지요. 오늘 그런 편견을 벗겨내고 진정한 의미의 종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표면적인 삶의 영역에서 주어지는 ‘관계의 유지를 위한 행위의 기준’에서의 공통점과 심오한 영역에서 제시하는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이유에서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왜 종교인 걸까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이라는 기독교의 교주가 당신 나름으로 나라는 존재를 해석하고, 그의 삶의 방법 그리고 삶의 토대인 세상을 이해하였겠지요. 그래서 당신대로 ‘아, 존재는 이러한 것이구나.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구나.’라고 보았을 테고, ‘이러한 존재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한 결과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보았을 테지요. 그리고 이런 삶의 토대가 되는 세상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세상이라고 보셨겠지요. 


즉, 예수님이라는 한 분의 스승이 당신대로의 공부를 통해 ‘존재란 무엇일까? 존재들의 삶은 무엇일까? 이러한 삶의 토대인 세상은 무엇일까?’라는 심오하고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해석을 한 것이지요. 그러고 나서 ‘여보시오. 내가 존재를, 삶을, 세상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라는 스승이 해석해서 선언한 이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듣게 됩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거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 정말로 그럴 것이다. 참으로 저 분이 말씀하신대로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내가 있게 된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살아가야하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삶의 토대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옳겠다.’라고 공감하고 동의하였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 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가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 분을 닮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해석해서 선언한 그런 ‘존재, 삶, 세상’이라는 내용에 대해, 누군가가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 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가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 분을 닮아야겠다.’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을 예수님의 신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런 분들이 기독교 또는 천주교 신자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기독교 또는 천주교라고 부른다고 하면 기독교 또는 천주교라는 종교에 대한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2600년 전에 고타마 싯달타라는 한 사람이 당신대로,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야 하고 늙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 것일까? 또한, 그 삶의 과정에서 다양한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라고 고민하고, 답을 찾기 위해 아주 힘들게 공부를 하고, 그 끝에 깨달음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깨달음이라는 특별한 측면에서, ‘존재란 무엇일까? 존재들의 삶은 무엇일까? 이러한 삶의 토대인 세상은 무엇일까?’에 대해 해석해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여보시오. 내가 존재를, 삶을, 세상을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선언을 통해 그는 스스로를 부처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면 부처님이라는 이 스승이 해석해서 선언한 내용을 많은 사람들이 듣게 됩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요.’라고 거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 정말로 그럴 것이다. 참으로 저 분이 말씀하신대로 나는 생겨난 것이고, 생겨나는 과정에 참여하는 조건들에 의해 그 상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겨난 그대로가 나의 삶이어서, 생겨나는 과정이 잘 제어되지 않으면 불만족 즉 괴로움의 상태를 만들 것이고, 잘 제어되면 만족 즉 행복의 상태를 만들게 될 것이다. 생겨난 것인 삶의 토대인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안내를 받아 살아가는 것이 옳겠다.’라고 공감하고 동의하였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처님의 말씀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사람들 중에는 부처님에 대해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 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가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 분을 닮아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 경전 읽고 가겠습니다. <상가라와경>에 나타나는 중생구제에 대한 부처님의 입장입니다. [배경 음악] 


한 곁에 앉은 상가라와 바라문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ㅡ "고따마 존자시여, 저희 바라문들은 스스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다른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기도 합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스스로 제사를 지내는 자와 다른 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는 자는 모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공덕을 닦나니 그것은 바로 제사로 인한 것입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나 어떤 가족이든지 그 가족을 떠나 집 없이 출가한 자는 오직 자기 한 사람만 길들이고 자기 한 사람만 고요하고 자기 한 사람만 완전한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공덕을 닦나니 그것은 바로 출가로 인한 것입니다."


"바라문이여, 그렇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시 물어 보리니 그대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설명하라. 바라문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에 여래가 출현한다. …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라. 이것이 길이고, 이것이 실천행이다. 나는 그 길에 의지하고 실천해서 범행(梵行)의 최상의 목표인 [열반을] 스스로 실다운 지혜로 실현한 뒤 그것을 그대들에게 설한다. ㅡ ‘오라! 그대들도 내가 설한 대로 실천하면 범행의 최상의 목표인 [열반을] 스스로 실다운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스승은 법을 설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 실천한다. 그들은 수백 명, 수천 명, 수십만 명에 달한다. 바라문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러할진대 출가로 인해 공덕을 쌓는 것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겠는가, 아니면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출가로 인해 공덕을 쌓는 것은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해석해서 선언한 그런 ‘존재, 삶, 세상’이라는 내용에 대해, 누군가가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참으로 내가 저 분을 스승으로 삼아 뒤따라가야겠다. 그래서 나의 삶도 저 분을 닮아야겠다.’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을 부처님의 신자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설명이 되지 않을까요? 사실은 이런 분들이 불교 신자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을 불교라고 부른다고 하면 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제 구체적으로 질문해 보겠습니다. 종교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각각의 스승들이 당신들대로 ‘존재와 삶과 세상’을 해석하여, 그것을 선언하고, 그 선언을 들은 사람들 중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해서 그를 스승으로 삼아 뒤따르고 삶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아서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고, 거기에 천년 이천년 삼천년을 유지되어 내려오면, 이것을 종교라고 부른다고 정의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종교는 이렇게 정의되어야 합니다. 그때 더 이상 불교신자인 우리가 ‘신에 대한 의존’이란 개념을 배제한다는 이유로 종교를 상실하는 어처구니없음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심오한 영역을 ‘신에 대한 의존’으로 해석하는 기독교란 종교와 ‘생겨남의 제어’로 해석하는 불교라는 종교로 대표되는 두 부류를 모두 아우루는 확장된 종교의 개념이 정립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부처님의 선언을 전법륜경(轉法輪經)을 통해 들어보겠습니다.[배경 음악]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 이와 같이 세 가지 측면과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청정하지 못했기에, 비구들이여! 나는 천인과 마라와 범천세계, 사문과 바라문과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에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스스로 성취했다고 선언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비구들이여! 실로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 이와 같이 세 가지 측면과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알고 봄이 청정하게 완성되었기에, 비구들이여! 나는 천인과 마라와 범천세계, 사문과 바라문과 신들과 인간들 가운데에서, ‘위없이 바른 깨달음을 스스로 성취했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내게 이러한 앎과 봄이 일어났다 ; ‘나의 해탈은 확고하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존재화 되지 않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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